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1): 김승진 목사(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철학박사)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I. 프롤로그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성령뱁티즘(성령침례 혹은 성령세례)과 방언이라는 주제가 학자들과 목회자들과 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거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개념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뱁티즘을 받은 시초적인 증거(initial evidence)가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은사 체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성령뱁티즘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매우 중요한 요소를 결핍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또한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을 받는다," "성령체험을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성령뱁티즘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등의 용어들에 대해 확실한 개념규정을 하지 않고 그 차이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서로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우(愚)를 범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방언(方言)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오늘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했던 "방언기도"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중얼하는, 뜻 없는 소리"(gibberish, babble, mutter, mumbo-jumbo)로서의 방언기도를 성서적인 방언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그러한 방언기도를 "하늘의 언어," "천국의 말," "천국 시민권자들의 언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러한 방언을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필자에게도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20대 중반기에 통성으로 기도하는 중에 소위 말하는 방언을 체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방언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체험한 방언이 진정 성경이 말하는 참 방언일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성경을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초신학 수업을 받고, 또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 남침례교총회(SBC, Southern Baptist Convention)에 속한 두 침례신학원들(SEBTS, SWBTS)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성령뱁티즘과 방언에 관해서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로서는 다양한 교단적인 배경을 가진 저자들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또한 미국 유학 중에는 담임목사로서 한인침례교회들을 섬기면서, 목회현장에서 성도들에게 부딪히는 성령뱁티즘과 방언과 관련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접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필자는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 요즈음 교회들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기도로서의 방언"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고 방언기도를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일종의 신앙체험입니다. 각자가 겪는 체험은 당사자에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겪은 체험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게 되는 육체적인 체험들은 계시(revelation)인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objective Word of God), 즉 성경에 입각하여 검증(檢證)되어야 합니다. 방언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고, 각자의 방언체험도 그러한 성경적인 기준에 따라 검토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명백하게 성경적이지 않다면 자신의 체험을 뒤로 하고 성경말씀에 자신의 믿음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著者, author)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기자(記者, writers)들이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활동하심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written Word of God)인 성경에 부합해야 합니다. 마치 육중한 기차가 철도라는 궤도 위에 올려져 있어야만 빠른 속도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듯이, 성령의 활동도 성령 하나님께서 저자이신 성경의 궤도 위에 올려져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 마력(馬力)을 가진 기차라고 할지라도 기차가 궤도를 탈선하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도 말씀의 궤도 위에 있을 때에만 올바르게 그리고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궤도를 이탈한 체험은 성경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방언신학이나 방언실천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주관적인 체험보다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권위로 여겼던 베뢰아 사람들의 건강한 신앙의 태도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행 17:11-12)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래서 필자는 성령뱁티즘과 방언에 관하여 성경, 특히 신약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 보았습니다. 제가 사용했던 희랍어원어성경은 제가 평소에 가끔 참조하는 것인데,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에서 편집하여 출간한 성경입니다.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가 편집하여 출판한 The Greek New Testament (Muenster, West Germany: United Bible Societies, 1975)입니다. 희랍어성경의 원문은 소수의 독자들만이 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그것을 음역(音譯)해서 영어알파벳으로 표기를 하였습니다. 장음(長音)과 단음(短音)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고 희랍어단어를 영어단어로 옮기는데 일정한 제약과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영어성경은 많은 번역본들이 있지만 두 가지 영어성경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인용하였습니다. 킹제임스버전(KJV, King James Version)과 새국제버전(NIV, New International Version)입니다. KJV은 1611년에 처음으로 출판이 되었기 때문에 고어체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미권에서 가장 많이 출간되었던 성경이며, 20세기에 들어와 여러 종류의 번역본들이 출간되기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사랑을 받아 왔던 성경입니다. 그렇지만 필자는 KJV 영어성경만이 유일하게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NIV는 1978년에 국제성서공회(International Bible Society)에서 처음으로 번역·출간되었고 1984년과 2011년에 수정되고 보완되었습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이 읽기 편하게 번역되어 있는 영어성경입니다. 한글성경은 <개역 성경>과 <개역개정 성경>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간혹 한글성경을 참고하기도 했습니다.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이처럼 다양한 성경들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희랍어원어성경에서 묘사된 성령뱁티즘과 방언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깊이 있게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Youtube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여러 목회자들과 교수들의 방언과 관련한 동영상들을 시청하기도 하였고, 인터넷의 온라인자료들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후서에 관한 주석들도 참고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희랍어-영어 사전들과 주석서들을 빌려주고 희랍어 용어들과 문법과 문장구조 등에 대해서 조언을 아끼지 않은 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동료 교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II. 오순절운동의 태동과 발전

뱁티즘(침례 혹은 세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물뱁티즘(Water Baptism)과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뱁티즘(희랍어 원어 명사 "밥티스마" Baptisma, 동사 "밥티조" Baptizo, 혹은 "바프토" bapto)이라는 말이 "세례"(洗禮)로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뱁티즘의 원래 성경적 의미가 충분히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어성경에서는 "밥테스마" 혹은 "밥테스마를 주다"로 번역되어 있어서 영어성경들처럼 뱁티즘 형식들을 총괄하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뱁티즘의 성서적인 의미는 "씻는 예식"(세례, 洗禮, washing)이 아니라, "물 속에 잠그는 예식"(침례, 浸禮, immersion)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자신의 죄악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crucifixion), 과거의 더러운 성품과 삶을 물 속에 장사지내고(burial),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동참하여 그 분을 새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산다(resurrection)고 하는 신앙고백이 성서가 말하는 뱁티즘의 진정한 의미입니(롬 6:3-5, 골 2:12). 기독교는 "씻고 말려주는"(wash and dry) 종교가 아니라 "죽고 다시 사는"(die and live again) 종교입니다.

목회자가 손에 물을 찍어 뱁티즘 받는 자의 정수리나 이마에 물을 적셔주거나(세례, washing), 그의 머리 위에 물을 뿌려주거나(살수례, sprinkling), 물을 부어주는(관수례, affusion, pouring) 방식의 뱁티즘을 약례(略禮)라고 합니다. 약식화(略式化)한 의식이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신약성경이 말하는 정식(正式)의 뱁티즘은 침수례 혹은 침례(immersion)입니다. 뱁티즘 받는 자의 전신을 물 속에 잠그거나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2세기 중반의 문헌인 "사도들의 교훈집"(The Teaching of the Apostles), 일명 "디다케"(Didache)에는 특별한 경우에는 약례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873년에 브리에니오스 필로세우스(Bryennios Philotheus)라는 학자가 콘스탄티노플의 어느 도서관에서 이 문헌을 발굴했는데 1883년에 공식적으로 출판을 했습니다. "디다케"에는 기원후(AD) 95-150년경, 2세기 중반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모습이 어떠했을까를 짐작케 하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Henry Bettenson, ed. & trans., "The Teaching of the Apostles" (The Didache), The Early Christian Fathers: A Selection from the Writings of the Fathers from St. Clement of Rome to St. Athanasius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50-2.]. 많은 내용들 가운데 뱁티즘과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뱁티즘을 베풀어라. 먼저 흐르는 물(running water)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뱁티즘을 주노라"라는 말을 한 후에 뱁티즘을 베풀어라. 만약에 흐르는 물이 없을 때에는 다른 물(other water)에서 뱁티즘을 주어라. 만약 너희가 찬 물(cold water)에서 뱁티즘을 베풀 수 없다면 따뜻한 물(warm water)을 사용해라. 만약 너희에게 이 두 가지 물(찬물과 따뜻한 물)이 없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머리 위에 세 번 부으라(If you have neither, pour water on the head thrice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Holy Spirit."). 뱁티즘을 행하기 전에는 뱁티즘을 베푸는 자(the baptizer)와 받는 자(the baptized)는 금식(fast)을 하여야 한다.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도 금식을 하여야 한다. 너희는 뱁티즘을 받는 자들에게 하루 혹은 이틀 동안 금식을 하도록 주문해야(order) 한다[Ibid. 51.].

"디다케"에서 2세기 중반경에 "물을 머리 위에 세 번 부어주는" 물뱁티즘의 약례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디다케" 그 자체는 성경이 아닙니다. 물뱁티즘의 성경적인 방식은 침수례(immersion)입니다. 그런데 뱁티즘의 형식에 약례들이 도입되면서 그것의 성서적인 원래의 개념에 오해 혹은 변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뱁티즘 그 자체는 죄를 씻어주거나 죄를 사해 주는 의식이 아닙니다.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살게 된 새 신자(a new believer)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identification)되었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의식이 바로 성서적인 물뱁티즘(Biblical Water Baptism)인 것입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세례(Washing) 혹은 살수례(Sprinkling) 혹은 관수례(Affusion) 혹은 침수례(Immersion) 등 뱁티즘의 여러 방식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단어인 "뱁티즘"이라는 영어단어를 한글로 쓰기로 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물로 베푸는 뱁티즘(Water Baptism, 물뱁티즘)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베푸는 뱁티즘(Spirit Baptism, 성령뱁티즘)에 관한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성령뱁티즘도 성령세례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씻음받는다"는 그릇된 선입관을 갖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뱁티즘의 원래 의미는 물 속에 잠기는 침수례이기 때문에, 성령뱁티즘은 "성령으로 혹은 성령의 강물 속으로 풍덩 빠뜨려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성령뱁티즘"이라는 말이 명사형으로 사용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필자 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but he sha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KJV), 혹은 "(너희가-필자 주)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행 1:5, "but ye shall be baptized with the Holy Ghost"-KJV) 혹은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For by one Spirit are we all baptized into one body"-KJV)라고 동사형으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 그리고 "성령뱁티즘"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노라"고 하며 자신의 방언체험에 대해 의기양양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자신은 "이등급의 크리스천"(The Second Class Christian)인 것처럼 생각하며 스스로 신앙적인 열등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진정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글에서는 성령뱁티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혼란을 가져오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검토해 보고,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이 사용된 성경본문들(복음서들, 사도행전, 고린도전서)을 하나씩 검토해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Being Baptized with/by/in the Holy Spirit")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증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뱁티즘을 받지 못했거나 받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주장이 성경적인 것일까요? 요즈음 인터넷 유튜브(www.youtube.com)에 들어가서 "방언" 혹은 "방언기도"를 입력하면 수많은 목회자들이 방언이나 방언기도에 관해 설교하거나 강의한 내용을 시청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가 방언 혹은 방언기도의 유익성(有益性)에 대해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오순절 계통과 은사주의 계통의 목사들이나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여타 교단의 목사들과 기도원 원장들 중의 대다수가, 신앙생활에서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성령침례 혹은 성령세례)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하며, 방언은사가 주는 개인적인 유익성에 대해서 그리고 방언의 은사를 받는 비결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설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러한 "알아들을 수 없는"(unintelligible) 방언과 방언기도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만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김승진 명예교수(침신대/철학박사)가 보내온 연재글 '성경이 말하는 방언'입니다. 이 글에서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성도들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현실 속에서 성서를 근거로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방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29차례에 걸쳐 연재글을 게재합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