오피니언

[기고]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의 한계(I)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편집자주] 기독교한국침례회역사신학회(침례교역사신학회)와 침례신학대학교 침례교신학연구소가 10월 16일(월)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논문발표회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주제는 "자유교회 전통의 관점에서 본 종교개혁"이다. 이 발표회에서 김승진 교수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의 한계"를 발제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기독교가 자유교회(Free Church) 전통 속에 있는 교회들이 어떠한 역사를 가졌으며 신앙과 신앙생활에서 어떠한 점을 강조해 왔는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시해왔다고 지적했다. 자유교회의 전통은 중세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게 하며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의 한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자유교회의 개혁적 입장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 교수의 동의를 얻어 발제문을 전재한다.

I. 서론

김승진
(Photo : ⓒ 침신대)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계와 신학계에서는 "자유교회"(Free Church) 개념에 대해 생소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자유교회 전통에 속한 교회들의 교세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교회는 국가교회(State Church)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기본적으로 자유교회는 국교체제의 교회를 반대하며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강조한다. 교회는 국가권력과는 무관한 순수한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또한 자유교회에서는 유아뱁티즘(유아세례, Infant Baptism)을 행하지 않는다. 뱁티즘은 오직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자,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분명한 신자에게만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인 것이다.

그리고 자유교회에서는 교회를 "신자의 뱁티즘을 받은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 by Believer's Baptism)라고 믿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적인 유기체이기 때문에 영적인 출생을 경험한 거듭난 신자들이 뱁티즘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회원이 된다고 믿는다. 뱁티즘이나 주의 만찬 자체에 죄를 사하거나 구원을 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으며, 내적인 영적 체험을 외적으로 표현, 혹은, 고백하는 상징(symbol), 혹은, 기념(memorial)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대체로 자유교회에서는 지역교회(Local Church)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강조한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정치"(Christ-centered democratic congregationalism)의 행정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약성서에서 계시된 초대교회(Early Church), 혹은, 신약성서적 교회(New Testament Church)가 이러한 신앙원리를 따르고 있다고 믿는다.

올해로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계의 각 교단에서는 주류종교개혁가들인 루터, 쯔빙글리, 깔뱅의 개혁활동과 사상을 주로 다루면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가들 가운데에는 이들 외에도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국가교회 체제를 배척하며 신자들의 공동체를 추구했던 개혁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로 인해서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는 물론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의 교회들로부터 엄청한 박해를 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Biblical Anabaptists)이었다. 이들은 자유교회운동의 원천이 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번 논문발표회를 통하여 자유교회 전통 속에 있는 교회들이 어떠한 역사를 가졌으며 신앙과 신앙생활에서 어떠한 점을 강조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기독교계가 무관심해 왔거나 무시해 왔던 종교개혁의 또 다른 일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본질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본 후,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을 개관하고,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교회개혁의 한계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II. 교회타락의 본질과 그 결정적인 시기

종교개혁이란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개입하셔서 16세기 당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개혁해내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수많은 개혁가들을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불러내어 사용하셔서 타락한 교회를 건져내시고 구원하셨다. 필연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교회의 타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때를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2,000년 세계교회역사를 바라보는데 중요한 관점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무엇을 교회타락의 결정적인 요소로 보는가 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가들 사이에서도 이에 관하여 약간씩 의견을 달리하였다.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원의 교수였던 윌리엄 이스텝(William R. Estep) 박사는 프랭클린 리텔(Franklin H. Littell) 박사의 글(Franklin Hamlin Littell, The Anabaptist View of the Church [Boston: Starr King Press, 1958], 64)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혁가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타락은 교황이 세속적인 권력을 가지고 세속국가를 지배했을 때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루터는 사비아누스(Sabianus)와 보니파스 3세(Boniface III) 때로 보았고, 쯔빙글리는 힐데브란트(Hildebrand)와 성직계급제도가 확립된 때로 지적하였으며, 깔뱅은 위대한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교황까지 소급하였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교회와 국가가 연합되었을 때를 타락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William R. Estep, The Anabaptist Story: An Introduction to Sixteenth-century Anabaptism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6], 241)

침례교회를 비롯한 자유교회 전통에서는, 교회의 타락 시점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본다.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 즉,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신교의 자유를 선포한 것은, 한편에서는 기독교 혹은 복음이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점령한 교회 승리의 날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가 세속정치에 타협했거나 굴복했거나 이용당했던 교회 타락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날이었다. 이를 "콘스탄틴의 공생"(Constantine Symbiosis)이라고 부른다(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6], 118-9). 사분되어 있던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재통일한 콘스탄틴 황제는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추스르기 위해 당시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던 기독교세력을 끌어안은 것이다. 국가는 교회와 결탁하여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정치적인 지지를 받고자 하였고 교회 역시도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프랭클린 리텔 박사에 의하면, 관료들의 정치적 후원을 입어 개혁을 이룩한 루터와 쯔빙글리와 깔뱅에게는 교황권이 위기를 맞았다든지 교황권이 세속국가 위에 군림하여 전횡을 일삼았던 때를 교회의 타락으로 여겼다. 루터는 교회타락의 때를 7세기 초의 교황 사비아누스(Sabianus, 604-606년)와 보니파스 3세(Boniface III, 607년) 때로 보았고, 쯔빙글리는 세속군주의 성직서임권(Lay Investiture)를 부정하며 성직자의 권위를 크게 신장시킨 교황 그레고리 7세(Gregory VII, 1073-1085년) 때로 보았고, 깔뱅은 중세시대를 열었던 중세 최초의 본격적인 교황인 위대한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Gregory I, 590-604년) 때로 보았다. 이들 교황들은 모두 교회와 국가의 결탁이 이루어진 이후에 즉위한 교황들이었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은 당시의 교회의 모습과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즉, 교회와 국가의 공생으로 말미암아 이제 교회는 지하묘지(catacombe)에 숨어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거는 모험을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집단개종(group conversion)이 성행하면서 교회는 점차 신자들과 죄인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갔고, 이방종교의 풍습과 세상적인 가치가 교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세속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자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를 각오한 희생적인 신앙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380년에 로마제국의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5)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로 지정하였다. 국교가 되었다는 말은 기독교만이 합법적인 종교이고 다른 모든 종교들은 불법적인 종교로 이단시되었다는 말이다. 핍박받던 기독교가 민속종교들이나 다른 종교들을 핍박하는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직제를 모방하였고 성직자들은 로마관료조직의 여러 계급들처럼 성직자의 지위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색깔이나 장식을 한 성의를 입게 되었다. 교회는 점차 성직자중심주의(sacerdotalism)와 성직계급제도(priestly hierachy)와 관료주의적 교황체제(bureaucratic papal system)로 변모하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가 결탁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이 땅에 세우고자 의도하셨던 신약성서적인 "참 교회"(True Church, Rechte Kirche)는 그 본질에 있어서 크게 변질되고 타락하고 말았다.

III.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 개관

이렇게 교회와 국가가 결탁된 상황이 1,000년 이상 지속되면서 유럽에서는 로마교황청이 성·속을 총괄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중세시대를 지칭하는 표현들 가운데 "한 목자 아래 한 양떼"(One Flock under One Shepherd)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한 목자"는 교황을 가리키고 "한 양떼"는 나라와 민족을 초월해서 유럽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들을 가리킨다. "기독교왕국"(Christendom)이란 말도 있는데, 교황청이 통치하는 유럽 전체가 "그리스도의 왕국"(Kingdom of Christ)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anum)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교황이 머리이고 유럽의 모든 주민들이 지체들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통일성"(unity)과 "안정성"(stability)이 중세 유럽을 특징짓는 낱말이 되었다.

그러나 두 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1095-1291)을 겪으면서 중세 유럽사회의 기저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지식인들이 희랍의 고전들을 재발견하고 접하면서 14-15세기에 르네상스(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황청이 약 70년 동안 프랑스 왕실의 간섭과 통제를 받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1309-1377)와 "교황청의 대분열(1378-1417)을 겪으면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유럽주민들은 로마교황을 따르느냐 아비뇽교황을 따르느냐에 따라 양분되었다. 또한 각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민족주의 의식으로 인해 중세의 "통일성"과 "안정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운동은 단순히 교회개혁에 머물지 않았고 유럽사회 전체의 변혁을 불러왔다.

미국 하바드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였던 조지 윌리암스(George H. Williams) 박사는 그의 방대한 저술 『근원적 종교개혁』(The Radical Reforma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2])에서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크게 두 흐름으로 분류하고 있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Magisterial Reformation)과 "근원적 종교개혁"(Radical Reformation)이 그것이다.

1. 관료후원적 종교개혁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은 크리스천 세속 정치인들의 정치적 후원을 입은 종교개혁, 다른 말로 하면,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결탁해서 성취한 종교개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범주에 드는 대표적인 개혁의 흐름은 루터교회(Lutheran Church),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장로교회), 그리고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성공회)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에는 삭소니 주의 현자 프레드릭(Frederick, the Wise of Saxony, 1463-1525)과 헷세 주의 필립(Philip of Hesse, 1504-1567)이, 울리히 쯔빙글리의 경우에는 취리히(Zuerich) 시의회의 의원들이, 쟝 깔뱅의 경우에는 제네바(Geneva) 시의회의 의원들이 개혁을 지지하고 후원하였다.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경우에는 당시 튜더 왕조의 왕 헨리 8세(Henry VIII, 1491-1509-1547)와 그의 자녀들(왕 에드워드 6세,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이 개혁활동을 주도하였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크리스천 세속 정치인들과 실력자들의 후원을 입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국가와 교회의 공생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교회는 독일과 덴마크, 그리고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에서 국교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존 낙스(John Knox, c. 1514-1572)에 의해 성취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그 나라의 국교가 되었다. 영국국교회에서는 영국 왕이 섬나라 영국 내의 모든 교회들의 수장(Head of the Churches)이 되어 있다. 이것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중세시대 로마가톨릭교회가 유럽의 모든 세속국가들과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로마가톨릭교회의 유아뱁티즘 전통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합일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즉, 어린 아이가 출생을 하면 그 지역을 관장하는 행정관청에 "호적신고"를 하고, 동시에 그 행정관청의 관할 하에 있는 교구교회(Parish Church)에서 유아뱁티즘을 받으면서 "교적신고"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에는 유아뱁티즘이 국가와 교회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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