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기] Day 27. 길들여진다는 것의 기쁨과 슬픔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폰페라다(Ponferrada)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7시간 (22.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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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폰페라다(Ponferrada)에 있는 ‘템플기사단의 성’이다. 이 성은 중세 십자군 전쟁 때, 순례자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서방에 속한 교회의 기사 수도회로 붉은색 십자가로 표시된 흰색 겉옷이 상징적이다. 성 방문 시, 순례자들은 입장을 할인해 준다고 하니 한 번쯤 들러보는 것도 좋은 일이겠다.

친해지고 싶었다. 상대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어서 빨리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가까워진다는 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 일이던가. 모든 관계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거늘. 그런 시간의 바구니 안에는 오해와 상처, 갈등과 같이 유쾌하지 않은 선물도 담겨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늘 새로운 관계에는 불편한 요소들이 없기를 바란다. 이것이 욕심의 마음임을 알면서도 자주, 또 빈번히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있다. 고심 끝에 그 친구와 함께 이 길고 험한 순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하루 이틀 보고 말 사이가 아니기에 어서 빨리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 내 통제의 범위 안에서 그를 길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정말 그렇게 된 줄 알았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까미노 위에서 그 친구와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준 그를 보며 그 또한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한낱 우스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길들임'은 그저 나 혼자만의 착각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머물러 주던 그 친구는 결국 자신만의 시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놈의 상처. 사람에게 상처는 양날의 검과 같다. 사람이기에 상처를 피하고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사람이기에 다시 상처에서 회복될 가능성도 있는 법이다. 라디오 작가 정현주씨는 그녀의 책 <그래도, 사랑>에 이런 내용의 대화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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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순례를 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림 같은 풍경과 마주친다. 이 사진, 정말 그림 같지 않은가. 매끈하게 잘 빠진 밀밭과 저 멀리 보이는 아이스크림 같은 나무들과 이스터 섬 모아이(Moai) 같은 석상들. 사진을 보고만 있어도 다시 가슴이 뛴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없지만 살아 있는 것들은 달라. 상처가 났던 자리가 다시 붙으면 거기는 더 단단해지잖아.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우리를 믿어." (정현주, <그래도, 사랑>, 스윙밴드, p.136)

무생물도 사람만큼 깨지기 쉬우나 사람과의 차이라고 한다면, 무생물은 상처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봉합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하여 이전의 용도에 걸맞게 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도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받게 되면 삶이 미로에 빠져 버리게 된다. 혹은 엄청난 두려움과 불안에 빠져 이전의 삶을 기억조차 하기 힘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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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하루의 순례를 마치고 동네를 산책해 본다. 지도에 나오진 않았지만 끌리듯 들어가게 된 식당에서 조촐한 메뉴 하나를 시키고 하염없이 앉아 있다. 약간의 먹을 것과 따스한 햇살, 지금 이곳으로 향해 오고 있는 순례자 친구가 있으니 이보다 더 바랄게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사람에게는 늘 어떠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은 상처 받은 이 앞에 서서 늘 그가 다시 회복되기만을 기다린다. 사람도 상처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상처 이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곳으로 나아가느냐 마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안에서 늘 나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는 내면 교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정말 중요한 기로가 될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이었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것 하나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제는 마음을 열어 나와 발을 맞춰주고 있는 그가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니, 그는 나의 소중한 벗, 내 소중한 동행 '등산화'이다.

순례를 시작한 지 4주 가까이 된 지금,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를 많이 의존하며 서로에게 많이 길들여져 있음을 느낀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작은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길들여진다면 조금은 울게 될지 모른다."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소담출판사, p.134)

그래, 등산화야. 이제 더 이상 아픔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지 말고, 깊이 정듦으로 눈물 흘렸으면 좋겠구나. 남은 시간도 잘 부탁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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