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성서는 승자의 책이 아닌, 희생자의 책이다"

[북리뷰] 해방신학자가 쓴 '루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가 역사에 등장한 뒤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제기된 의문이다. 어떤 이는 예수를 복 주시는 이로, 또 어떤 이는 구세주로 여긴다. 해방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신 해방자다.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본 예수는 스스로 가난을 택했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셨으며, 가난한 이들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저항하다 죽음을 맞이한 정치범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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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동녘)
▲ 해방신학자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의 루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은 신간 <가난한 예수>를 통해 해방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그러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그리스도교는 해방을 위한 종교'라고 선언한다.

우선 책과 저자 소개를 간략히 해야겠다. 이 책 <가난한 예수>는 신약성서 사복음서 가운데 '루가복음'을 해설한 해설서다. 김 소장은 이미 '마르코 복음', '마태오 복음' 해설서를 쓴 바 있다. 각각 <슬픈 예수>와 <행동하는 예수>가 바로 그 책이다.

김 소장은 이미 앞선 저작에서 해방신학적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상히 알렸다. 그런데 <가난한 예수>에서 해방신학의 관점은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는 그 어느 복음서 보다 '루가복음'에 예수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스스럼없이 루가를 해방신학자로 칭한다.

"<루가>는 복음서 중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해방신학이 가장 좋아하는 복음이기도 하다. 해방신학자 루가는 인류에게 해방자 예수요, 가난한 예수를 소개한다. <루가>의 주요 대상도, <루가>의 주체도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이 <루가>를 전하며, <루가>가 가난한 사람을 선포한다. <루가>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사람의 복음이다." - 저자 서문 중에서.

그 시대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

여기서 해방신학이 말하는 '가난'의 의미는 분명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가난'하면 얼른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사실 가난하니까 헐벗고 굶주린다. 그래서 이 같은 인상이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말하는 '가난'은 단순한 경제적 빈곤 차원을 넘어선다. 불의한 권력에 의해 억압 받거나, 왜곡된 경제구조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신체적 장애로 사회로부터 차별 받는 이들 역시 '가난'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박근혜 전 정권이 탄압한 세월호 유가족도 가난한 이들이고,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벌이다 경찰에게 붙잡힌 노동자들, 자유로운 이동권을 보장해 줄 것을 촉구하며 거리로 나선 장애인들 역시 가난한 이들에 속한다. 정리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 시대 가장 고통 당하는 이들인 셈이다.

가난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찾는다. 예수는 이에 화답해 스스럼없이 이들에게 다가간다. 그냥 다가간 게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신다. 또 병든 이들이 오면 치료까지 해준다. 특히 '루가복음'엔 예수가 병든 자를 고쳐주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혹자들은 이를 근거로 저자인 루가가 의사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해석이 꼭 옳지만은 않다. 의사가 아니어도 의학적 지식은 풍부할 수 있고, 유난히 루가가 예수의 병고침 활동을 눈여겨보았을 수도 있어서다.

그런데 예수의 병고침은 단순히 신비한 능력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예수가 역사에 등장했던 시기, 가난한 이들은 의료 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이게 비단 그 시절의 일일까? 첨단 의학이 경계를 확장하고 있는 지금에도 가난한 이들은 질병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튼, 예수는 이들의 내지르는 고통에 귀 기울이고 병을 고쳐준다.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건강을 회복한 이들은 경제활동을 시작해 가난의 고통을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말하자면 예수의 병고침 활동은 가난한 이들의 사회복귀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이 왜 예수에게 다가왔을까. 병을 치유받고 싶어서다. 병 고침은 환자가 사회적으로 복권되는 의미도 있다. 다시 사람들 속에서 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가난한 사람에게 치료에 드는 돈이 있을 리 없다. 죽음은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일찍 찾아온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먼저 한다." - 본문 97쪽

오늘날 교회는 가난한 사람만 있지 않다. 오히려 부자가 더 많다. 특히 이른바 '사회지도층' 가운데 상당수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보수 대형교회에 출석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을 더 반긴다. 복음서를 쓴 루가가 이끌었던 신앙 공동체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루가는 분명한 메시지로 가난한 이들을 편든다. '루가복음' 21장 1절에서 4절엔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내는 장면이 나온다. 성서 본문은 이렇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부자들이 와서 헌금 궤에 돈 넣는 것을 보고 계셨다. 마침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작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헌금을 강요할 때 즐겨 인용된다. '이 과부처럼 가진 것을 모두 바쳐라'는 대목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루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가난한 자들 편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김 소장은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설한다.

"부자 신자와 가난한 신자가 교회에, 성당에 함께 있다면 목사는, 신부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어떻게 설교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루가는 이런 곤란한 문제에 명쾌한 답을 준다. 부자 신자를 비판하고 가난한 신자를 편들어라. 목사와 신부는, 교회는, 평신도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부자 신자도 달래고 가난한 신자도 달래지 않는가. 교묘한 줄타기에, 중립에, 균형에 온갖 묘수가 동원되지 않는가. 신자가 줄어들까, 헌금이 줄어들까 고민하지 않는가. <루가>를 무시하고 헌금만 신경쓰지 않는가." - 본문 529쪽

분열보다 진실 거부가 더 나쁘다

이렇게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든다. 해방신학의 주제 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다. 그런데 복음서를 찬찬히 살펴보면 예수는 가난한 이들을 편들었고, 가난을 만들어내는 당대 사회질서에 거침 없이 도전했다. 예수 스스로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복음 12장 49절)고, "내가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 아나?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복음 12장 51절)고 말한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니, 그야말로 폭탄선언이다. 분열이라면 병적으로 반응하는 부류들이 있다. 특히 기득권자들이 그렇다. 교회 세습으로 논란이 일자, 아버지로부터 대형교회를 물려받은 아들 목사는 청중들 앞에서 '하나가 되자'고 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분열보다 진실을 거부하는 자들이 더 나쁘다고 꼬집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의 선언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중략) 가정에서, 사회에서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는 가톨릭 신자와 반대하는 신자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는 신부, 수녀와 반대하는 신부, 수녀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분열이 잘못된 게 아니라 진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쁜 것이다. 분열해야 마땅할 때는 분열해야 한다." - 본문 345쪽

해방신학은 '가난'을 재정의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혁명가적 면모를 입혔다. 사실 예수가 지금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종북'이니 '좌파'니 하는 나쁜 말로 매도되기 딱 알맞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예수의 해방자적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고, 가난의 범주를 확장했다기 보다 성서가 기록한 원래 예수의 모습을 복원시켰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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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진 = 지유석 기자)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은 해방신학의 본고장 엘 살바도르에서 수학한, 국내 보기드문 평신도 해방신학자다.

저자인 김근수 소장은 해방신학의 본고장 엘 살바도르에서 수학해 해방신학을 우리에게 알렸다. 저자에게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이런 생각도 든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 위해선 교회를 다녀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이제 예수를 교회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예수를, 성서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모습이 과연 예수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한국으로 시야를 좁혀보면 교회가, 성직자가 예수를 치부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저자가 고발한 가톨릭 교회의 민낯은 참으로 놀라울 지경이다.

"촛불집회에 나오는 주교는 거의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조·중·동과 종편 방송으로 보는 신부와 수녀가 적지 않다. TV를 통해 구경하고 시국을 한탄하는 사제는 많지만, 광장에 나와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악의 세력과 싸우는 사제는 적다. 발코니에서 세상을 구경하려는 모양이다. 골프장 출입을 비롯해 사제의 세속화 현상은 늘고 있다. 돈맛을 알고 겉멋이 든 사제가 많다. 국민과 신자에게 존경 받는 가톨릭 성직자 숫자가 줄었다." - 본문 339쪽

목사나 신부가 아니어도, 아니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가난한 이들을 편들고 불의한 사회체제와 맞서 싸우는 이들은 많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다. 예수는 화려한 교회 건물에 있지 않다. 그보다 현장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계신다.

이 책 <가난한 예수>는 비단 그리스도교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 해방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예수를 새롭게 알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또 지금 한국교회가 예수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사실도 일깨우기도 할 것이다. 정말 우리 사회가 정의롭게 바로 서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싹이 텄다. 라틴 아메리카는 과거 스페인 침략군에게 유린당했고, 현대로 오면서 미국의 그늘 아래 놓이면서 심한 질곡을 겪어야 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가난, 정치적 억압, 경제적 수탈 등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질곡은 해방신학을 꽃피운 자양분이 됐다.

한편으로는 부럽다. 한반도 역시 라틴 아메리카 못지않은 질곡을 겪었고, 이 같은 질곡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러나 이 같은 질곡을 겪으면서도 우리나라엔 우리만의 신학이 없다. 물론 민중신학이 싹트기는 했지만, 좌파사상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누가 뭐래도 한국교회는 성장을 곧 축복으로 여기는 '번영신학'이 주류다.

조용기·김홍도 따위의 교회 성장주의자들이 교회권력을 틀어쥐고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건 명백히 반그리스도적이다. 이들이, 그리고 교회 성장이란 헛된 꿈을 꾸는 목회자들이 성서를 제대로 읽고 가난한 예수를 발견해야 할텐데 말이다. 저자의 말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으려 한다.

"성서는 승자의 책이 아니라 희생자의 책이다. 성서는 가짜 예언자의 책이 아니라 진짜 예언자의 책이다. 성서는 이름 없는 수많은 예언자들에게 바치는 하느님의 헌사다. 의롭게 살면서도 온갖 욕설에 시달리는 형제자매여, 서러워 마라. 하느님의 역사가 당신을 인정하고 기억한다." - 본문 586쪽

지유석 luke.wycliff@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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