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달리다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Feb 09, 2020 08:48 PM KST

- 시편 121:5-8, 베드로전서 3:8-12, 마가복음 5:3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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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서기 165년,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 안에서 '안토니누스병'라는 이름의 병이 유행했습니다. 15년간 5백만 명이 숨졌습니다. 그 병은 19세기에 들어서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병, 바로 천연두였습니다. 우리나라 옛말에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바로 그 '마마'입니다. ('호환'[虎患]은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를 말합니다. 한국인들은 호랑이와 천연두 그리고 전쟁을 제일 무서워했습니다.) 14세기 유럽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병'라는 이름의 병이 크게 유행해 당시 인구의 3분의 1인 7,50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병은 중국과 유럽을 잇는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옮겨온 병, 벼룩이 우글거리는 모피 속에 숨어있던 균이 옮긴 흑사병이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도 1918년에 스페인에서 발병한 독감으로 약 5천만 명이나 사망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교수의 명저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는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통찰하게 해줍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책이고, 지난 10년간 서울대 도서관 대출 1위를 기록했습니다. 1972년, 당시 생태학자였던 저자는 뉴기니의 한 원주민 지도자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왜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오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합니까?' 백인이 흑인보다 나은 게 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지능이 높아서인가요, 아니면 DNA가 우월해서인가요? 이 책은 그게 아니라고 답해 세계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서기 1532년, 스페인의 피사로가 이끄는 단 168명의 군인이 남미 잉카제국의 아타우알파 황제가 이끄는 80,000명의 대군과 싸울 때의 일입니다. 168 대 8만!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그것도 칼로 싸우는 재래식 전투였습니다. 그런데 잉카제국 군대 선봉대의 손에는 무기가 아니라 빗자루가 들려있었습니다. 그들은 황제가 나아갈 수 있도록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고 길을 쓸며 전진했습니다. 그때 상상도 하지 못한 소리가 났습니다. 스페인 군대가 쏜 총소리였는데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았습니다. 엄청난 심리적 공포심에 8만 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쳤습니다. 이날 7천 명이 학살됐습니다. 스페인 군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힘, 즉 총과 쇠의 힘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들에게 이보다 더 무서운 힘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몸속에 숨어있던 무기, 즉 '균'의 힘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전염병의 근원은 가축입니다. 남미에는 라마와 알파카밖에 없었지만, 유럽인들에게는 가축화할 수 있는 다양한 포유류가 있었습니다. 그 가축으로부터 유럽인들은 젖과 비료, 털과 노동력, 그리고 고기와 가죽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균이었다고 다이아몬드 교수는 말합니다. 동물을 가축화한 사람들은 새로 진화한 병원균에 의해 제일 먼저 희생되지만, 곧 그 질병에 저항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렇게 면역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 병원균에 노출된 적이 없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면 유행병이 돌기 시작하여 심한 경우 전체 인구의 99%까지 몰살하게 됩니다. 실로 몸속에 13종이나 되는 균을 품고 아메리카로 간 유럽인들에 의해 남미 원주민 95%가 몰살당했습니다. 칼 한 번 안 쓰고, 총 한 방 안 쐈는데 저절로 죽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균과 총과 쇠가 유럽이 다른 대륙의 운명을 바꾼 '사악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2019-nCoV) 감염증 사태가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천연두, 흑사병, 콜레라, 결핵 등이 세균, 즉 박테리아로 인한 감염병이라면, 독감, 메르스, 사스와 호흡기 질병은 바이러스가 원인입니다. 세균은 단세포생물로 혼자 살아갈 수 있으나, 바이러스는 숙주(宿主)가 되는 생물이 있어야 증식하며 살 수 있습니다. 크기도 세균의 수백분의 1 정도에 불과해 바이러스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발견됐습니다. 이 가운데 '코로나바이러스'는 1930년대 닭에서 처음 확인되었다가, 1960년대 들어 사람에게서 발견됐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코로나바이러스는 7종이 있는데 그중 4종은 감기와 비슷한 가벼운 증상만 일으키지만, 나머지 3종이 바로 우리 귀에 익숙한 '사스' 코로나바이러스와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 그리고 이번에 퍼지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모양이 공처럼 생겼는데 표면에 왕관처럼 생긴 수많은 돌기(스파이크)가 무수히 솟아 있습니다. 사실 '코로나'라는 이름은 라틴어에서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은 환자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을 통해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격리'가 필요합니다. 14세기에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검역'(檢疫)을 의미하는 '쿼런틴'(quarantine)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40일간의 격리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쿼런타'(quaranta)가 40이라는 뜻입니다. 흑사병이 발병하지 않은 육지 항구에 배가 정박하려면, 그 배는 항구 밖 해상에서 40일간 체류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검역 기간 배 안에서 흑사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으면 항구에 접안이 허용되는데, 그동안 배로 음식물을 보내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지 항구에서 흑사병이 발생해 배가 그대로 떠나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검역과 격리의 역사가 나옵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3장에 나오는 정결 규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중 중에서 감염성 피부병 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일러주십니다. 어떤 성경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병을 '나병'(한센병)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차라아트'는 감염성을 지닌 악성 피부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위생 상태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피부병이 번질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13장을 요약하면,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돋으면 이를 제사장이 관찰하게 하고, 환부의 털이 희게 되거나 피부의 환부가 우묵해지면 제사장은 이를 감염성 피부병으로 판정하게 됩니다. 만약 판정하기가 어려우면 7일간 환자를 격리해 관찰합니다. 하지만 7일이 지나도 판정이 어려우면 다시 7일을 격리해 관찰하고 판정합니다. 하지만 감염성 피부병으로 판정되면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진영 밖'으로 나가 혼자 살아야 합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추방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염성 질병을 가진 자를 격리하고 추방하라는 모세의 명령은 그 취지가 좋은 것이었습니다. 자칫 전염병의 확산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척박한 광야에서 전멸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예수님 시대에 이르면, '병자 = 죄인'이라는 등식이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추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선한 가르침이 종교적 도그마로 변질된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길을 가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시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요한 9:1-3).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축귀(逐鬼)과 치유(治癒)의 기적을 행하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기 위해 축귀와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분입니다. 그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다는 기록은 성서 밖에도 많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님을 "비범한 행위의 실천자"라 했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켈수스도 예수라는 인물은 "어떤 마법적 권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썼습니다. 성서와 성서 외 자료들에서 예수님은 축귀사 혹은 치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당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수많은 마법사와 두 가지가 다르셨습니다. 첫째로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돈벌이에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어떤 주문(呪文)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유명한 유대인 퇴마사였던 엘레아자르는 주술적인 효험이 있다는 나무뿌리를 사용해 귀신을 몰아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보면 그분은 아무 도구 없이 오직 말씀 한마디로 귀신을 쫓아냅니다(마가복음 1:24-26). 귀신을 쫓아내는 목적도 달랐습니다. 주님이 거라사(Gerasa)라는 이방인 지역에서 '군대'(legion)라는 이름의 귀신이 들린 사람을 구해주실 때의 일입니다. 이 귀신의 이름은 이방 제국의 '군대'를 떠올리게 하고 그들은 돼지 떼 속에 들어가 바다에 수장됩니다(마가복음 5:9-13).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이야기를 듣고 모세 때 이집트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 수장되는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유대인의 땅에서 유대인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에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목적은 단지 신비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악한 권세로부터 구원에 이를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에서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이 치유를 통해 의도하신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예수님에게 치유 받은 사람들을 살펴보시면 그들은 모두 모세법에 의해 '온전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병이 들었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온전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3장의 정결 규례가 지시하는 대로 그들은 '부정(不淨)한 자"들이었고, 또 부정하기 때문에 배제되고 격리되고 추방되어도 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치유 받은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으며 사회적으로 기피 대상이 된 사람들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위를 돌려주신 분이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나옵니다. 그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오히려 더 악화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행위는 당시 유대 정결 규례에 의하면 예수님을 '오염'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깨끗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더구나 공공의 장소에서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곧바로 자신의 몸에서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시고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두려워 떨면서 엎드려 사실대로 다 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마가 5:34)고 축복하셨습니다. 혈루증에 걸려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사회적으로 기피와 배제의 대상이었던 그 여인은 성전에서 예배할 수도 없었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베푸신 치유의 기적은 단지 몸의 질병만을 고치는 것을 넘어서 그 여인을 가정과 사회로 복귀시키시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회복시키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을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율법에 그렇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3절) 어떤 복을 받을 것인지,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멸시하여...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면(14-15절) 어떤 재앙이 임할 것인지 소상히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와 율법을 준행하면, "음식을 배불리 먹고 [자신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게 되겠지만, 이를 준행하지 아니하면 "재앙[이]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될] 것"이며 "파종한 것이 헛"된 일이 될 것이고, 만일 이렇게 되어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聽從)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재앙을 일곱 배나, 그래도 청종하지 아니하면 다시 그 일곱 배나, 그러고도 대항하면 그것에 또 일곱 배나, 그리고도 계속해도 저항하면 또 그 일곱 배나 징벌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무섭고 섬뜩한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용서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사면이나 은혜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하기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카르마와 같게 되었습니다.

'카르마'(Karma)라는 말을 아십니까? 불교에서는 '업보'(業報)라고 합니다. 선악의 행업(行業)으로 인한 과보(果報)를 의미합니다. 선한 일을 하면 선한 결실을 맺고 악한 일을 하면 악한 결과를 봅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또 미래의 원인이 됩니다. 결국 모두가 자기하기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분명히 인과법칙이 작용합니다. 성서도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이 뿌린 대로만 거둘 것이라는 생각은 다 맞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내가 뿌리지 않은 것도 거두고, 나에게 원인이 없는 일도 발생합니다. 사실 인생이란 자신이 뿌리지 않고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시작하는 선물과 같은 어떤 것입니다. 내가 부모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태어날지 결정하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 잘못으로 인한 고통도 있지만 내 잘못이 아닌 고통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카르마'가 아니라 '카리스마'(Charisma)를 이야기합니다. 카리스마란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온통 이 카리스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거두어가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의 카리스마가 세상의 카르마를 끊은 이야기입니다. 인과응보의 법칙과 카르마의 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카리스마의 치유를 베푸신 분입니다. 그분은 대가를 바라고 마법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병자를 바라보는 혐오와 차별과 기피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업보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낙인찍힌 소위 '죄인'이라는 병자들을 찾아가 살갗을 맞대고 고쳐주신 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긍휼이 많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7)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를 볼 때마다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마가복음 6:34)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 기록한 신약의 한 서신은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히브리서 4:15, 개역한글)이라고 썼습니다. '체휼'(體恤)이 무슨 뜻입니까? 몸 '체'자에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휼'자입니다. 그런데 이 '휼'자는 마음 '심'(忄)변에 피 '혈'(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마음속으로 피를 흘린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internal bleeding"이지요. 죽어가는 자식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예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앞에서 자신의 가슴 속에 피를 흘리는 아픔으로 우리는 연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3장 8절은 우리도 이와 같은 예수님을 닮아 "다 마음을 같이하며 체휼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은 정결 규례에 의해 부정한 자로 배제되고 격리된 이들을 직접 만져서 낫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냉담했고 질병에 걸린 자들을 '불가촉민'(the untouchable)으로 규정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을 몸소 느끼고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을 직접 만지고 손잡아 주시면 고쳐주셨습니다. 성서를 보면 어떤 나병 환자가 찾아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마가 1:41)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살 난 소녀가 병을 앓다 죽었을 때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마가 5:41) 그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성경 곳곳에 예수님이 베푸신 치유의 기적을 보면 주님은 보지도 만지지도 말아야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살갗을 맞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시니 사람들은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와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마가 6:55b-56)라고 성서가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본문인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난 딸이 죽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 이르니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오직 세 제자,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마가 5:41).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애정 어리고 인자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 땅에서 통용되던 아람어(Aramaic)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탈리다'는 '소녀야'라는 뜻이고, '쿰'은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 입니다. 그런데 '탈리타 쿰'이라는 말은 어떤 주술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말이었습니다.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사랑스런 어조로 자기 자녀를 잠에서 깨울 때 흔히 쓰던 일상어였습니다. 이 말은 마가복음에만 나오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마가는 주님이 친히 사용하신 이 아람어를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기록하여 우리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달리다굼!' '얘야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거라!' 새 아침의 환희와 부모의 정겨움이 전해옵니다. 마치 사망과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부활의 새 아침이 열리는 듯 합니다. '달리다굼!' 이제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경은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5:42)라고 전합니다. 그 아이가 단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동작을 단순 과거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함으로써 아이가 즉각적으로 깨어나 방안을 이리저리 걸었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대단한 문학적 기법입니다. 아이는 생명은 물론 원기까지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5:43)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베푸신 치유는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생명의 회복이요,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육 전체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온 국민이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중국에서 누적 사망자가 800명을 넘었습니다. 미지의 병이라 더욱 두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결핵이나 독감이 결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가볍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결핵과 독감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각각 2천 명을 웃돕니다. 미국에서는 올해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지구 위에서는 하루 약 3만 5천 명이 기아로 죽습니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도 매일 이렇게 굶주림으로 수많은 아이가 죽어가는 소식은 아무도 뉴스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생명이 위협받아야 재앙이라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에 특정인 혐오와 잘못된 심판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사태가 중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논지를 폅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전염병이 확산될 때마다 반복되는 근본주의적 심판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사회 현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정죄하는 태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본인이 확증 짓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남을 정죄하고 '그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병든 자를 찾아가 손잡아 주시며 그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방역 당국과 의료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할수록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그래도 안심이 된다'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혐오가 아니라 협력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고도로 세계화된 세상에서 한 가족이 된 인류는 공존공영을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짜뉴스의 유통을 피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며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처럼,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1). 그리고 지역에서 격리된 가족이나 이웃을 돌보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며,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일선 관계자들과 병원 종사자들에게 신뢰와 감사, 격려의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실제 천안아산지역 기독교계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공포로 힘들어하는 교민들과 지역주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5백여 명이 넘는 우한 교민들이 격리된 아산시 경찰인재개발원 앞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우한 교민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큰 사랑으로 품어주신 아산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한 교민과 지역주민 모두에게 마스크를 비롯한 방역용품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런 지역 교회의 노력으로 우한 교민들과 지역사회 모두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국내에서 첫 번째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을 받았다가 상태가 호전돼 격리해제를 앞둔 중국 국적의 1번 환자가 한국 의료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영어로 쓴 편지에서 이분(35세, 여)은 "이 재앙 속 고통 받고 있을 때 당신들이 나에게 해주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며, "생명을 구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는 고쳐주는 사람에게 어진 마음이 있다는 뜻의 의자인심(醫者仁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에게 당신들은 그 이상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 모두는 나에게 영웅이고 이 경험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며 "당신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 남은 생에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선진화된 의료 기술과 전문적인 태도가 없었더라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기 어렵다"라며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 자신을 치료해준 인천시의료원의 의료진 모두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입니다"(루즈벨트). 지금 두려움 때문에 환자들에 대한 혐오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감염병을 죄에 대한 벌이라는 신앙적 낙인까지 찍습니다. 무얼 잘못했으니 하나님이 벌주시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업보 사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카르마의 회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카르마에서 카리스마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 안에 살아야 합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 도로 거두어가지 않으시는 은혜, 아무 공로 없으나 주고 또 주시는 은혜, 못나고 약하고 병든 것들을 더욱 귀히 여기시고, 사람들이 격리하고 배제하고 추방한 자들을 만나주시며, 살갗을 맞대고 손을 잡아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그 은혜,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으시며 우리에게 새 생명의 아침을 열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 그 은혜의 세계 안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얼어붙은 이 아침에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아이야, 눈을 뜨거라! 아이야, 그만 자고 일어나거라! 내가 생명과 부활의 새 아침을 열었다! 어서 일어나 나가자! 아멘. (20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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