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코로나19 이후 기독교인의 자세를 묻다

장동민·백석대 교수(교회사)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공공신학의 입장에서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를 생각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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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장동민 교수 페이스북 갈무리)
▲코로나19 사태로 온 나라가 마비되었다. 모든 국민이 공포에 떨면서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혐오의 바이러스가 모두의 마음을 좀 먹고 희생양을 찾아 그를 비난함으로 분노를 삭인다.

코로나19 사태로 온 나라가 마비되었다. 모든 국민이 공포에 떨면서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혐오의 바이러스가 모두의 마음을 좀 먹고 희생양을 찾아 그를 비난함으로 분노를 삭인다. 이 와중에도 바싹 다가온 총선을 생각하며 정치인과 언론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공포를 극대화하고, 이에 따라 민심은 요동친다.

그럼 교회는? 코로나19 이후 교회에서의 담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참에 신천지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일에 회집하는 문제다. 둘 다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나, 너무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다. 교회라는 종교 단체의 존립에 관한 문제이지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천하를 다스린다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면, 당연히 코로나19 사태의 배후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뜻을 알아야 한다. 그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좁은 마음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다행히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선 성경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이 글이 공공신학의 입장에서 담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 원한다.

# 장면1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성경에는 전염병 창궐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한두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민수기 16장, 소위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고라'라는 레위사람이 백성의 지도급 인사들 250명과 더불어 모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땅이 갈라져 산 채로 음부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이를 목격한 백성들이 회개하기는커녕 모세를 더 심하게 원망하였고, 하나님은 전염병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였다. 여기까지는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익숙한 장면이다.

그 전염병은 전염 속도가 매우 빨라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열이 오르고 얼굴이 검어지고 피를 토하며 죽기 시작하였다. 모세는 당시 대제사장 격인 그의 형 아론에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아론이 향로에 제단 불을 담아 비참한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하나님은 진노를 멈추시고 전염병이 그쳤다 한다.(민16: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무슨 의미인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자. 수십만 명이 광야에서 야영을 하고 있다. 저 북쪽 진영에서부터 전염병이 점차로 퍼져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진영을 뒤덮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죽음의 천사가 무서운 모습으로 서 있다. 대제사장 아론은 그 죽음의 천사를 막고 섰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죽음의 천사여, 이 백성을 모두 죽이시렵니까?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밟고 지나가십시오." 그는 지금 온 몸으로 이 죽음의 천사와 전염병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론의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거두셨다. 죽음의 천사는 물러가고 전염병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 장면2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부터 거의 5백 년이 지난 후 또 다시 전염병이 이스라엘을 휩쓸었다. 다윗 왕 말년에 그는 인구조사의 죄를 범하였다. 그와 그의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지하는 교만이 싹텄던 것이다. 하나님은 또 한 번 전염병을 통하여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하였다.

이번에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는 죽음의 천사를 보았다. 다윗도 천사를 가로막고 기도하였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24:17) 고라 사건 때의 대제사장 아론과 같은 마음을 다윗도 품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백성들의 목자로 세우셨기에 생명을 바쳐 양을 지키는 것이 목자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던 손을 거두셨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보내고, 대제사장이나 목자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가로막고 용서를 구하였다. 이 장면들에서 하나님은 마치 백성들을 공격하는 대적처럼 보인다.

"나를 막는 사람이 있다면"

다윗 때로부터 다시 5백 년이 지났을 때 대적으로서의 하나님이 좀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겔22:25-31) 에스겔이 사용한 은유다.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밤중에 공성전을 펼쳤다. 전투가 극심하여 성벽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다시 성벽을 쌓든지 아니면 그 무너진 지점을 사람이 지켜야 한다. 날이 밝아 다시 적군이 공격하는데, 성벽을 쌓지도 않고, 무너진 부분을 막아서는 장수도 없다. 성벽이 뻥 뚫린 채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짐작했겠지만, 여기서 성벽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적군은 바로 하나님이다. 재앙을 손에 들고 공격해 오는 하나님을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탄식하신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겔22:30-31) 왕과 고관들도, 제사장과 예언자도, 백성들 중 누구도 공격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멸망당하였다.

하나님의 두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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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진 = 이활 기자 )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하자 천안시내 대형 병원은 선별 진료소를 마련하는 한편 방문객 통제에 들어갔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하여 혼선이 온다. 하나님은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지키는 분이 아니시던가?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치는 적군일 수 있을까? 그리고 공격하는 적군을 막고 있는 대제사장 아론이나 백성의 목자 다윗은 또 어떠한가?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백성들을 감싸고 용서해 달라 하고, 하나님은 이들의 얼굴을 보아서 용서해 주신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이 많다는 말인가? 이들은 루이스 리터리어 감독의 영화 "타이탄"의 페르세우스처럼 신(神)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영웅들인가? 포학한 아빠의 주먹을 몸으로 받아내며 아이를 지키는 엄마라도 된단 말인가?

천만에! 하나님에게는 두 손이 있다. 렘브란트가 '탕자의 귀환'에서 묘사한 것처럼, 책임 있게 세상을 다스리며 정의를 세우는 아버지의 단단한 왼손과 그 손에 매를 맞은 아들을 싸매어주는 엄마의 부드러운 오른손이다. 대제사장 아론이나 목자 다윗은 두 번째 손을 기대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오른손을 대표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모든 중보기도는 적대자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는 행위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자신의 이름을 책에서 지워달라고까지 한 모세의 기도, 7년 가뭄을 그치게 한 엘리야의 목숨을 건 기도 등등. 그리고 중보기도의 진수는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며 기도하신 우리 예수님이시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정의의 심판자라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임을 설교한 목사님들을 비난하는 글이 SNS에 많이 올라와 있다. 이 엄중한 사태에 대하여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는 못할망정 어떻게 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맞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맞는다면 그에게 심판하실 권리도 있지 않겠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척척 들어주시는 맥가이버칼 같은 분이나,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애완 고양이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계셔서 우리가 그의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자(他者) 중의 타자이고, 모든 인간 문명에 대하여 'NO'를 선언하는 심판주이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앞에 나갈 수밖에 없는 진노의 하나님이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성경의 전염병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당을 지어 모세를 거역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였고,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오만을 품었다. 에스겔서(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죄를 언급한다. 왕들은 사자가 먹잇감을 움키는 것처럼 사람들의 재산과 몸을 삼켰고,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가르치지 않았고, 고관들도 불의의 이익을 얻으려고 백성들의 피를 흘렸고, 예언자들은 높은 자들의 악행을 미화하였고, 평민들은 가난한 이웃과 외국인을 차별하였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오만과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직접 알려주시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목사의 좁디좁은 안목으로 평소 싫어하던 세력에 대하여 혐오와 저주를 퍼붓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 밖에 있는 타자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겔9:6; 벧전4:17)

그러므로 전염병 대유행 같은 재앙이 시작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선 하나님 앞에 겸비해야 한다. 나와 우리 한국교회가 어떤 죄를 범하였는지 깨어 기도하며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잘 하고 있는데 나라꼴이 문제라고? 중국이 문제고 신천지가 문제라고? 나는 에스겔서(書) 22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목록을 읽을 때 글자 그대로 한국교회를 심판하는 것 같아 무섭고 떨린다. 교회가 세상의 죄악을 판단하는 것은 우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을 판단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현대문명의 오만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충분히 겸비한 이후에나 할 수 있다. 사족을 한 가지 붙이자면, 겸비하고 회개할 때는 홀로 골방에 앉아서 얼굴을 땅에 대고 회개하자. 큰 거리 어귀에 모여 서서 큰 소리로 회개하지 말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운동이 되는 것이지 회개 '운동'을 벌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교회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섰던 아론이나 다윗의 행동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과 교회의 죄악을 회개하면 되는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면 되는 것인가? 오늘날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사이에 선 사람은 누구이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2부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 한다.

※ 이 글은 장동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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