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에벤에셀

2018년 1월 14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삼상 7:7-14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이 블레셋 사람에게 들어가니, 블레셋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왔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 주시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한 마리 가져다가 주님께 온전한 번제물로 바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The Lord heard him).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고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께서 큰 천둥소리를 일으켜 블레셋 사람을 당황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이 미스바에서 나와서, 블레셋 사람을 벳갈 아래까지 뒤쫓으면서 무찔렀다. 사무엘이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놓고 "우리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셨다!" 하고 말하면서,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을 막아 주셨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 간 성읍들 곧 에그론과 가드 사이에 있는 성읍들도 이스라엘에 되돌아왔으며, 성읍에 딸린 지역도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되찾았다. 이스라엘은 또 아모리 사람과도 평화롭게 지냈다.]

* 주님의 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혹독한 추위가 몰려와 겨울 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찬 공기를 붙잡아두지 못한 탓에, 제트 기류가 요동치면서 지구촌 곳곳에 기상 이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혹한에 시달리는 지역도 있고, 폭염이 몰아친 지역도 있고, 홍수와 산사태로 피해를 입은 곳도 있습니다. 가이아 이론이 아니더라도 지구는 한 몸임이 분명합니다. 산하는 꽁꽁 얼었지만, 지금 한반도에는 평화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의 당국자 회담이 열리면서 오랫동안 닫혀 있던 대화의 채널이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주변 국가들도 이러한 정세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인해 이런 변화를 낙관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회의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화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꽁꽁 언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처럼 이 땅에도 역사의 봄이 찾아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는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갱신했던 이스라엘의 경험을 되새겨보려 합니다.

엘리 제사장이 국가 지도자로 있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님의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는 충격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언약궤가 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을 사람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삼상4:22).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언약궤를 약탈해 간 블레셋은 오히려 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마다 변고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다곤 신상이 무너지고, 악성 종양이 일어나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성경 기자는 "하나님이 거기에서 그들을 그렇게 무섭게 내리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온 성읍 사람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삼상5:11b). 원어 성경의 의미대로 이 대목을 읽으면 하나님의 영광(kabod)이 그들을 엄중하게 내리치셨다는 뜻입니다. 영광을 뜻하는 '카보드'는 '무겁다', '권위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힘이 블레셋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음을 성서 기자는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은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반환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속건제물贖愆祭物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새로 만든 수레를 끌게 하고, 그 위에 주님의 궤를 싣고 가게 했습니다. 어미 소는 벧세메스로 천천히 나아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궤는 기럇여아림 사람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

주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스무 해 동안 머물렀는데, 이스라엘 온 족속이 주님을 사모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영적 지도자로 성장한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 여신상들을 없애 버리고,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삼상7:3)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혼합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참 자유의 길로 인도하신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그 지역 사람들이 섬기던 다른 신들도 경배했던 것입니다. 다신론적 상황에서 야훼만을 섬긴다는 게 께름칙하게 여겨졌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불안정할 때 사람들은 뭔가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행과 불행이 신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느꼈습니다. 신들의 비위를 맞추고, 호감을 사는 일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와 안전을 바라는 이들의 마음이 투사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알은 남신이고 아스다롯은 여신입니다. 근동지방에서 출토되는 아스다롯 신상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슴의 강조이고, 다른 하나는 불룩한 배 혹은 넓적한 골반입니다. 풍요와 다산과 관계되는 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44장에는 국난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야훼 하나님만 섬기라는 예레미야의 권고를 비웃으며 하는 말이 나옵니다.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렘44:17b-18)

여기에 나오는 '하늘 여신'이 바로 '아스다롯'입니다. 이 본문은 아스다롯에 대한 숭배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아스다롯은 매혹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자기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 그런 신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성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웃에게 등을 돌린 삶이 지속되며 찾아온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같은 상황이었을 겁니다. 사무엘은 그 우상들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스다롯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스다롯 숭배는 개인의 욕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훼 신앙은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아스다롯은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대단히 엄격한 윤리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대개 타자들, 특히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연관됩니다. 지나친 욕망과 이웃 사랑은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들입니다. 신앙은 '이것도 저것도'(both and)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6:24). 하나님은 당신을 오롯이 섬기는 이들을 지켜주십니다. 아기들과 놀아본 이들은 다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신뢰하는 이들과 함께 지낼 때면 예고도 없이 몸을 막 던집니다. 어른들이 다 잡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막무가내의 신뢰에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나를 그만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만 희망을 둔 이들을 지켜주십니다.

* 미스바 참회

사무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미스바(Mizpah)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 지은 모든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미스바라는 지명은 야곱과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 사이에 맺은 평화협정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밧단아람을 떠나 귀향하던 야곱은 급히 따라온 라반과 만나 그동안의 서운했던 감정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 후에 언약식을 갖습니다. 과거의 서운했던 감정을 풀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언약이었을 것입니다. 양자는 돌을 주워다가 무더기로 쌓고는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고 부르고,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부릅니다. 각각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돌무더기를 다른 이름, 곧 '미스바'라고도 불렀습니다. 미스바는 '망루'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켜보다'라는 뜻의 동사 '차파'에서 유래된 명사인데,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그들 둘 사이를 감시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미스바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참회와 언약 갱신의 장소로 적합한 곳입니다. 백성들은 그곳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것을 제물로 삼아 주님 앞에 쏟아붓고 종일 금식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대군을 이끌고 그리로 올라왔습니다. 지형적으로 블레셋은 해안지대에 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간 산악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 것 같습니다. 참회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뢰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사무엘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건져내 주시기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번제로 바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윽고 전투가 벌어지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블레셋 진영에 큰 두려움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움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블레셋을 무찔렀습니다. 모처럼 경험한 대승이었습니다. 신뢰의 위기가 신뢰의 확증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무엘과 백성들은 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돌비를 하나 세웠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놓고 '우리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셨다!' 하고 말하면서,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었다."(7:12)

에벤에셀(Ebenezer)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이 단어를 사무엘상7장의 맥락에서 기억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셨다"는 말이 자아내는 깊은 울림과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는 사무엘상4:1절과 5:1절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 나오는 에벤에셀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진을 쳤던 곳인 동시에, 법궤를 빼앗긴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는 곳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증거하는 장소로 뒤바뀌고 있습니다. 역전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이런저런 쓰라린 경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차마 남에게 드러낼 수는 없지만 상처 없는 이가 없습니다. 신앙이란 그런 아픔, 상실, 상처, 치욕의 자리를 영광의 자리, 감사의 자리, 회복의 자리로 바꾸는 일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의 개입과 돌보심이 꼭 필요합니다. 어려움이 없었다면, 눈물이 없었다면, '여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셨다'는 고백이 터져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 평화

블레셋 사람들은 결국 무릎을 꿇었고,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한시적인 굴복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 승리의 경험이 너무나 강력했기에 성서 기자는 이런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수중에 넘어갔던 성읍과 성읍에 딸린 지역들을 되찾았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모리 족 사이에도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참회의 결과가 평화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개인적 번영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등질 때 우리가 거두는 것은 불화와 전쟁입니다. 하지만 그 각박한 마음씀에서 돌이킬 때,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이웃들을 소중히 여길 때 찾아오는 것이 화해와 평화입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평화는 모든 생명이 저마다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아름답게 살아낼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평화는 곧 안식의 세계입니다. 평화는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평화라는 단어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평화는 고르다, 평평하다는 뜻의 平과 화하다, 응하다는 뜻의 和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화' 자는 또한 벼 禾 자와 입 口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곧 평화의 시작입니다. 누군가 밥을 독점할 때 평화는 깨집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 혹은 불화가 아니라 독점입니다. 내 배 만 채우는 것 말입니다. 국제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의 힘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져 다른 나라를 무시하고 억압할 때 평화는 사라집니다. 지금 세계는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곳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반도는 진정한 평화 실현의 시험대입니다.

문득 휴전선이야말로 이 나라의 미스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반과 야곱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졌던 곳, 그래서 하나님이 둘 사이를 지켜보시는 곳, 사람들이 자기들의 각박했던 삶을 돌이키면서 참회하기 위해 모였던 곳 말입니다. 분단의 땅이야말로 세계 평화의 비전이 실현될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사명이 아닐까요? 에벤에셀, 그 치욕과 상처의 땅을 영광의 땅, 기쁨의 땅, 감사의 땅으로 바꾸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도전입니다. 아무쪼록 한반도에 일고 있는 모처럼의 훈풍이 삭풍으로 바뀌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소한에서 대한 절기 사이를 지나고 있는 지금, 기온은 차갑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늘의 온기가 가득 차서, 생명을 깨우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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