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9:13-17, 골로새서 1:24-27, 누가복음 23:3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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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4월이 왔습니다. T. S. 엘리엇(Eliot)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지요.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그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구절입니다. 시인은 1차 세계대전 후 모든 게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있으나 정신적으론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삶을 황무지로 비유했습니다.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지금, 세계 모든 사람이 잔인한 4월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 때문입니다. 벌써 전 세계에서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감염됐고, 5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방심하다 직격탄을 맞은 나라들에선 시신이 쌓여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기 방역에 선방했다는 우리나라도 수도권 확진자의 추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곧 끝나길 바랐던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분간 더 강하게 추진해야 할 상황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지루하고도 긴 줄다리기가 시작됐습니다. 정녕 '잔인한 4월'을 맞이했습니다. 고난의 시기입니다. 이 힘든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는 고난(苦難, suffering)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씨름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빼면 남는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이웃 종교는 '고'(苦), 즉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번뇌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아집과 인연에 집착하기에 고통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이것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고난 중에는 억울한 고난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 십자가의 고난, 무고한 자에게 주어진 고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신비에 주목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일까요? 하나님의 징벌인가요? 왜 하나님은 무고(無辜, innocent)한 사람들에게도 고통과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또 "세상을 이처럼[진실로] 사랑"(요한 3:16)하셨다면, 왜 세상에 고통과 악이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혹 전능하시진 않아서일까요? 전능하시지만 혹 우리를 사랑하시진 않아서일까요?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은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에 있습니다. 고난주일이면 꼭 한 번씩 인용하는 구절인데, '고난의 종'에 관해 소개합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2절)다고 했습니다. 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3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4-5절).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고,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는 '그'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어서 우리도 덩달아 귀히 여기지 않았던 '그'가 다름 아닌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고, '우리 모두'의 죄악을 대신 짊어진,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운 종'(11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의로운 종은,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보니,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6절, 공동번역)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7절, 공동번역)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8절, 공동번역)습니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9절, 공동번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10절, 공동번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은 '의로운 종'은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10절, 공동번역)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11절, 공동번역), 그리고 "자기 목숨을 내 던져 죽음"(12절, 공동번역)으로써 우리의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11절, 공동번역)라고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것은 역사의 사실(fact)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백(confession)입니다. 이사야 53장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가를 부를 때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144장)라고 노래합니다.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150장)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갈보리 산 위에 험한 십자가에 달린 그분, 즉 "고운 모양도, 훌륭한 풍채도,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는" 그분을 보고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144장)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홍수희 시인의 고백처럼, 지금 눈물 흘리는 자가 복되고, 지금 손해 보는 자가 복되며, 지금 의로움에 주린 자가 복된 이유는 "세상이 죄를 없애시는 주님 / 빌라도 앞에, 오직 / 하얗게 서 계시던 어린양"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속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우리의 고통에 연민하시고, 우리의 아픔에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성서는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다"(시편 31:7)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다"(시편 31:22)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다"(시편 8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아시고, 들으시고, 건지시는 분입니다.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하나님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이사야 49:14-16a)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사야 49:13)이라고 증언합니다. 이 위로와 자비의 하나님이 보내신 '고난의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참여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종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난을 연민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받으시는 분'(co-sufferer)입니다. 성서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8)라고 확증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이 다 사라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고난이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나중에는 큰 축복을 주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를 들면서 말입니다. 때론 이런 신앙이 맞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난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가운데는 평생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셋째로, 고난을 받을 때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난을 만나면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읽은 신약서신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라고 말합니다. 난해한 구절입니다. 옥중에서 쓴 이 편지에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what is lacking in Christ's affliction)이라는 말은 더욱 어렵습니다. 글자 그대로 보면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있다'라고 뜻으로 들립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고난이 뭔가 '모자라다'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석한 교파가 있었고,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불충분'했으므로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 그의 남은 고난을 '보충'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중세 가톨릭의 '공덕(功德) 축적설'입니다. 여기에서 중세의 고행(苦行)주의가 싹텄고 성인들이 쌓아놓은 공덕을 평신도들을 돕는 데 사용하겠다는 면벌부(免罰符, indulgence) 판매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은 부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은 충분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라고 확증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슨 말입니까? 왜 그 고난을 바울은 기쁘게 받아들입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절).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어 문법에서 '의'(tou)라는 소유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격 소유격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격 소유격입니다. 전자는 그리스도가 주격이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하신 고난'이 되지만 후자는 그리스도가 목적격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됩니다. 바울은 이 두 번째의 의미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넘치도록 고난을 당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인 골로새서에서도 이와 같은 문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못 이룬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우리의 참여입니다. 실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린도후서 1:7) 베드로전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베드로전서 4:12-13a). 여기에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깊은 이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Paul)이 아직 회심하기 전 사울(Saul)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의 일입니다.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다마스쿠스)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사도행전 9:102)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그가 땅에 엎어지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사도행전 9:3b-5)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당시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처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울에게 박해를 당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은 그리스도 자신이 받는 고난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은 곧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는데]...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4-2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성서에서 '비밀'로 번역된 '미스테리온'(mysterion)은 비밀이라기보다 '신비'가 맞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비밀과 신비는 명백히 다릅니다. 비밀은 알고 나면 싱겁지만, 신비는 알면 알수록 놀랍니다. 감추어진 비밀이 드러나면 그걸로 그만이지만, 감추어진 신비가 드러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끝도 없는 생명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신비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이 신비가 이제 우리에게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고난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참여이고 동행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을 때 그 고난은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 됩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습니다. 나의 고통 안에 주님이, 주님의 고통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 신앙의 신비입니다. 성서의 말씀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갈라디아서 2:20)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려 살게 함"(고린도후서 5:15)입니다.

지난 3월 23일, 이탈리아의 북부 베라가모의 한 병원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투병 중인 72세의 돈 주세페 베라르델리 신부님이 사망했습니다. 신부님은 신자들이 치유를 기원하며 그에게 선물한 산소호흡기를 사용하길 거부하고 그것을 자신보다 젊은 다른 환자에게 양보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신부님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신부님은 그렇게 병마와 싸움을 이어가다 끝내 숨졌습니다. 이 노(老)신부님과 같은 사람이 오늘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주의 한 병원에서는 75세의 목사님이 사망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죽음에 대해 기록한 한 의사의 글을 읽어봅니다. 제목은 "이제는 신이 존재하심을 믿습니다"입니다.

"지난 3주 동안 여기 우리 병원에서 발생한 일들을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병원으로 실려 왔고, 그 다음은 몇 십 명 그리고 몇 백 명이 몰려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죽음을 맞으러 집으러 보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 동료들은 무신론자였습니다... 나는 부모님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9일 전 75세의 한 목사님이 바이러스 확진자로 우리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심각한 호흡곤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와서 주위의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고 읽어주었습니다. 우리 의사들은 모두 피곤함에 눌리고 낙담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끝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났을 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신의 도우심을 구하기 시작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짧은 몇 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신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맹렬한 무신론자였던 우리가 지금 날마다 주님께 우리가 이 환자들을 계속 돌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구하면서 평화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믿을 수 없습니다. 어제 75세의 그 목사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위중한 상태와 도와드릴 수 없는 우리의 어려운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지 못했던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나는 지금 이 땅에서 나의 무익함을 깨닫지만, 나의 마지막 호흡을 다른 이들을 돕는데 사용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동료[의사]들의 죽음과 그들의 고통에 둘러싸여 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어 행복합니다." - 2020년 3월 23일 롬바르디아, 코로나바이러스 한복판에서 의사 줄리안 우르반).

이름 모를 그 노(老)목사님이, 그리고 그를 통해 고난 속에서 평화를 경험하고 마지막 호흡까지 환자들을 돕겠다고 다짐한 이 의사 선생님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실 때의 일입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즉 '고난의 길'을 가시다 쓰러져 더는 혼자 가실 수 없게 되었을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는 시몬이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누가 23:26), 혹은 '억지로'(마태 27:32, 마가 15:21)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고 기록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고난의 길에 기꺼이 참여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한희철 목사님(정릉교회)이 우리나라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한 인상적인 조각품에 대해 소개해주었습니다(『(40가지 키워드로 읽는 사순절 묵상집) 지킴 20 버림 20』 [겨자나무, 2020]).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는 진부령을 넘어 다음 행선지로 향할 때였다고 합니다. 모처럼 한적한 길을 걷던 중 도로 옆 잣나무 숲에 놓인 큰 물체를 보았습니다. 바위 같기도 하고 곡식더미 같기도 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예수님에 관한 조각이었습니다. 커다란 화강암을 쪼아 만든 작품들이었는데,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예수 키레네 시몬의 도움 받으시다>였습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니 예수님도 시몬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순과 고통,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라고 한목사는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있는 구레네 시몬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놓칠까 두 손으로 십자가를 꼭 붙들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의 어깨와 뺨에 닿아 있습니다. 뺨에 닿은 십자가는 '기꺼움'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시몬과 예수님 사이에는 어떤 틈도 보이지 않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 중에 누가 예수님인지 알 수 있는 표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후광이 아니라 가시면류관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시몬에게 넘긴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몬의 어깨와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시몬에게 전하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시는구나 싶었습니다"라고 이 조각 앞에 전율한 한목사는 이야기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기쁨으로 참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와 예수님 사이에는 어떤 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시몬의 고난이었고, 시몬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고난'에 참여하려는 시몬의 '기꺼움'에 주님은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화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가 내 고난 안에, 내가 그의 고난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88장). 이것은 신앙의 가장 깊은 경지, 신과 나의 완전한 합일(合一)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6-17).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2:12-13).

시몬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뒤를 따르며 주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7-28).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위해 우십니다. 프란치스코 교종(敎宗)도 한 아침 미사에서 "격리된 이들, 독거노인들, 병원에 입원해 치료 중인 이들, 봉급을 받지 못해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지 못하는 부모들, 모든 이들이 울고 있다"라며 "주님의 눈물과 함께 우리 역시 마음으로부터 이들과 함께[하자]. 주님께 은총을 간구하자. 나도 당신과 함께 운다.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눈물의 일요일"이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이 고난의 시절 맑게 울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우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놓칠까 두 손으로 그것을 꼭 붙들고, 어깨와 뺨에 그 십자가를 대고 기꺼이 주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라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기꺼이 고난당하려는 의지'(willingness to suffer)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 최고의 경지의 자유에 이릅니다. 우리 눈에 의미 없는 고통으로 보이는 것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함께 고통당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고통받는 자(co-sufferer)가 되어야 합니다. 계시록의 말씀처럼,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하나님은 지금도 무고하게 고통받고 고난받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우시며 우리의 고통을 나누고 계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잔인한 4월'이 시작됐습니다. 우리 앞에는 코로나바이러스와 길고 지루한 줄다리기가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긴 싸움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난 속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의 고난 속에 우리가 함께하니 우리는 넉넉히 이 시련을 이겨나갈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고 했습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자매]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베드로전서 5:9-10)고 했습니다. 이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고난주일을 맞은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T. S.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지요. 하지만 고난주일로 4월의 문을 열면서, 오늘 저는 이해인 님의 <4월의 시>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밝게 고난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꽃무더기 세상을 삽니다 / 고개를 조그만 돌려도 / 세상은 오만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 / 자기가 제일인양 / 활짝들 피었답니다 // 정말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 새삼스레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고 / 고운 향기 느낄 수 있어 감격이며 / 꽃들 가득한 사월의 길목에 살고 있음이 감동입니다 // 눈이 짓무르도록 이 봄을 느끼며 / 가슴이 터지도록 이 봄을 즐기며 / 두발 부르트도록 꽃길 걸어볼랍니다 / 내일도 내 것이 아닌데 / 내년 봄은 너무 멀지요 / 오늘 이 봄을 사랑합니다 / 오늘 곁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 4월이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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