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내게 와서 쉬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출애굽기 20:8-11, 히브리서 12:1-2, 마태복음 11:28-30 -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미국에서는 '주일'(主日)을 부르는 명칭이 지난 백 년 동안 네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백 년 전에는 "Holy Sabbath," 즉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불리다가, 약 60년 전에는 그저 "Sabbath," 즉 '안식일'로 불렸고, 약 30년 전에는 "Sunday," 즉 '일요일'로 불리더니 지금은 "Weekend," 즉 '주말'로 보통 불립니다. 주일에 대한 이 언어의 변천사는 미국이라는 한 나라가 지난 백 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주일, 즉 '주의 날'(the Lord's Day)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은 '안식일 후 첫날'(행 20:7)이었다고 성서가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초대교회부터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난 이 '안식일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주일은 오늘날 유대교인들이나 안식교인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날짜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기원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버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한 성장과 경쟁에 지친 오늘의 '피로사회'에서 이 계명의 뜻과 의미를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실 안식일을 잃어버린 주일은 피곤에 지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우리는 많은 한국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거나 찬양대에 서기 위해 아침 일찍 교회로 향합니다. 예배 후에는 여전도회나 남선교회 모임에 가야 합니다. 급식 봉사나 예배 안내를 하고, 각종 회의나 소모임에 참석해야 하며, 주일 오후나 저녁에 또 한 번의 예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일요일에 '안식'을 하는 게 아니라 '교회 스타일의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에게는 일주일 중 단 하루도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 없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임금노동자의 노동을 합니다. 토요일이나 공휴일에는 가족 안에서의 노동을 합니다. 그러다 일요일에는 교인으로서의 노동을 하고, 월요일이 되면 다시 임금노동자의 노동을 시작합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자신이 주일에 '노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일'을 통해 영적 재충전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기쁨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의 영혼은 소진(burn out)되고 있습니다. 주일은 있으나 안식일은 잃어버린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많은 일을 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이루고, 무언가를 소유하려고 일하고 있습니다. 시장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사용하고, 더 많이 먹고 마시라 요구합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고 도무지 그칠 줄 모릅니다. 이 극심한 경쟁 시스템은 모든 사람을 녹초로 만듭니다. 그런데도 늘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모든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일은 도무지 만족을 모르고 무한한 벽돌의 생산을 강요하던 파라오의 명령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성서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요셉 이후 이집트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자, 이집트의 새 왕이 이를 두려워하며 다음과 같이 명령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라]"(출애굽기 1:11). '국고(國庫) 성'이란 글자 그대로 나라의 창고 도시, 즉 끊임없이 생산되는 막대한 부를 쌓아둘 수 있는 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설을 지으려면 엄청난 벽돌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파라오는 지독하게 일을 몰아붙입니다. 그는 정말이지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자였습니다. "너희는 백성에게 더 이상 이전과 같이 벽돌을 만들 짚을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모으게 하라. 그러나 너희는 백성에게 그들이 이전에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수량만큼 벽돌을 요구하라. 그들이 게으르니, 그 숫자를 줄이지 말라"(출 5:7-8). 스스로 짚을 모으게 하라는 명령은 쉬는 시간에도 쉬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가 또 말합니다.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래서 너희가 '가서 야훼께 제사를 드리자'고 말하는도다. 너희에게 짚을 전혀 주지 않겠지만 벽돌은 여전히 똑같은 수를 바치게 하리니, 당장 가서 일하라"(출 5:17-19). 파라오의 머릿속에는 아예 '쉼'(쉬게 해줌)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파라오가 밤낮으로 일을 쉬지 않으니 노예들은 감히 쉴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쉬어야 하는 시간에도 스스로 짚을 모아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희망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피로사회' 속으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 뚫고 들어오십니다(출 3:1-6). 그 하나님은 절망뿐인 히브리 노예들의 노역을 굽어 살피시고(출 2:23-25), 백성들을 거기서 해방시키기로 결심하신 다음(출 3:7-9), 모세를 부르시고(출 3:10), 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Let my people go!, 출 5:1) 쉼이 없는 이 압박의 세상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새 땅으로 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출애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의 대전제가 출애굽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모세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신 5:6). 파라오의 학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계명을 주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다른 자들은 다른 신들을 섬겨도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잡신들과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명입니다. 그리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처럼 여기고 섬기는 황금이나 가치를 가리키는데 이집트의 잡신들이 추구하던 것들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계명입니다. 그리고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름에는 인격과 존재와 품성이 드러납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런 인격과 존재와 품성을 모독하거나 무시하거나 남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이상 출 20:2-7).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네 번째의 계명이 바로 안식일에 대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이야기하는 이 네 번째 계명은 십계명 전체를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앞의 세 계명과 이웃과 관련된 뒤의 여섯 계명을 연결하는 핵심고리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 10). 일하지 말라 아니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자기의 모든 일을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식솔, 심지어 손님도 일을 그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안식일을 이렇게 엄격히 지켜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20장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을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본문이 전하는 안식일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신명기 5장(6-21절)에 다시 나옵니다. 여기서도 십계명의 대전제는 출애굽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신 5:6). 하지만 여기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데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 주셨다는 데에서 찾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출애굽기 20장이 '창조를 기억하라!'였다면 신명기 5장은 '출애굽을 기억하라!'입니다. 무한한 벽돌의 생산을 강요하던 파라오의 폭정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신명기는 끊임없이 출애굽의 기억을 강조합니다. "네가 이집트에서 종이었을 때에 네 하나님 야훼가 너를 거기서 구해내셨음을 기억하라"(신 24:18)는 말을 반복해서 합니다.

이처럼 십계명을 전하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두 본문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가 그날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는 쉼의 날이며(출 20:11),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집트의 강제 노역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날(신 5:15)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우선 쉬는 날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쉼'(rest)으로 번역되는 '메누하'(menuha)는 단지 육체적인 쉼만이 아니라 전 존재의 쉼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 전 존재의 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유명한 말이 이 쉼의 의미를 가장 잘 말해줍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없나이다." 그런데 안식일은 가장 우선적으로 '그치는'(to cease) 날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의 어원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안식일(Sabbath)은 '쉬다'는 의미의 동사 '샤바트'(shabbat)에서 나왔는데, 이 동사의 본래의 뜻은 '그치다' 혹은 '중지하다' 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그치고' '멈추고' '중지하는' 날입니다. 창세기 2장 2절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그치셨다'(creased)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손을 떼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침'이야말로 안식일의 원래의 뜻입니다. '손을 떼는' 것입니다. 그치고 손을 떼서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는 날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 그 자체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어린아이처럼 놀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 줍니다. 안식일은 일뿐만 아니라 걱정과 근심을 그치는 날이기도 합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유대인들은 비록 낯선 땅에 이방인으로 있었지만, 안식일은 그들에게 고향과 하나님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이라는 그 어려운 시기에도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희망과 용기를 이어나갔습니다.

히브리 성서가 말하는 안식일을 이해하는 데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책은 유대교의 대학자인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의 책 『안식일』(The Sabbath)일 것입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이해에 깊은 통찰을 갖게 합니다. 여러 종교들에서 신은 대개 공간에 거주합니다. 즉 산이나 숲이나 나무나 돌과 같은 특정한 장소에 국한해 거합니다. 그래서 보통 종교에서 던지는 질문은 '신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하지만 헤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교는 시간의 성화(聖化)를 목적으로 하는 시간의 종교입니다.... 유대교는 우리에게 시간의 거룩에 깊은 관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어 가운데 하나는 카도쉬(quadosh), 즉 거룩입니다. [그런데] 세계사에서 최초로 거룩의 대상이 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산이었습니까? 제단이었습니까? 카도쉬라는 특별한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창세기에서 창조 기사 마지막에, 바로 시간에 대해서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단어가 시간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 실로 하나님의 창조 기사에는 어떤 특정한 공간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보통 종교들은 거룩한 산이나 거룩한 샘을 강조하지만 창조의 하나님은 '시간 속의 거룩,' 즉 안식일을 제정하십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카도쉬,' 즉 거룩하다는 선언을 가장 먼저 안식일에 적용하십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시간의 성화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의 거룩을 지키려 애썼기에 2천 년 동안 나라 없이도, 영토 없이도, 전 세계에 흩어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유대인이 안식일을 보존했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유대인을 보존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유대인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고 주기적으로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역사의 그 침울한 경험들 때문에 절망하여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그침입니다. 멈춤입니다. 내려놓음입니다. 이 그침과 멈춤과 내려놓음이 우리를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출애굽의 은총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세계는 불안이 가득하고 평화가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불안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일 중독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잡신(雜神)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이 신들의 공통점은 빼앗아가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만족을 모르고 끝없는 생산을 요구하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파라오와 같이 생산 일정을 들이밀고 닦달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은 멈추십니다. 고요히, 평화롭게 쉬십니다. 안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토요일이어야 하는지 일요일이어야 하는지 논쟁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날(시간)을 안식일로 구별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즉 '엿새 일하고 하루 그치기'라는 그분의 리듬을 우리 몸에 배게 하는 일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히브리어에는 평일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예 따로 없다는 점입니다. 평일은 다만 안식일과의 관계에서 불릴 뿐입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은 '안식 후 첫 날'입니다. 월요일은 '안식 후 둘째 날'이 되겠지요. 그렇게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한 주의 정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앞 사흘을 안식일을 준비하면서 보내고, 안식일 후 사흘은 안식일을 기억하면서 보냅니다. 이것은 일종의 '거룩의 리듬'입니다. 사흘 동안 안식일을 '고대'(anticipation)하고, 안식일에는 그날을 '경축'(celebration)하고, 이후에는 사흘 동안 안식일을 '회상'(reflection)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이런 거룩한 리듬이 생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에서 안식일은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창조의 완성이고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단지 엿새 동안의 힘든 노동으로 잃어버린 힘을 회복하여 다가오는 노동을 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안식일이 평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일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헤셸의 말대로, "한 주 내내 안식일을 동경하는 것이야말로 한평생 영원한 안식을 동경하는 하나의 형식"인 것입니다. 이런 안식일을 우리는 '경축'(to celebrate)해야 합니다. 성서는 안식일을 '지키라'(to keep)고 번역하지만 그 본뜻은 '경축하라'입니다. 경축하는 것은 감동하는 것입니다. 경축하는 것은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를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으로서, 그리고 출애굽의 은총으로서 안식일을 경축해야 합니다.

이런 안식일 안에는 평등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나의 그침과 쉼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그침과 쉼을 뺏아서는 안 되는 결론에 이릅니다. 출애굽기의 안식일 본문은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족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고 말하는데, 신명기의 안식일 본문은 이를 더욱 정교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like you) 안식하게 할지니라"(신 5:14). 모두가 '나와 같이'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그침과 쉼은 노동하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피로사회에서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시고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을 존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예배드리고 가르치면서 안식일을 보내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강요와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경축하는 안식일을 거꾸로 정죄와 자기 의로움의 수단으로 만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 시대에 '멍에'는 종종 제국이 매기는 세금을 가리켰습니다. 또한 '멍에'는 율법에 대한 무한 충성을 요구하는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멍에를 벗게 해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쉬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원하면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로 와서'입니다.

교우 여러분, "일한 자에게 반드시 휴식이 주어져야 하며 소모된 노동력을 회복할 수 있는 적절한 휴가와 안식이 주어져야 한다"(레 25:3-7)고 성서는 말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 생산과 경쟁과 탐욕의 사회 속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리듬을 내 삶에 만드는 것은 일종의 신앙의 저항이요 대안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칠 줄 모르는 생산을 강요하는 이집트의 잡신이 아니라 이 시스템에서 낙오된 자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고 그들을 건져 주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새 세계로 인도하시는 출애굽의 하나님입니다. 출애굽은 이미 끝난 과거의 기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출애굽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파라오의 시스템을 떠나야 합니다. 무한한 벽돌의 생산을 강요하는, 쉬어야 할 시간에도 스스로 짚을 찾아 헤매게 하는 이 시스템의 노예로 더 이상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식일에는 그치십시오. 그치고, 멈추고, 내려놓음으로 대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진정한 자유는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쳐놓은 욕심의 울타리를 허물고 생각의 울타리를 넓혀야 합니다. 깊은 수도원에 한 성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젊고 똑똑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제자가 간절하게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스승은 숲속에 들어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를 끌어안고 갑자기 살려 달라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는 나무에 매달린 스승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가만히 보니 나무가 스승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나무를 잡고 놓지 않고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물질과 명예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것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기가 원했던 것이 사실은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내가 온전히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이 세상의 모든 강제 노역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에 참여하십시오. 안식일을 잃어버린 주일을 사시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과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는 거룩한 시간을 사시기 바랍니다. (2019.10.13.)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