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또 다른 평화의 노래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9:2-7, 골로새서 1:15-20, 요한복음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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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194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5년 전 크리스마스 때의 일입니다. 벨기에 국경 부근 독일의 한 숲속 작은 오두막집에 열두 살 난 프리츠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포격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프리츠는 민방위로 근무하는 아버지가 돌아오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오두막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철모를 쓴 병사 둘이 유령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부상을 당한 병사 하나가 눈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프리츠는 즉시 그들이 적군인 미군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은 주인의 허락 없이도 강제로 집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그냥 문 앞에 서서 잠시 쉬어가게 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부대에서 낙오한 그들은 독일군을 피해 사흘이나 숲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니는 '들어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부상자를 들어다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두 사람의 발가락이 언 것 같구나. 구두를 벗겨 줘라. 그리고 밖에 나가 눈을 한 양동이만 퍼다 다오.' 프리츠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눈을 퍼와 퍼렇게 언 그들의 언 발을 눈으로 비벼 주었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는 크리스마스이브 때 쓰려고 아껴 두었던 닭 한 마리와 감자를 가져와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고소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때 또다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또 미군들이겠지' 하며 프리츠는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네 명의 독일군 병사가 서 있었습니다. 프리츠의 몸은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적군을 숨겨 주는 것은 최고의 반역죄로 즉결 총살감인 것을 어린 나이지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Frohliche Weihnachten(기쁜 성탄)!'이라고 어머니가 인사를 하자 병사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만 쉬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물론이지요... 따뜻한 음식도 있으니 어서 들어오세요.' 병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에 이미 다른 손님들이 와 있어요... 당신들의 친구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독일군들은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고, 숨어서 문밖을 살피던 미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다시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나는 내 집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어요... 당신들은 모두 내 아들과 같습니다... 오늘 밤만은 서로 죽이는 일을 잊어버리면 안 될까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매우 긴 침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총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명랑한 목소리였습니다. '뭣들 해요? ... 우리 빨리 맛있는 저녁을 먹읍시다. 총은 모두 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으세요.' 그러자 젊은 독일군과 미군은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고분고분 그 말을 따랐습니다. 갑자기 손님이 늘어난 관계로 어머니는 프리츠에게 감자를 더 가져오라 했습니다. 감자를 가득 안고 돌아와 보니 독일군 병사 하나가 부상당한 미군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간의 적개심이 서서히 가시면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자세히 보니 미군과 독일군 모두 어린 병사들이었습니다. 열여섯 살이 둘이 있었고, 가장 나이가 많다는 병사는 스물세 살밖에 안 됐습니다. 한 병사가 배낭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내자, 다른 병사는 호밀 빵 한 덩어리를 꺼내 놓았습니다. 어머니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오늘 이 집에 오셔서 저희의 손님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할 때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집에서 멀리 떠나온 어린 병사들도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습니다.

자정 직전, 어머니는 문밖으로 함께 나가 베들레헴의 별을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모두 어머니 곁에 서서 하늘을 올려보았습니다.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찾는 동안 그들에게 전쟁은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모두 평화를 누렸습니다. 다음날, 성탄절 아침, 독일군과 미군은 오두막집 앞에서 서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독일군 병사는 미군에게 부대로 돌아가는 길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헤어져 반대편으로 걸어갔습니다.

2차 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1944년 크리스마스 날, 당시 열두 살이던 독일인 프리츠 빈켄(Fritz Vinken)이 직접 겪은 실화입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Reader's Digest 잡지에 소개되었습니다.

성탄은 평화입니다. 성서는 하나같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여기서부터 새번역]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이사야 9:2-7)라고 말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미가 4:1-4, 새번역)라고 약속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평화의 왕이 오실 것을 선포합니다.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다... [그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스가랴 9:9-10, 새번역).

그렇습니다. 성탄의 평화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탄생하시는 메시아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분입니다(골로새서 1:20). 그분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태 5:9)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평화"라고 증언합니다(에베소서 2:14).

2019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한반도에는 다시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69년 전 그 처절한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또한 2019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한국 사회는 '곁은 없고 편만 남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가 되면서 경쟁이 극심해지고 혐오와 적대의 언어는 늘고, 공감과 소통의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곁에서 함께 웃어주고 울어줄 사람, 곁에서 함께 걸어주고 보듬어 줄 사람이 없는 사회, 즉 '곁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신 '니편 내편,' 편만 남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을 향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탄식이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향한 것처럼 들립니다.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예레미야 9:8).

바로 이런 세상에 우리의 임마누엘 하나님이 오십니다. "평화는 없고, 폭력뿐"(예레미야 30:5)인 이 세상에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오셔서 버림받은 사람들, 마음에 아픔을 가진 사람들, 생계를 걱정하며 한숨짓는 사람들, 내일을 꿈꾸기 어려워하는 젊은이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여전히 사과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들, 그리고 전쟁과 폭력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 곁으로 오십니다. 오셔서 그들의 평화가 되어 주십니다. 성탄은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 곁에 와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영광을 보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가 된 사건입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세계를 제패하고 나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선포했습니다. 모두가 앞 다투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합창했습니다. 그것은 장엄하고 화려한 승리의 팡파르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그 시절 베들레헴 들판에서는 '또 다른 평화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노래는 존엄한 황제가 아니라 구유에 누운 갓난아기에게 헌정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평화의 노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곳에 태어난 한 아기에게 바치는 노래라니요. 하지만 그것이 맨 첫 번째 성탄절에 울려 퍼진 평화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폭력과 억압으로 이루어진 아우구스투스의 거짓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선포하는 노래였습니다. 하늘의 찬양대가 먼저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 2:14).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앞에서 이 평화를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성탄은 평화입니다. 우리를 흑암에서 건지시는 메시아가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억울하고 부당하게 흘리는 눈물도, 곡하는 것도,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것도, 죽음도 없는, 대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며, 기쁨을 주는 참된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주님의 평화' 즉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입니다. 주님은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4:27). 사도 바울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3:15)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우리 이 평화를 노래합시다. 이 평화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이 평화를 기도합시다. 프리츠의 어머니처럼, 서로 싸우는 적군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집에 손님으로 찾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 이 평화를 성탄의 선물로 주고받읍시다. '곁'은 없고 '편'만 남은 한국 사회에, 그리고 전쟁의 어두운 징조가 다시 몰려오는 한반도에 그리스도가 주시는 이 평화를 선물합시다.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흑암에서 고통 받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나누는 최고의 선물이 되게 합시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노래하고, 기도하고, 선물하는 사람들이 모두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성탄의 평화를 선물하는 여러분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축복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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