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운동의 태동과 그 역사적 의의(I)

김승진 (침례교역사신학회 회장)

편집자 주]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에 가려진 초창기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개혁적 활동에 주목하면서 이들이 태동하게 된 과정과 그들이 오늘날의 기독교계에서 갖는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내용을 2부로 나누어 전재한다.

I. 들어가면서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 동부 삭소니 주 비텐베르크(Wittenberg, Saxony)에 있는 성교회(Schlosskirche, Castle Church) 출입문에 "95개조"(Ninety-five Theses)를 붙였던 날은 1517년 10월 31일 밤이었다. 다음 날인 11월 1일은 모든 로마가톨릭 성인들의 순교와 희생을 기리는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많은 교인들과 주민들이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면죄부 판매를 비롯하여 당시의 교회 부조리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95개조"의 글에 담아 게시하였다.

스위스 취리히(Zuerich)에서도 이와 유사한 종교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1518년 연말에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가 그로스뮌스터(Grossmuenster) 교회에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그 교회를 중심으로 스위스 북부 지역의 로마가톨릭교회를 개혁해나가기 시작하였다. 1519년 신년벽두부터 매 주일마다 마태복음의 내용을 강해하면서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과 신앙생활은 어떠했었는지를 교인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신약성서의 가르침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깨닫도록 하였다.

또 다른 흐름의 종교개혁운동이 그로부터 7-8년 후에 취리히에서 일어났다. 쯔빙글리의 제자였던 젊은이들이 스승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다가 1,0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교회전통으로 굳어져 있던 유아뱁티즘(유아세례, Infant Baptism) 행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아무런 인지능력도 없고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죄용서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리고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단지 그 부모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긴 것이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일종의 기독교문화로 자리잡고 있었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의 주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지역의 로마가톨릭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갓난아기가 태어나면 그 부모는 행정관청에 출생신고, 즉, "호적신고"를 하였고, 거의 동시에 그 지역의 교구교회(Parish Church)에서 유아뱁티즘을 받게 함으로써 "교적신고"를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거듭남의 체험(born-again experience)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태어나면서 그 지역의 교구교회로 입적이 되었다. 그래서 중세 유럽사회를 지칭하는 말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One Flock under One Shepherd)였다. "한 목자"는 교황을 가리키고 "한 양떼"는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유럽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들을 가리킨다.

일단의 쯔빙글리의 제자들은 이렇게 이해되고 있던 교회전통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교회(New Testament Church)란 예수 믿은 신자들의 공동체, 다시 말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거듭난 체험, 즉, 영적 출생의 체험을 한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신자에게만 뱁티즘을 베풀고 그러한 신자들로 이루어지는 교회가 바로 예수님이 세우려고 의도하셨던 교회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받았던 뱁티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난 후에 자발적으로 다시 뱁티즘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나뱁티스트들"(Anabaptists, 다시 뱁티즘을 베푸는 자들[Rebaptizers], 재세례파, 재침례교도들)이라는 이름이 붙혀지게 된 것이다. 본고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즈음에, 초창기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이 태동하게 된 과정과 그들이 오늘날의 기독교계에 갖는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II. 울리히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이 글에서 II-IV장은 필자의 저서 근원적 종교개혁: 16세기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와 신앙과 삶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11], 61-85, "제2장 쯔빙글리의 개혁운동과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운동의 태동"의 내용을 요약하고 수정하고 보완한 것임)

서론에서 언급했던 바대로 종교개혁운동의 새로운 물줄기를 형성한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운동은 취리히 시에서 전개되고 있던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의 과정에서 파생되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산간지대에 위치한 빌트하우스(Wildhaus)라는 마을에서, 1484년 1월 1일에 아버지 울리 쯔빙글리(Uly Zwingli)와 어머니 마가렛타(Magaretha) 사이에서 8남매(2자매와 6형제) 중의 셋째로 출생하였다(William R. 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6], 162).

비엔나 대학교와 바젤 대학교에서 대학교육을 마친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1506-1516에는 글라루스(Glarus)에서, 그리고 1516-1518에는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담임목회자로 봉사하였다(William R. Estep, The Anabaptist Story: An Introduction to Sixteenth-century Anabaptism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6], 11). 특히 아인지델른 사역기간 동안에, 그는 에라스무스(Erasmus)가 1516년에 편찬한 "희랍어 신약성경"을 탐독하면서 신약성서에 눈을 뜨게 되었고, 16세기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행습들이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교회들과 성도들의 교회생활 모습과는 너무나 많은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었다.

쯔빙글리가 취리히 시에 있는 그로스뮌스터(Grossmuenster) 교회의 부름을 받고 부임한 것은 1518년 12월 27일이었고, 1519년 1월 1일부터 목회사역을 본격적으로 감당하였다(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167). 그의 나이 정확히 35살이 되는 생일날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마태복음을 1장부터 장별로 강해하며 설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청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쯔빙글리는 자신의 개혁사상을 취리히 시의 시의회 의원들과 교구민들에게 서서히 주입시키면서 취리히 시(City)와 취리히 주(Canton)의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그의 개혁 방법들은 용의주도하였다. 첫째로, 그는 시의회 의원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고자 하였다. 그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자신의 개혁활동을 위한 배후의 힘으로 삼았다. 둘째로, 강해설교를 통해 교구민들에게 초대교회의 모습과 성도들의 신앙행습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그것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셋째로, 그는 대학교육의 맛을 본 젊은 청년들을 모아서, "예언모임"(prophezei, prophecy meeting)이라는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였다. "예언모임"은 쯔빙글리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제자훈련 모임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개혁활동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인재풀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넷째로, 그는 동료 개혁가들과 함께 로마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과 공개토론회(Public Disputation)를 간헐적으로 개최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신앙행습과 자신과 개혁가들의 개혁사상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민들에게 제공해 주었다(Ibid., 169-70).

그는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과의 공개적인 토론회를 벌여 자신에게 호응하는 청중들의 반응을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개혁적인 신앙을 확산시켜 나갔다.

III. 공개토론회들

1. 제1차 공개토론회 (1523년 1월 29일)

첫 번째 공개토론회는 1523년 1월 29일에 개최되었다. 취리히의 시청사(Rathaus)에 약 600여명의 관심 있는 참석자들이 운집하여 토론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쯔빙글리는 이미 자신의 신앙과 개혁적인 사상을 "67개조"(Sixty-seven Articles)로 요약하여 준비해 두고 있었다(Robert A. Baker, A Summary of Christian History [Nashville, TN.: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17). 그것은 쯔빙글리의 개혁적인 신앙관과 목회관이 잘 요약되어 있는 일종의 신앙고백이었다. 이 글에서 쯔빙글리는 성경중심적인 신앙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67개조"의 처음 15개 조항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복음적인 진리와 자신의 개혁적 신앙을 피력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무척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었다. 나머지 52개 조항은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그릇된 관행과 성서적이지 못한 신앙체계를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체제에 대해 매우 강한 표현으로 도전하였다. 교황은 거짓 사도(55조)이며, 시몬과 발람의 동료요 사탄의 화신(56조)이라고 악평하였다.

제1차 공개토론회는 쯔빙글리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취리히 시장과 시의회는 쯔빙글리와 그의 설교가 합법적임을 인정하였고, 그의 개혁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동시에 취리히 주 내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던 목회자들은 쯔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르되 반드시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할 것을 권면하였다.

2. 제2차 공개토론회 (10월 26일-28일)

성서적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태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토론회는 1523년 10월 26일-28일에 개최된 두 번째 공개토론회였다. 일반적으로 "10월 토론회"(October Disputation)라고도 불린다. 3일 동안 토론할 주제가 사전에 정해져 있었는데, 첫째 날에는 교회 내에서의 성상과 성화(Statue and Icon)의 사용에 대하여, 둘째 날에는 미사(Mass)에 대하여, 셋째 날에는 연옥(Purgatory)에 대하여 토론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178-9).

1) 첫째 날 (1523년 10월 26일)

개혁사상을 가진 참석자들 모두가 성상과 성화의 사용은 우상숭배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였다. 성상은 우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데 참석자들은 거의 동의하였다. 특히 독일과 스위스 접경에 있는 발츠후트(Waldshut)에서 온 발타자르 휩마이어(Balthasar Huebmaier) 박사가 언성을 높여 오직 성경만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역설하면서, 교회당 안에 성상과 성화를 두는 것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는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며 그것들을 향해 경배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Torsten Bergsten, Balthasar Huebmaier: Anabaptist Theologian and Martyr, trans. & ed. W. R. Estep [Valley Forge, PA.: Judson Press, 1978], 83).

2) 둘째 날 (1523년 10월 27일)

로마가톨릭교회가 화체설(Transubstantiation)에 입각하여 수백 년 동안 지켜온 미사는, 기본적으로 또 다른 희생제사적 예배의식이었다.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개혁가들은 미사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고, 미사행위는 우상숭배적인 양상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Estep, The Anabaptist Sroty, 16). 따라서 미사는 폐지되어야 하고, 주의 만찬은 성경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 흘리시고 살 찢기신 고난을 기념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쯔빙글리의 주의 만찬관인 "상징설"(Symbolism)이 구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날의 일정이 마쳐갈 즈음에, 취리히 시장이 등장하여 "미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토론하였으니, 시의회 의원들에게 최종 결정을 하시도록 맡기고 오늘의 토론회를 종료합시다"(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179에서 재인용)라고 선언하였다. 콘라트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이나 시몬 스텀프 같은 쯔빙글리의 제자들은 많은 성직자들이 참석한 그 날의 토론회에서, 미사와 관련한 토론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대하였다. 주의 만찬과 같은 신앙적인 문제를 정치인들의 모임인 시의회의 결정에 미루고자 하는 취리히 시장의 발언이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그레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인 쯔빙글리를 향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여기 성직자들이 많이 참석을 했고 미사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임이 확인된 이상, 희생제사로서의 미사를 폐지해야 한다는 결정을 여기서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토론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 쯔빙글리가 말을 받아 답변하였다: "시의회 의원님들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상의한 후에 적절한 조처를 취하실 것입니다"(Harold Bender, Conrad Grebel [Goshen, IN.: Mennonite Historical Society, 1950], 56-57, 96-98. Estep, The Anabaptist Story, 16-7에서 재인용).

쯔빙글리는 시의회 의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날의 모든 토론내용들이 시의회에서 검토되고, 최종적으로 시의회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취리히 시의회 의원들의 정치적 후원을 입으며 자신의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해 왔었기 때문에 쯔빙글리가 그러한 확신을 가졌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3) 셋째 날 (1523년 10월 28일)

셋째 날에는 연옥(Purgatory)에 관한 토론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어제의 토론회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사에 관한 토론과 미진했던 절차상의 문제를 놓고 참석자들 간에는 격렬한 언쟁이 있었다. 쯔빙글리는 계속해서 시의회 의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권위를 옹호했고, 결국에는 그들에게 최종적인 결정권이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자 그레벨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였다. 결국 연옥에 관한 토론은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셋째 날의 토론회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메노나이트 역사학자인 해롤드 벤더(Harold Bender)는 "10월 토론회"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취리히 시의회가 취리히 교회에 대하여 사법적인 결정권(jurisdiction)을 가진다는 것을 그레벨이 거부한 것은, 역사의 높은 분수령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이다. 비록 그 사건("10월 토론회"를 가리킴-필자 주)이 모호하기는 했지만, 근대 '자유교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Bender, Conrad Grebel, 99-100)고 말하였다.

1523년 10월에 취리히에서 열렸던 "10월 토론회"는 교회역사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신학자들과 신앙인들이 모여 토의하고 결정한 사항에 대해, "누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쯔빙글리의 제자들은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권위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쯔빙글리는 영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성·속을 총괄하고 있는 취리히 시의회에 최종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고, 시의회 의원들이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바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는데, 쯔빙글리의 제자들은 이미 시대를 많이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다시 말하면 국가는 더 이상 국교체제의 기독교를 가지지 않겠다는 것을 최초로 선언하여 그 내용을 헌법적인 규정으로 채택했던 것은 미국의 연방헌법(Federal Constitution, 1789)과 제1차 수정헌법(The First Amendment, 1791)이었다.]

3. 제3차 공개토론회 (1525년 1월 17일)

"10월 토론회"를 거치면서 제자들은 스승인 쯔빙글리와 일종의 영적인 괴리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 말씀과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고 시의회 의원들의 눈치를 살피는 스승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하였다. 그레벨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이제 제자들 사이에서 지도자요 대변인으로 부상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새롭게 등장한 신학적인 이슈가 있었는데, 그것은 "유아뱁티즘"의 타당성 문제였다.

그레벨과 그 동료들은, 유아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에게만 베푸는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이 제자도와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약성서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러한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은 꿈이나 환상이나 자의적인 성서해석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었다(Estep, The Anabaptist Story, 20). 그들은 희랍어 원어성경을 탐구하면서 그러한 확신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3차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주제는 뱁티즘, 특히 유아뱁티즘 문제였다. 1525년 1월 17일, 취리히 시청사에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그레벨, 만쯔, 게오르게 블라우락(George Blaurock) 등은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뱁티즘은 오직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에게만 베풀어야 하며, 자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유아에게 베푸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역설하였다. 죄도 모르고 구원받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영적인 인지능력도 없는 영아나 유아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인데, 교회 앞에서 자신이 신자임을 고백해야만 뱁티즘을 받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나기 같은 웅변"(torrent of words)을 쏟아놓으며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그는 유아뱁티즘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어릴 때에 이미 유아뱁티즘을 받았던 자들에게 또다시 뱁티즘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향해, "비더토이퍼"(Wiedertaeufer, Rebaptizers, Anabaptists, 다시 뱁티즘을 베푸는 자)라고 비난하며 조롱 섞인 별명을 붙여주었다(Estep, Renaissance and Reformation, 183). 공개토론회에 참석했던 청중들은 쯔빙글리를 향해 환호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결국 스승은 토론회의 승자가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패자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제3차 공개토론회는 쯔빙글리와 그의 제자들인 "스위스형제단"(Swiss Brethren)이 서로 분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서적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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