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십자가를 품에 안고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요엘 2:12-14, 로마서 1:9-13, 마태복음 7: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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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우리나라에는 자신이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사람만 20명, 재림 예수를 자처하는 사람은 5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밖에 자신을 하나님의 부인, 보혜사 성령, 혹은 엘리야나 다윗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탁지원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한국은 이단 사이비 종파가 많은 나라인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1923년 음력 4월 2일에 입신(入神)하여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김성도(金聖道, 1882-1944) 권사에 의해 한반도 '토종 이단'이 형성됩니다. 그는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을 타락한 천사와 하와 사이의 성관계로 해석하고 그로 인해 유전된 사탄의 피를 성혈(聖血)로 바꿔야 한다는 소위 '피가름' 교리를 맨 처음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운 김백문에 의해 교리적으로 체계화되었고, 거기로부터 문선명의 <통일교>와 박태선의 <천부교/전도관/신앙촌>이 나옵니다. 문선명의 통일교로부터는 정명석의 가 나오고, 박태선의 천부교로부터는 조희성의 <영생교>가 나오는데 다시 거기에서부터 유병언의 <구원파>와 최태민의 <영세교>가 나옵니다. 유병언의 구원파는 세월호 사건에서, 최태민은 최순실 사건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졌습니다. 박태선의 천부교로부터는 또한 유재열의 <장막성전>이 나왔는데 여기에서부터 지금 코로나19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이만희의 <신천지>라는 이단 사이비 종파가 나옵니다.

'이단'(異端)이라는 말은 원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도교나 불교 등을 '거짓 가르침으로 혹세무민하는 무리'라고 비난하면서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전래와 함께 영어 '헤러시'(heresy)를 이단으로 번역하면서 그 뜻은 '신학적 정통에서 벗어난 분파'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은 겉은 비슷하나 근본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악한 가르침'이라는 뜻의 '사교'(邪敎)와 동의어입니다. 어떤 이는 이를 '유사종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종교가 아닌데도 종교를 흉내 낸다는 뜻입니다. 지난 100년간 한국인들은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식민지 지배, 분단과 전쟁, 압축적인 경제성장과 정체, 극심한 사회적 경쟁과 급격한 변화, 이 쉴 틈 없는 역사 속에서 한국인들은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 모두 상처와 한이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 고단한 삶 속으로 숱한 이단 사이비 종파가 뿌리를 내리고 가난하고 지친 백성을 미혹하며 거짓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금 신천지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천지가 이룬 급속한 성장이 화제이고, 어마어마한 재산 규모가 화제이며, 그들의 조직적 결속력과 구성원의 충성도, 그리고 유난히 젊은 층이 많다는 점도 큰 화제입니다. 이제는 널리 알려졌지만, 신천지가 일어서게 된 비결은 세 가지 '추수' 작전을 통해서입니다. 첫째로, 기존 교회의 교인을 개별적으로 포섭해 오는 '이삭줍기,' 둘째로 교회를 분열시켜 그중 일부를 신천지로 데려오는 '산 쪼개기,' 셋째로 교회를 통째로 신천지 집단이 장악해 버리는 '산 옮기기'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추수 전략의 밑바탕에는 '거짓말'이 공통으로 깔려 있습니다. 신천지의 추수, 즉 전도는 모두 잘 꾸며진 거짓말로 구성됩니다. 신천지는 이런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심지어 '모략'을 정식 교리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모략(謀略)이란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밈'이라는 뜻입니다. 신천지는 그것을 '뱀 같은 지혜'(마태 10:16) 혹은 '이리 옷 입기'(마태 7:15)라고 부르며 마치 성서의 가르침인 양 정당화합니다.

신천지가 아직도 사용하는 1962년 판 <개역> 성경에는 모략으로 번역된 단어가 여럿 나옵니다. 하지만 그 히브리어 어원의 뜻은 거짓말이 아니라 충고(counsel)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서들은 이 단어를 문맥에 따라 '경륜,' '슬기,' '전략,' 혹은 '계획'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욥기 12:13, 잠언 25:6, 이사야 11:2, 이사야 19:17; 28:29; 46:10, 예레미야 32:19, 미가 4:12). 하지만 신천지는 공개적으로 '모략 교리'를 세우면서 로마서 3장 7절을 그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그리스어 프슈스마, ψεῦσμα)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개역>과 <개역개정>이 동일함.) 이 한 구절만 읽으면 정말 거짓말을 해서라도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읽힙니다. 하지만 이는 앞뒤 문맥을 잘라버리고 원뜻을 뒤집는 거짓 해석입니다. 로마서 3장을 잘 읽어보시면, 어린아이라도 바울이 '가상의 반론'을 펴고 있다는 점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겠느냐 한다고 칩시다. 또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로마서 3:7-8). 사도 바울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가상적으로 제기하는 말의 앞뒤를 잘라 마치 그 말이 바울의 말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거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거짓입니다. 실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를 표방하는 집단이 거짓말을 그 집단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공식 옹호한 것은 신천지가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리적으로 합리화해도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교리적으로 합리화하는 종교는 종교를 빙자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이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집단이 기독교일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거짓말로 전도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을 숨기지 않으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로마서 1:16).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함을 믿습니다(요한 8:32). 성서는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다고 말합니다(시편 25:8).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니라"(시편 33:4). 그래서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신명기 6:18, 13:18, 21:9).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신다(시편 7:10)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에베소서 4:25).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내라고 권면합니다(고린도후서 4:2).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출애굽기 20:16, 신명기 5:20). 신천지가 구원을 받는 자들의 숫자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 명은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요한계시록이 말합니다(요한계시록 14:5). 오히려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요한계시록 21:27),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요한계시록 21:8).

신천지의 가장 큰 문제는 거짓을 합리화하는 모략 전도 때문에 우리 사회를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사회로 만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반지성과 혐오 그리고 가짜 뉴스가 판치는 '탈진실 사회'(post-truth society)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 '위장' 포교보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수많은 사람이, 특히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천지 신도 중 20대 청년의 비중은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50%에 달합니다. 40~60대 중장년층 여성도 많습니다. 신천지 교인으로 4년간 활동하다 탈퇴한 한 청년(28세)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생 때 들어가서 졸업하고도 돈도 안 받고 인생을 다 바쳐서 여기에 올인했습니다. 4년 동안 부모님도 속이고 취업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청년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신천지 신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이라는 숫자 안에 들기 위해서 열성을 다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에는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신천지는 말세 때가 되면 재림하는 예수께서 14만 4천 명의 영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오는데, 이 영은 역사 속에서 순교 당한 14만 4천 명의 영이고, 그 영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와 신천지에서 구원받는 14만 4천 명의 육신과 합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신인합일'(神人合一), 즉 영과 육의 결혼이 이루어지면 자신들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합니다. 노이불사(老而不死)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이 땅 위에서 왕 노릇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한 신천지 교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44,000명의 권세가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옛날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돈을 들고 찾아오므로 전 세계의 돈이 신천지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만 4천 명의 제일 꼴찌에라도 반드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매우 조악한 '조건부 종말론'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에서 한창 동떨어진 주장입니다.

144,000은 12 x 12 x 1000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x 예수의 12제자 x 충만을 의미하는 1,000입니다. 즉 구약시대 선민 전체와 신약 시대 제자 전체에 충만을 곱한 숫자입니다.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신천지는 문자적으로 실제 숫자 14만 4천만 명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신자들은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과정에서 가출, 학업 포기, 직장 퇴사, 이혼 등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래도 14만 4천에 뽑히면 '인생 대박'이 난다니 불안한 미래가 장밋빛 종말로 대체됩니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신천지 신도들의 맹종과 희생의 이유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매직 넘버이고 VIP 회원권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천지 교인 숫자가 14만 4천 명이 훌쩍 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14만 4천 교리의 변개(變改)가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14만 4천이 차면 종말이 온다고 하더니, 갑자기 14만 4천은 단순한 신도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의 숫자라는 주관적인 새 기준이 제시됩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가린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14만 4천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구원은 이제 단지 '선착순'이 아니라 '성적순'이 되었습니다. 더 열심히 헌금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기모순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해야 그 공로로 14만 4천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여기서 전도란 사실 자신의 경쟁자를 데려오는 게 아닙니까? 만약 143,999명을 뽑고 한 명을 더 뽑아야 하는데 그게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전도한 사람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전도를 안 해야 자신이 구원받을 확률이 커지는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를 영생의 명단에서 떨어트려야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천박한 신앙의 논리입니다. 이와 달리 성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13)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로마서 6:23)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에베소서 2:8)이라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이 구원은 선착순도, 성적순도 아닙니다. 공로와 기여에 따라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천지는 사람을 등급을 매겨 포교합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은 하늘나라의 큰 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누가 14:21) 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천지는 60세 이상 노인, 장애인, 가난한 사람, 간병자, 부채가 많은 사람 등은 포교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왜냐하면 급속히 14만 4천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7).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 평생을 거짓 선지자와 목숨을 걸고 싸운 구약성서의 예레미야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예레미야 14:14, 이외 5:26, 9:8, 23:26, 23:32, 27:16, 28:15, 29:9, 29:21, 29:31). 성서의 숱한 경고처럼,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고(야고보서 3:14), "처음부터 들은 것"(요한1서 2:24) 안에, 즉 "가르침을 받은 전통"(데살로니가후서 2:15) 안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특히 청년들이 신천지의 가짜 미래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저는 매우 슬픕니다. 그런데 이는 거꾸로 말하면 우리 사회가, 그리고 교회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흙수저'밖에 잡을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좌절했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무한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어긋난 선민의식과 이기적 욕망의 발로라 하더라도 신천지라는 약에 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가슴에 뚫린 구멍을 메울 수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랑과 희망과 진실한 인간관계가 필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치유와 회복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경건히 그와 동행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진 의미를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진정한 힘임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자기만의 십자가를 하나씩 등에 지고 삽니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면 먼저 고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엔 사랑도 있습니다. 희망도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언제가 서강대에 계신 송봉모 신부님을 만났을 때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인을 만난 송 신부님은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고 했답니다(정호승,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비채, 2006).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니까 힘이 듭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품에 안고 가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겠다는 자기 의지와 인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신부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는지 모른다고 회고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저의 마음도 편안해졌습니다. 십자가를 거부하려 애쓰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십자가일까요? 저는 우리 각자의 삶이 자기의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생은 기쁨이지만 고통도 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쁨보다 고통이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힘들고 고난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물로 주어진 소중한 생명을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그 삶이라는 각자의 십자가를 우리는 품에 안고 가야 합니다. 엄마가 젖을 먹일 때 아기를 품에 안고 먹이는 것처럼 내 삶이라는 십자가를 귀한 존재로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교독문 시편 22편은 수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묵상하게 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난은 울부짖음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고난 중에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얼굴을 향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곤고(困苦)를 멸시하지 않으신다 했습니다.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시편 51:17, 새번역)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꼭 필요한 만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렇듯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깊어지는 사랑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증언이 바로 믿음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신다는 연대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14만 4천'이 아니라 이 '십자가'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린도전서 1:23)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린도후서 13:4)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6)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같은 우리의 삶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미래에 대한 거짓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고통스런 삶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감사의 담대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용기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종교'입니다. 좋은 종교는 현재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쁜 종교는 미래에 대한 쉬운 답을 제공합니다. 오늘 씨를 심고 내일 열매를 거두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삶에는 어둠 속 인고(忍苦)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봄이 올 때까지는 추위도 이겨야 하고, 어둠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 시간의 끝에 행복은 기적처럼 파란 싹으로 눈을 뜰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경림 시인의 <싹>입니다. "... 꼼짝도 하지 않던 / 나무에 새싹이 트고 꽃이 피면 / 봄의 신비가 열린다 // 겨울을 치열하게 산 것들 / 그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 아주 작은 빛이라도 고대했던 것들 / 그들이 얼른 마중 나간 덕분에 / 봄은 오고 있다 // 아픔을 딛고 겨울을 살아낸 것들이 / 푸른 세상을 짓고 있다 / 저 여린 새싹들이 / 혹한의 겨울을 밀어내고 / 따뜻한 세상을 열고 있다."

오늘 아침 교회 오는 길에 보니 영춘화(迎春化)가 활짝 폈습니다. 이화동산의 봄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각자의 처소에 흩어져 지금 함께 예배를 드리고 계신 교우님들이 이 꽃들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했습니다. 지금 회중 없이 텅 빈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모든 교우님들과 함께 이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공동기도문처럼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속히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아무 걱정 없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었던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이제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주님이 주신 매일의 행복을 곁에 두고 행운을 찾아, 대박을 찾아 헤맸던 죄를 참회합니다. 이는 단지 신천지만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마스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게 된 세상에서 그동안 너무 많이 무책임한 말을 내뱉고 거짓 뉴스를 퍼 날랐던 우리의 입을 닫아 침묵하고 진실만을 전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비록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마주하고 있진 않지만, 교회당 밖에서 더욱 빛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한주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내와 사랑의 십자가를 '품에 안고' 또 한 주간도 주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이 환난이 다 지나고 함께 밝게 웃는 날이 속히 오길 기도합니다. 부활의 새벽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십자가를 통한 십자가 이후의 이 기다림이, 이 행복한 설렘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요 자랑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9-13). 아멘. (20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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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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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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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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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