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하나님의 집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May 03, 2020 08:51 PM KST

- 레위기 25:8-12, 히브리서 10:21-25, 누가복음 18: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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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가정은 /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축복 /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여 / 진정한 천국에 이르라 하시네." 김소엽 시인의 <5월의 노래 - 가정의 노래>의 한 구절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성서에서도 최초의 인간은 가족입니다(창세기 2:18-25). 창세기의 절정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의 형들과 극적으로 화해하는 장면입니다. 즉 '가족 간의 화해'입니다(창세기 45장). 애굽을 탈출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족대로"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引枋)과 좌우 설주(薛柱)에 뿌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 그 집을 넘어가게 했습니다(출애굽기 12장).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거기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명기 12:7)라는 새 규례와 법도를 주셨습니다. 안식년이 7번을 지나 오십 년째 되는 해를 거룩하게 하여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한 '희년'(禧年, Jubilee)에는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 것을 명했습니다(레위기 25:10). 초대교회는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바울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디모데전서 5:8)라고 훈계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해산의 아픔과 기르시는 수고를 먹고 오늘 이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한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시고도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신명기 5:16), 경외하며(레위기 19:3), 순종하라(골로새서 3:20)라고 말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언 23:2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 6:1-4)라고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주간 리포트에 의하면, 한국의 아동 행복도가 OECD 최하위권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에 연간 100만 명씩 태어나던 아이들이 2019년에는 약 30만 명 정도로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세계에서 최하입니다. 그런데 그 많던 아이들이 줄어든 만큼 우리 아이들의 행복도도 매우 낮습니다. 우리나라 아동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6.6인데, 이는 OECD 27개국 중 가장 낮은 수치입니다. 한국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시간이 부족하다'라는 겁니다. 둘째는 '잠이 부족하다'라는 겁니다. 셋째는 '평소 스트레스를 받는다'라는 겁니다. 특히 성적 스트레스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넷째는 '원하는 걸 하지 못한다'라는 겁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부모에게 받는 신체적 학대와 정서적 학대'입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상당수 아이가 부모에게서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무명(無名)의 그리스도인이 드린 <자녀를 위해 드리는 기도>를 읽어봅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 가끔 자녀를 나의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 착각을, / 내 삶을 자녀에게서 보상받으려는 유혹을, /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했던 이기심을. / 그래서 그들이 내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소서... 그들을 이끌어주되 강요하거나 협박하지 않고 / 그들을 돕되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 그들이 누릴 수 있는, / 실패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않게 하소서... 매사에 그들을 존중함으로 존경받는 어른이 되게 하소서. //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유능한 사람, / 일류의 사람이 아니라 유일한 사람으로 / 우리 자녀들이 자라나게 하소서."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환대하시고 품어주시고 존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툴 때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마가 9:37, 비교 : 마태 18:5, 누가 9:48). 또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제자들이 꾸짖자 노하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가 10:14)라고 하시며 그 아이들을 안아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마태 19:13-15, 누가 18:15-17). 예수님에게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누가 18:17)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마태 18:4)가 천국에서 큰 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마태 11:25, 누가 10:21).

고대 사회에서 어린이는 '힘이 없는 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 미성숙한 자였고, 여자와 이방인과 병자와 마찬가지로 권리를 갖지 못한 존재였으며, 가정과 사회의 변두리에 속했습니다. 종교사적으로 어린이의 신분은 그래서 늘 '귀머거리, 백치, 나이가 어린 자'라는 삼중 도식을 통해 묘사되었고, 이 세 종류의 사람은 영적 능력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자들로 간주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여러 편지에서 어린아이를 미숙한 자로(고린도전서 13:11), 쉽게 유혹당하는 자로(에베소서 4:14), 그리고 시기와 분쟁에 잘 빠지는 자로(고린도전서 3:1) 묘사했고, 히브리서 역시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을 먹는 어린아이를 '하나님 말씀의 초보자'(히브리서 5:12-14)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모델로 삼은 존재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작은 자'인 어린이를 사회의 중심에, 하나님 나라의 입구에 우뚝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자'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하셨을 때(마태 18:10, 14, 25:40) 작은 자는 바로 '어린이'라는 인격 안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무엇이 천국 시민의 표준이 되었을까요?

어느 날, 10살 먹은 한 아이가 방문을 닫아걸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가 저에게 자전거를 사주게 해주세요.' 할머니가 그 방 앞을 지나가다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냐, 왜 그렇게 큰소리로 기도하니? 하나님은 귀먹지 않으셨단다.' 그러자 아이가 답합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는데, 우리 아빠가 못 들으실까 봐요.'

<하나님도 웃어버린 기도>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미국의 어린아이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인데, 그 천진무구(天眞無垢)함에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사랑을 담아서 데레사." / "하나님, 우리 옆집 사람들은 맨날 소리를 지르며 싸움만 해요. 아주 사이가 좋은 친구끼리만 결혼하게 해주세요. - 난." / "하나님, 레모네이드 팔고 26센트 벌었어요. 이번 일요일에 쬐끔 드릴게요. - 크리스." /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 못 갔던 날 있잖아요. 기억하세요? 한 번만 더 그랬으면 좋겠어요. - 가이." / "하나님, 하나님, 왜 밤만 되면 해를 숨기시나요? 가장 필요할 때인데 말이에요. - 바바라." / "하나님,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일을 전부 시키시나요? 우리 엄마는 우리가 엄마의 천사래요. 그래서 우리한테 심부름을 다 시키나 봐요. - 사랑을 담아서 마리아." / "하나님, 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요, 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 미셸." / "하나님, 휴가 때에 계속 비가 와서 우리 아빤 무척 기분이 나쁘셨어요! 하나님한테 우리 아빠가 안 좋은 말을 하긴 했지만요, 제가 대신 잘못을 빌 테니 용서해 주세요. - 하나님의 친구, 그렇지만 이름은 비밀이에요." / "하나님, 남동생이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갖고 싶다고 기도한 건 강아지예요. - 조이스." / "하나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사람을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을 그대로 놔두는 건 어떻겠어요? - 제인."

피카소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어린아이는 본래 화가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나이를 먹어서도 화가로 남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인 이유는 '그림은 이런 것이다'라는 상식과 편견을, 아니 '상식이라는 이름의 편견'을 과감히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이는 본래 화가일 뿐 아니라 시인입니다. 제 큰아이가 아주 어릴 때 하루는 석양을 보더니, "아빠, 하늘에 불났어요. 빨리 119에 신고해서 구름 나라 소방차 불러야 해요"하더군요. 하지만 본래 화가와 시인으로 태어난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의 욕심과 경쟁의식 속에서 자신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말하는 가치와 상식과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 아래 이 세상에서 '잃은 자'(the lost), '작은 자'(the least), 그리고 '나중 된 자'(the last)가 회복되고 치유되고 첫째가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따뜻한 봄의 어느 날, 부모님의 손을 잡고 고궁으로 나들이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부모님 손만 붙잡고 있으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그저 눈부신 햇살 아래서 맛있는 과자를 먹으며 소풍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마련하신 따뜻한 봄날을 그저 누리기만 해도 즐겁던 어린아이들은 더 크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허비하는 어른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부모님의 손만 잡아도 행복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어린이와 같은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디든지 그분의 손을 놓치지 않고 날마다 감사하게 지낸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한1서 3:1,2,10, 4:1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한 1:12)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로마서 8:16)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빌립보서 2:15)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천진무구한 '하나님의 어린이'로 세상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시고, 또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요한 19:26-27). 예수님은 효자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아버지는 빠짐]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 10:29-30, 비교: 마태 19:27-30, 누가 18:28-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느니라"(누가 14:26)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심지어 미워하라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느니라"(마태 10:37)라고 그분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이 걱정되어 찾아왔을 때,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 3:31-35, 비교: 마태 12:46-50, 누가 8: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느라"라고 하시며,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태 10:34-36)고 매우 극단적으로 들리는 말씀까지도 하셨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이라는 말은 구약의 미가 7:7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가정은 인간이 사랑을 경험하는 최초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깊고 푸른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흔히 가족은 사회질서의 근간이자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지만, 가족이 유지하고자 하는 질서가 과연 정의롭고 공정한 것인지는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가족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계급과 성별 불평등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주체가 가족이라고 가족 사회학자들은 지적합니다. (함인희, "포스트 코로나 19, 가족은 건재하다," <세계일보> 2020.4.27.) 예수님 당시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가정은 가부장제의 축소판으로 여성과 어린이들과 장애인과 약자들이 소외되고 차별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는 주님의 말씀은 당시의 그런 가정을 해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의 새 가족을 만드시겠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안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집'을 만드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그 새로운 집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라디아서 3:28)인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서로 원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는 한 나라의 시민, 즉 '하나님의 권속'(에베소서 2:19)이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권속'(眷屬)이라는 말은 '한 집안 식구'라는 뜻입니다. 어원은 그리스어 '오이케이오스'(oikeios)인데, '가족' 혹은 '가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나왔습니다. 오이쿠메네는 '온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는 모든 땅,' 혹은 '인간 세상 전체'입니다. '피조물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 24편 기자의 고백처럼,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온 세상,' 즉 오이쿠메네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오이쿠메네에서 '오이코스,' 즉 '집'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성서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며 그 안에 사는 생명은 모두 '하나님의 한 식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사람들이 멈추자 중국과 인도의 하늘이 깨끗해지고 공기의 질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니스의 물이 깨끗해지고 돌고래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에 단지 인간만이 살고 있지 않음을 우리가 발걸음을 멈추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구가 우리 것인 양 착각하지만 그 주인은 우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권정생의 <밭 한 뙈기>입니다.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 밭 한 뙈기 / 논 한 뙈기 / 그걸 모두 / '내' 거라고 말한다. // 이 세상 / 온 우주 모든 것이 / 한 사람의 / '내' 것은 없다... 이 세상 /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 다람쥐의 것도 되고 /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되고 // 밭 한 뙈기 / 돌멩이 하나라도 / 그건 '내' 것이 아니다. /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위기 25:23, 새번역). 땅은, 온 세상은, 온 생명이 거주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집의 주인은, 즉 가장(家長)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받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인이신 이 집의 질서는 무엇보다 식구들의 일치와 평화와 화해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집의 모퉁잇돌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점점 커져서 신령한 '하나님의 집'이 된다고 말했습니다(에베소 2:21-22). 이 집 안에서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닙니다. 그럼으로써 이 집 안에는 어떤 형태의 가부장적 지배나 폭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가족이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사랑 안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집은 사랑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말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말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사는 한 가족 사이에는 갈등과 분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모두 '집콕' 혹은 '방콕'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새삼 가족의 소중함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건강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가족은 갈등이 없는 가족이 아니라 갈등을 잘 해결하는 가족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또 이번 코로나 사태는 나와 내 가족만 건강하다고 해서 나와 내 가족이 절대 안전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내 가족의 건강은 '모든' 가족이 건강할 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혈연중심주의와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 모든 이웃을 하나님의 집의 한 가족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라고 물으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목수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과 화평과 기쁨이 넘치는 이 집의 한 가족으로, 새 가정으로 부르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이런 가정을 잘 돌보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보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을 세워나가시기 바랍니다.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성공의 가치에만 매몰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가정'을 만들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가정을 돌보듯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가정도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부모 잃은 가정, 자녀 잃은 가정, 해체된 가정,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 외로운 가정 등, 상처와 아픔이 있는 가정들을 위해 기도하며 서로 도우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동료 피조물'로 여기며,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아끼고 존중하며 함께 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은 이 하나님의 집에서 풍성한 은혜와 생명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로 만물을 화해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0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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