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까닭 없는 하나님 경외(블레이크 1)

심광섭 전 감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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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심광섭 페이스북 갈무리)
▲윌리엄 블레이크, “Thus did Job continually”(Plate 1), 1823-26

왜 욥기인가? 나는 성경에서 욥기를 가장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책 중 하나로 여긴다. 욥기는 가장 절박하고 가장 절실한 우리네 삶의 관심사를 가지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관심사란 욥이 얻은 의로움과 누리는 부와 행복, 인간의 지극한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초월성, 악의 문제, 인과응보 그리고 우정, 산문과 시의 형식으로 지은 운문의 문체, 대화 형식으로 된 욥기의 문학적 형식에 이르기까지이다.

욥에 관한 블레이크의 첫 그림은 욥기 1장 5절을 선택한 그림이다. 욥은 잔치가 끝나고 난 뒤에는 늘 그렇게 하였다. "Thus did Job continually." 그림에서 가장 욥과 아내 그리고 그의 무릎 꿇은 10명의 자녀(딸 3, 아들 7)들이 거대한 상수리나무 아래에 모여 있다. 상수리 나무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나무 가지에는 악기들이 걸려 있다. 욥의 가정은 저 멀리까지 먹이를 먹거나 쉬고 있는 가축들로 에워싸여 있고 저 멀리 서쪽으로 지는 해와 초승달과 저녁별이 풍경을 영화롭게 한다. 해가 거의 땅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Thus did Job continually. 한결같이 여일하게 뜨고 지는 해와 달처럼 욥은 "으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자식의 수대로 일일이 번제를 드렸다." 욥은 모든 일에 늘 이렇게 신실하였다. 욥의 신실함 덕분에 하느님은 사탄과의 내기 게임에서 승리한다.

그림 밑에는 3중의 산 모양을 지닌 제단이 단순한 형태로 스케치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 "The letter killeth, the spirit giveth life. It is spiritually discerned,"라고 적혀 있다. 영이 생명을 준다. 생명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수여 받는다. 생명은 영적으로 분별되어야 한다. 욥이 기도와 번제를 드리면서 부유하게 살았던 시절에도 늘 마음에 지니고 있었던 그의 충실한 진심(盡心)의 태도를 적시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선취한 느낌이다.

그림이 모토로 택한 5절 말씀은 1절과 8절에서 반복되는 욥의 전체 인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욥기는 욥에 대해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perfect and upright, and one that feared God, and eschewed evil)고 소개한다. 욥은 한마디로 완전무결한 사람이었다. 그의 완전함은 안으로 정직하고 진실하며 위로 하나님을 경외 하며 옆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악한 말과 행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욥의 완전무결성에 대해 사탄이 하느님께 도전장을 제출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Does Job fear God for nothing? Meinst du, daß Hiob umsonst Gott fürchtet?"(욥 1:9) "까닭 없이"란 말은 사심 없이, 사욕편정(私慾偏情) 없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하느님을 믿겠느냐는 것이다. 사탄은 욥의 신심과 정의가 결코 사심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편견)에 변함이 없다. 욥의 전체 인품과 신앙은 "까닭 없는 하느님 경외"에 모아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까닭 없이"(for nothing, umsonst)라는 말에 감각이 꽂힌 이유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적 글을 읽다가 라이프니츠(Leibniz)의 "이유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nothing is without why)는 주장에 대해 시인 앙겔루스 실레지우스(Angelus Silesius) 의 다음 시를 인용해 반박한 시어에 필이 꽂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Without Why
The rose is without why; it blooms because it blooms;
It cares not for itself; asks not if it's seen.

Ohne Warum
Die Ros' ist ohn' warum, sie blühet weil sie blühet,
Sie acht't nicht ihrer selbst, fragt nicht, ob man sie siehet.

까닭 없이
장미는 까닭 없이 핀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는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장미는 사람이 자기를 보는지 묻지 않는다.

모든 존재에는 이유(근거, Grund, ἀρχή)가 있다는 형이상학적 입장에 대해, 이유(근거) 없는 존재의 신비를 말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脫형이상학이라 칭하고 <탈형이상학의 하느님>(1998년)이란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한 동료 학자가 맹비난하는 글을 냈다. 그는 脫을 반(反)으로 견강부회까지 하면서 내 글을 비난했다. 그러나 여기서 脫은 反이 아니라 비(非)와 초(超)의 뜻이라 설명해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차원을 달리하는 언어의 상징성에 대해 눈을 닫고 귀를 막고 언어의 실증적 입장을 고집하는 듯 보였다.

세상에는 타자의 입장이나 정황에 대한 이해에 인색한 것을 넘어, 자신들 패거리 집단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뒤집어 야유하며 모욕하고 폭력을 일삼는 망나니들도 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이들이 자칭 거리의 의인으로 둔갑하여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부 언론과 터무니없이 야합하여 특정 사안에 대해서만 객관성을 상실한 채 벌떼처럼 날아들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독침을 남발하고 사라진다. 인정사정(人情事情) 없는 이들에 대해, 한 지인은 그들은 감정(憾情)에 호소할 만한 사람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감정이 없어 공감력이 없는 사실상 기계인데 당신만 왜 감정을 표현하고 감정에 진실하냐고, 왜 당신만 인간인척 하냐고 몰아붙이는 기계들이라는 것이다. 생각 없는, 생각하지 않는, 생각할 줄 모르고 공격욕만 살아 있는 파충류라고도 했다. 개구리에 은밀하게 접근하여 한입에 와락 움켜쥐어 물고 독을 주입하고는 눈을 씰룩거리면서 입을 털고 꿀꺽꿀꺽 삼키는 뱀의 아가리와 아직 생명이 붙어 있을 산 개구리가 지나갈 때 불룩해지는 몸통이 연상되기도 했다.

하느님은 욥에게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시험지를 보낸다. 그 시험을 통해서만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순수성을 바라보기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 바로 영성의 핵심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요약하여 제시한 바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은 곧 새 존재의 삶이며, 이는 하느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경외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믿음의 삶, 희망의 삶, 사랑의 삶으로서 새로운 삶이고, 그것은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새로운 삶과 까닭 없는 하느님의 경외의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말을 제시한 신학자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삶이다. 이러한 삶을 요한은 '영생'이라 했고,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다. 예수는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하셨다. 나는 이성적으로 거짓이 아니라 참된 영성, 도덕적으로 악하지 않고 선한 영성, 미적으로 추하지 않고 아름다운 영성, 종교적으로 속되지 않고 거룩한 영성, 그리스도인의 삶, 곧 참되고 선하며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란 '까닭없이(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for nothing) 하느님을 경외하는 신앙생활'이라고 믿고 있다.

조선 후기 서학을 비판 했던 신후담은 천주교의 이런 천당 지옥관을 '이심'(利心)이라고 비판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죽어 천당 가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이심'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맹자의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받드는 유학자에게 지당한 논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 하느님이 심판하여 상벌에 따라 천당 혹은 지옥으로 가게 한다고 믿으며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 자신 때문이 아니라 천당을 욕심내는 마음에서 나온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욥의 신앙이 그의 건강이나 가문이나 재산을 지켜주고 축복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탄에게 욥이 가진 모든 소유를 빼앗아 보라고 허락한다. 하느님은 욥에 대한 사탄의 불신임안을 여론조사도 안 해보고 덥석 받아들인다. 그만큼 욥은 하느님이 믿어준 사람이다.

그래서 욥은 창졸간에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마지막으로 몸의 건강까지 잃는다. 사람이 실직이 되더라도, 홍수로 집이 흔적도 없이 떠내려가더라도, 자기의 건강이라도 있어야 인간으로서 어떤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욥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부스럼'을 앓는 당시로서는 문둥병과 같은 불치병에 걸려 사회와 가정으로부터조차 격리되고 쫒길 수밖에 없는 고난과 고통의 바다 한 가운데서 붙잡고 의지할 한 조각의 나무토막도 없이 빠지고 만 신세로 전락한 사람이 되고 만다.

욥의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모습을 보고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이 때 욥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하고 대답한다. 이 말은 욥이 체념과 포기에서 나온 말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에 대한 근원적 긍정, 근원적 신뢰에서 나온 말이다. 하느님에 대한 깊은 긍정의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근원적으로 긍정한다. 사심 없는 욥의 신앙,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경건이 드러난 표현이다. 우리는 욥의 이 대답을 듣고 우리의 감정이 떨리고 몸에 어떤 경련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어려워지면 아는 사람도 멀리하고 친구들도 떠나는 현실인데, 욥은 그래도 평소에 의리가 두터웠기 때문인지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3명의 친구가 그를 위로 방문한다. 성경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황폐해진 욥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욥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고 온 그들은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밤낮 이레동안 이렇게 욥 옆에서 땅바닥에 앉아 같이 울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이 당하는 고통을 그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비뚤어 썼기 때문이라고,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렸기 때문에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이라고 추론했다(4,7-8). 욥기서가 아름답고 역사를 통해 가장 사랑받고 가장 깊은 성찰의 대상이 된 이유는 가장 험한 곳으로 삶이 던져진 욥을 통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신앙의 빛깔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욥에게 주어진 고난은 나중에 성공한 후에 자랑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욥의 고난은 고난을 견디고 고난의 원인과 싸워 이기라는 교훈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욥의 고난은 하느님 경외가 무엇인지, 맑은 눈 뜨라고, 하느님에 대해 새 눈 뜨라고 주어지는 것이다.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연스럽고 순전한 눈을 뜨라는 것이다. 이것이 욥의 고난과 고통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노니 약속된 땅도
약속받은 별들도 아예 없나이다.
우리는 이 점 아노니, 주여, 이를 알면서
줄곧 주님과 함께 일하옵니다.

우리는 아노니 수천 번
우리의 수레를 새로 비끄러맬
또한 수천 번
우리의 낡은 처소를 새로 세울 것이라.
우리는 아노니 그렇다고
보수도 품삯도 받지 못할레라.
우리는 이 점 아노니, 주여, 이를 알면서
줄곧 주님과 함께 일하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노니
이 거처 도처에서
수천 번,
또다시 수천 번,
해묵은 희비극 묘기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칭찬도
찬사도 못 받을 터라.
우리는 이 점 아노니, 주여, 이를 알면서
줄곧 주님과 함께 일하옵니다.

그리고 주여, 주는 아시오니 우리가 안다는 것,
우리 모두가, 우리들 모두가 안다는 것을.
(악마가 대체 어디 있느뇨?)
그래서 오늘 당신은 내기를,
욥이나 파우스트와의 내기보다 훨씬 안전한 내기를
누구와도 거실 수 있는 거지요.
-시인 León Filipe

욥은 고통을 피하지 않았고, 맞서 싸우려들거나 빨리 통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의 심장을 파고들어, 고통 안에 묻힌 하느님의 새로운 얼굴을 찾아 본 사람이다. 욥은 고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승화시킨 사람이며, 생의 가장 깊은 절망과 허무의 바닥에서 맑은 눈으로 하느님을 다시 발견하고 세상을 다시 본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앞을 비추는 희망의 사람이 되었다.

아픈 일이지만 고난이 욥을 키웠고 고난이 욥을 깨우쳤고 고난 속에서 욥은 하느님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배웠고, 고난을 통해 하느님을 생각 속에서만이 아니라 피부로 몸으로 만났던 것이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 42:5). 욥이 피부로 몸으로 만난 주님에 대한 신앙은 '까닭 없는 하나님 경외"로 나타난 신앙이다.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함으로써 인간은 가장 자유로운 삶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덤벼들지 않고, 하느님을 벗으로 보는 자유, 인간을 하느님처럼 보는 자유, 하느님의 자유, 하느님의 자유한 사랑, 사랑의 자유를 누리면서 아름다운 영광의 하느님을 공경하줄 알게 된다.

※ 이 글은 심광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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