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폭력과 십자가

심광섭 전 감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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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심광섭 교수 페이스북)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그리스도께서 배곯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Christus hilft den hungernden Kindern, 1945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 교과서로 사용하기 적당한 책 중 하나인 『기독교조직신학개론』(다니엘 밀리오리 지음)의 기독론에서 저자는 십자가 사건을 폭력의 문제와 결부시켜 풀어나간다. 그래서 제목이 "폭력과 십자가"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압도적이다.

폭력이 동원된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가? 하여 교회는 우리 삶과 세상의 활동 속에 만연된 폭력을 은폐하려는 것에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가해진 폭력을 교묘하게 가장하는 것에서도 노련함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십자가 사건의 폭력성을 은폐하면서, 하나님의 값진 사랑의 메시지를 한갓 감상적인 동화나 지배의 상징으로 전락 시키거나 그것의 참된 의미를 여러 가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국제관계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명예와 부, 혹은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패거리들의 권모술수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고, 이 폭력은 가정이나 교회의 영역에서 수시로 권력 남용으로 나타나며, 무엇보다 sns의 집단적 문자폭력, 언어폭력은 심각하다.

본래 사도신경에는 예수께서 죽음의 세계(지옥)에 내려가셨다(descendit ad inferna는 고백이 있는데, 밀리오리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내려갔던 지옥을 폭력과 만행이 횡횡하는 곳이라고 해석한다. 밀리오리는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죄의 핵심적 권세를 폭력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 그리스도는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 전체적인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세계의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2) 그리스도는 모든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치유하는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전달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 명제가 눈에 아주 크게 들어온다.

폭력의 행사에는 행위자(가해자)와 피해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라는 글에서 서양신학의 속죄론이 일방적인 가해자의 신학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억압하는 자(행위자)의 용서와 구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억압받는 자(피해자)의 구원과 해방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항상 가해자가 죄에서 구원받는 문제에만 골몰했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피해자의 탄원은 잘 듣지 않았다. 죄인의 칭의, 피해자의 칭의를 동시에 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正義)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정의가 아니라, 권선징악, 권선악벌의 정의가 아니라 공의를 바로 세우고 굳은 것을 곧게 하는 정의, 곧 창조적인 정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 행위자와 피해자를 모두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정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란,
①구원하는 정의로서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이며
②사회적인 차원에서 희생자와 행위자를 함께 고려해야 하며
③정의의 목표는 단순히 영혼구원이나 개인의 구원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거하는 새로운 땅, 곧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란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정의, 선한 자에게 상주고 악한 자에게 벌 주는 정의(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라 공의를 바로 세우고, 굽은 길을 곧게 하는 정의 곧 창조적인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해자는 죄의 권세와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가해자를 반드시 희생자의 면전에서 해방한다고 말한다. 가해자에게 화해를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자이다. 희생자의 칭의는 가해자의 칭의에 앞선다. 이 둘은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나간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들에게는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고 가해자들을 바로 잡아 주시는 정의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리를 찾아주는 것, 모두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몰트만의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칭의론"의 골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나는 당신들에게 내 분노를 선물하지 않겠다." 파리 테러로 아내를 잃은 파리지앵 앙투안 레리스가 페이스북에 올린 강력한 메시지와 몰트만의 칭의론의 방향이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폭력과 대항/보복적 폭력이 만연한 상황에서 피해자와 행위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 대목에서 밀리오리는 조심스럽게 "피해자와 가해자, 희생자와 범죄자, 억눌린 자와 억압하는 자 등에 관련된 언어 자체가 비인간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에 주의하자"라고 말한다. 십자가 신학이 가지는 측량할 수 없는 구원의 능력, 구원의 신비를 예감하고 그 넓고 높은 비전을 감촉하는 자만이 말 할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부활을 통해 그 능력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①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세계의 폭력과 죽임의 힘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②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야만성이라는 깊은 흑암 속에서도 빛날 수 있다.

③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우리를 종종 마비시키는 죄책감보다 강하다.

④하나님의 <생명의 길>은 우리의 죽음의 길보다 더 넓다는 진리를 인간의 역사 안에 깊이 새겨놓는다.

※ 이 글은 심광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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