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기] Day 16. 쉬는 것 자체가 거룩함이다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 프로미스타(Frómista): 6시간 (25.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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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순례하는 방식은 다양한데, 그중 하나가 자신의 애완견과 함께 하는 순례이다. 애완견과 함께 순례 중인 순례자들을 여럿 보았지만, 사진 속 순례자와 애완견에 관한 기억은 특히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영리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영리한 강아지와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애정을 주는 순례자를 보며 ‘좋은 관계’는 사람과 사람 관계 너머에서도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발목이 좋지 않은 현정이와 그의 오랜 벗 지혜는 택시를 타고 다음 마을로 이동할 계획이다. 질량은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보존이 되는 걸까? 오늘은 이 두 친구의 자리를 다른 순례자들이 채우게 됐다. 가끔 길 위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던 한국 순례자 정아, 제영이가 함께 걷게 됐다. 물론 나의 오랜 동행인 세진이도 함께.

아무튼, 오늘 묵었던 마을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언덕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언덕의 덩치가 보통이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의 향연이다. 심호흡 크게 한번 하고 단숨에 넘어볼 생각이다. 출발 전 먹어둔 바나나가 한몫 해 주길 기대해 본다.

힘들다, 아직 언덕의 중턱인데 벌써 힘이 든다. 조금 더 박차를 가해본다. 가빠진 호흡과 흐르는 땀을 가득 안고 정상에 올라선다. 와! 산 위에 올라 정면을 바라보니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평야가 펼쳐진다. 지쳤던 육신도 탁 트인 시야에 기분이 좋았는지 다 썼던 에너지를 다시 채워 넣는다. 조금의 쉼도 없이 드넓은 평야로 다시 발을 내디딘다.

오늘은 걷는 내내 양발의 물집보다 발바닥의 통증이 유별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낭을 멘 어깨까지 말썽이다. 순례를 시작하고 보름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피로가 누적됐나 보다. 더구나 오늘 마을과 마을의 간격은 또 왜 이렇게 넓은 건지. 아니, 왜 이렇게 넓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면 벌써 나타났어야 할 Bar도 보이질 않아 더욱 고되다. 제때 쉬지를 못했더니 이 모양이 됐나 보다.

평소 잘 쉬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왜 그랬을까, 왜 잘 쉬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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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순례자의 길’을 걸은 이유 중 하나는 멋진 사진을 담고 싶어서다. 그런데 막상 걷는 도중에는 힘이 들어 실제 카메라를 꺼낸 횟수는 많지가 않다. 그래도 드넓은 들판에 홀로 걷고 있는 순례자를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모르게 비장해보여 멀리서라도 그 모습을 담게 된다.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하나는 '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방법은 배웠어도 멈춰 서거나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주위 사람들은 알면서도 안 알려준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모두 쉼은 원하지만, 방법을 몰라 그저 관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첫 사회화를 경험하는 가정이나 지식과 인성을 쌓아주는 학교, 진리를 탐구하는 교회 등에서 그러한 가르침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쉼은 불필요한 것이기에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붙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교육을 해야 하는 당사자들인 인생의 선배들도 그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잘 쉬지 못했던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일을 안 하고 있을 때라든지 또는 쉬더라도 의미 없게 여겨지는 쉼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불안해한다. 때론 휴일이나 방학 또는 퇴직 후 자기만의 시간이 늘어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마치 인생 실패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에 오직 나만 불필요한 존재는 아닐까, 라는 어두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불안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참다운 쉼을 모르고 살았다.

여기에 참고하면 좋을 만한 이야기가 있다. 크로산이라는 현대 신학자가 한 말인데, 한번 들어보길 바란다. 그는 현재의 '주일', 성서의 표현으로 '안식일'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의 목적, 이유, 의도는 매주 모두에게 - 집안 식구들, 자녀들, 노예들, 가축들, 이민자들 - 똑같은 휴식을 주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안식이 아니라, 안식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존 도미닉 크로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한국기독교연구소, p.113)

나는 종교인이다. 나는 여러 종교 가운데 유년기 시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삶의 많은 부분을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바라보게 됐다. 물론 기독교 안에 인생의 절대적인 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라는 것 자체가 생이 주는 불안을 포함하고 있기에 진정한 신앙은 명증한 것이라기 보단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필자는 앎을 위해 그 안에서 노력하고 애쓴다는 말이지 이미 엄청난 것을 얻었다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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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알베르게에서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짜파게티를 끓여먹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역시 맛은 ‘고향의 맛’이었다. 좋아진 기분으로 산책도 할 겸 자전거를 빌려 동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하늘’과 ‘길’의 경계를 나누는 구름이 멋있어 한동안 바라보다 셔터를 눌렀다.

자, 다시 '쉼' 이야기로 넘어가 보면, 크로산은 '안식일'은 신을 예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을 비워두는 그런 날이 아니라 '안식' 또는 '쉼' 자체가 신을 예배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기존의 관습적 개념에 가한 발상의 전환이자 본질을 꿰뚫는 발언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말이 현재 모든 종교의 예배를 없애자는 말이 아님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걷다가도 때에 맞게 잘 쉬는 것,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일하다가 때를 알고 멈춰 쉴 줄 아는 것, 욕망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자신의 의지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몸뚱이를 깨닫고 뜬금없이 질문을 던져 멈춰 서는 것. 곁에 어디 이런 사람 하나 없을까? 산티아고 순례를 하며 이런 사람 하나를 만나 즐거이 벗 삼고 싶고 무엇보다 내가 먼저 이런 사람이 되어 누군가의 벗이 되어주고 싶다.

삶의 진리는 단순함 속에 있다. '거룩'은 특별한 게 아니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자이다. 나는 내 마음의 중심, '콤포스텔라'로 향하고 있다.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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