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블랙 수면방과 로마의 게이들(스압주의)
김경열 목사(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 강사)

입력 May 11, 2020 10:05 AM KST

블랙 수면방이란 게 있나봅니다. 남성 동성애자(게이)들이 들어가서 하룻밤 질펀하게 무차별적인 성관계를 하며 즐기다 나오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로 게이들을 차별하고 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성애자들의 성적 문란함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성적 문란함이 문제이지 성적 지향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라는 전형적인 논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성애자들이 서로 즉석에서 눈이 맞으면 "그 자리에서" 즉시 짝을 바꿔가며 하룻밤 질펀하게 노는 화이트(?) 찜방 같은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요즘은 한국 사회도 성이 다 풀려서 부부들이 모여 즐기는 모임도 점점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트위터를 조금만 검색해보면 부부파트너 찾은 인간들이 줄줄이 쏟아집니다.

지금은 폐쇄된 소라 사이트의 영향으로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한국에서도 진작에 다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 성적 취향이고 행복권 추구이니 이걸 법으로 규제하고 따질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성애를 취향대로 즐기는 사람들이 블랙 찜방같은 걸 만들어 영업까지 하는 건 전 못봤습니다. 이성애자들의 문란함도 극에 달해 도진개진인 편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들이 훨씬 문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생략합니다.

또한 동성애를 옹호하는 븐들은 한국의 경우 에이즈라 불리는(HIV) 환자들 절대 다수가 남성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통계의 조작과 왜곡이라고 거품을 물면서 거부하거나 조사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합니다.

2016년 기사를 첨부합니다. <<특징적인 것은 감염인 중 남자가 92%로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령대별로는 20∼40대가 전체의 76% 정도를 차지했다. 이를 토대로 학계에서는 에이즈의 가장 큰 감염원을 MSM(Men who have Sex with Men, 남성동성애)으로 꼽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프리카의 에이즈 확산이 동성애 때문이냐고 반문합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10년 있으면서 나름 현지의 동성애 전문가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들 장례도 수차례 집행했구요.

아프리카는 아이들이 10대 초반부터 이미 문란한 성관계를 시작합니다. 이성애를 통해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거의 (제 기억에) 1/700~1/1000에 불과할 정도로 낮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놀라던데, 이건 의학적 사실입니다. 조금 줄여도 1/500정도 될 겁니다. 이성의 에이즈 환자와 성관계를 500-1000번 해야 에이즈에 걸린다는 뜻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인이되면,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 인구의 20-30%에 육박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의 너무나도 문란한 성 관계와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장기간의" 무대책의 무분별한 성 생활 때문입니다. 또한 에이즈 걸린 엄마가 애를 낳아 태생적 에이즈 환자도 매우 많구요.

결국 이건 남성 동성애 문제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 윤리의식과 성 의식의 부재로 인한 무분별, 무차별적인 성관계가 빚은 문제일 뿐이며, 남성 동성애자들의 에이즈 감염율이 몇배나 높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현재 민주당 일각과 진보정당에서 적극 "양성평등"에서 "양"자를 빼고 "성평등" 법을 추진하는 의도는 뻔합니다. 동성애와 그외 양성애를 비롯 수많은 성의 정의가 난립하는데 그걸 다 허용하자는 법률입니다.

저도 동성애자의 차별은 반대합니다. 동성애자라고 취업과 취학, 그리고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선 안될 겁니다. 그러나 저는 동성애 행위는 반대하며 동성 결혼도 또한 반대합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제가 믿는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앙에 따른 것입니다. 저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성경에서 "동성애 금지"를 교훈하고 명령하는 부분을 교묘한 성경 해석의 문제로 돌리며 성경은 중립이라는 해괴한 해석을 반대합니다.

이 부분 역시 동성애 지지하는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정직하고 솔직해졌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그들이 "한 몸"이 되어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에 부합합니다. 예수님도 이걸 확정하셨습니다. 두 남녀가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결혼이라 하신 겁니다(마 19:5)

그냥 단순하게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니 저는 동성애 행위와 동성 결혼을 반대합니다. 저는 이걸 반대하기 위해 순교할 용의도 있습니다.

혹자는 소돔과 고모라 성은 동성애로 망한 것이 아니라 폭력적 강간이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즉, 이것 역시 성적 취향이 아닌 성 폭력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교묘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어떤 교수님을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긴 하지만, 그분의 견해에는 동의를 못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롯은 두 딸을 내놓으려 했을까요? 애초에 그들은 이성애를 즐긴 자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덧붙여 소돔의 성적 타락은 아버지가 딸을 협상물로 내놓을 정도의 수준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 딸들을 거부하고 낯선 남성들을 내놓으라 합니다. 그들과 즐기고 싶다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창세기 저자는 성적 폭력성뿐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거스린 가장 파행적인 성적 행위 자체도 동시에 고발하고 있다고 봅니다. 타락의 정점에 남색이 있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소돔성 주민들 전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광경을 보고 즐기러 몰려듭니다. 모두가 낯선 남자 방문객들을 겁탈할 걸 알고 찾아온 겁니다. 이것은 집단 동성애 관음증이며 소돔 주민들도 평소에 동성애를 즐겼다는 강력한 증거라 생각합니다.

동성애 금지 규정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합니다. 동성애(남색)을 반대하는 규정은 율법으로 법제화되었습니다. 레위기 20:15의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그 어떤 대안적 해석도 거부합니다. 다른 해석들이 난무한데, 논리가 처절히 옹색할 뿐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시대적 한계 속의 율법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도 로마서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더욱 강한 어조로 일관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직한 동성애 인권 운동가들은 노골적으로 성경을 없애자고 말합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어떤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 본문들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구약과 신약 시대에 국한된 명령으로 축소합니다. 이런 해석은 애써 본문의 의미를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왜곡하는 해석과 달리 차라리 솔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신약과 구약을 함께 관통하는 계명과 교훈은 영속적인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엄중한 윤리적 금지를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는 초대 교회의 문화적 관행 쯤으로 치부하는 해석은 결국 성경을 주관적 신념에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어떤 분들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동성애를 비롯한 모든 성적 관계가 다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만큼 더 큰 가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중으로 결합된 남녀가 진정으로 목숨만큼 "서로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우리는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를 합법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키우는 동물과 진정으로 정서적인 "사랑"을 교감한다고 동물과 성관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rome
(Photo : ⓒ김경열 목사 페이스북)
▲사진은 로마의 하드리누스 황제(가운데)와 그의 아내 사비나(오른쪽)입니다. 왼쪽은 누굴까요? 그의 동성애 파트너(미동)이었던 안티누스라는 청년입니다. 하드리누스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청년 안티누스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눈물겨운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사진은 로마의 하드리누스 황제(가운데)와 그의 아내 사비나(오른쪽)입니다. 왼쪽은 누굴까요? 그의 동성애 파트너(미동)이었던 안티누스라는 청년입니다. 하드리누스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청년 안티누스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눈물겨운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티누스는 사고로 나일강에 빠져 일찍 죽습니다. 하드리누스가 그를 얼마나 슬퍼했는지 가슴이 미어질 정도입니다. 그의 도시 이름을 딴 안티노폴리스를 건설한 뒤 그를 신격화해서 숭배하게끔 할만큼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사랑인가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심판을 받을 추악한 죄로 정죄합니다. 사랑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날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이미 오래 전에 인정했습니다. 랍비들은 이 문제로 수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그들의 논쟁 과정을 충분히 공부한 편입니다. 특히 레위기 20:15의 동성애 금지 규정을 어떻게 해석할지 엄청난 토론을 벌였습니다.

결론이 나왔습니다.

1. 선천적으로 보이는 동성애 성향자들이 존재한다.
2. 이들을 정죄할 수는 없으며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3. 그러면 율법의 동성애 금지는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4. 레위기 20:15는 동성애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5. 따라서 동성 결혼도 가능하지만, 동성의 항문 성관계는 허용되어선 안된다. (결국 구강성교만 허용된다는 뜻임)

제가 알고 있는 바, 랍비들의 오랜 토론의 결론입니다. 결국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혼을 해도 항문 성교는 안된다는....(물론 남성 커플에게만 해당되었고 여성 커플은 자동으로 포함되었습니다).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논리로 유대교에서는 동성애가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됩니다. 결론은 그럼에도 항문 성교는 금지한다고 명시했지만, 과연 그것이 유효한 지침인지는 당연히 의심스럽지요. 결국 감시와 강제적 통제가 안되는 일이기에 개인의 선택에 맡겨두는 결정인 셈이라 유명무실하다고 봅니다.

이제 저의 동성애 행위와 동성 결혼 반대의 두번째 이유를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바로 랍비들이 고민했던 것과도 관련있는데, 추가적으로 다름 아닌 의료적 문제로 인해 반대합니다.

랍비들은 동성 성관계는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이유로 허용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저도 동의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유명무실한 권고일 뿐인 듯 합니다.

여기서 저는 그냥 한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며 제 주장의 논거를 뒷받침하고 싶습니다.

어떤 40대 동성애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냥 남자가 좋았다고 합니다. 이 성향은 변경 불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청소년시절부터 이미 동성 성관계를 난잡하게 하기 시작해서 40대가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평생을 두고 그 일을 후회한다 합니다.

하루에 화장실을 20번을 넘게 가야하는 현실이고, 그리고 그냥 줄줄 새어 나오기 때문에 성인 기저귀를 늘 차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현재 한국에서 이 성인 기저귀 시장이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래서 장애인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마약과도 같던 그 생활을 진작 끊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10대와 20대 동성애자들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그 생활을 청산할 것과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으면,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합니다.

그분을 만난 많은 어린 동성애자들이 충격을 받고 난잡한 성관계를 중단한다고 합니다. 40대가 되어도 동성애 성향은 여전하다. 그러나 동성 "성행위"는 내 의지로 안할 수 있다, 내 선택의 문제라면서 이건 인생이 걸린 문제니 심각히 생각하라는 겁니다.

홍석천도 TV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에 15번이 넘게 화장실을 들락거린다고... 그러나 동성애자들 중에 홍석천처럼 번듯하게 살아내는 경우는 드물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심각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홍석천씨는 중학교 때 겁탈을 당한 후, 고딩 시절 이미 300명이 넘는 남자들과 난교를 벌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홍석천씨와 진보 방송과 기자들이 동성애는 아름답다고 포장하며 이것을 확산시키는 일을 즉각 중단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성적 취향"과 "행복추구권"이라는 이름으로 동성간의 쾌락을 정당화하여 불행히도 수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을 평생 사실상의 장애인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수 기독교인은 이 40대의 동성애자 분처럼, 그럼에도 성적 취향은 바뀌지 않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분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혐오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극우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어떤 진보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와 동성애 행위를 혐오하면서 어떻게 동성애자를 사랑할 수 있냐고 말합니다. 이상합니다. 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그들을 따뜻하게 사랑하지 않는 극우적 보수 기독교인이 문제이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자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구약 여기저기에서 죄는 벌하고 죄인은 사랑하라고 여러 차례 말합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동성애 성향을 방관할 것인가? 동성애 지지자들은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반대하며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동성애 치료는 힘들긴해도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동성애자로 살아오시다 지금은 이성애자로 바뀌신 <이요나> 목사님이 계십니다. 현재 그분을 통해 수많은 분들이 동성애 성향이 치료되었습니다.

최근 어떤 극우 유투버의 영상에서 동성애자의 편지 하나를 접했습니다. 자신은 동성애자지만, 치료를 시도했음에도 잘 안되었다고 고백한 분입니다.

그런데 편지 내용에서 자신은 정통 기독교의 동성애 반대를 지지한다고 말하시더군요. 그게 성경의 가르침이며 교회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만 자신과 같은 사람을 교회에서 따뜻하게 품어주시면 좋겠다고 부탁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치 이성애자더러 평생 결혼도 성 관계도 하지말고 독신으로 살라는 요구와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는 교회가 지켜야할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 성향이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는 분들에겐 가혹한 운명이지만 더 큰 질서를 위해 받아들여만 한다고 봅니다.

가혹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것을 거부했고 저는 지금도 남녀의 결합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참고로 헨리 나우엔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털어놓으면서 평생 이 문제와 싸우며 살아왔다고 고백한 바 있지요.

교회는 동성애자들 중에는 이런 분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품어야할 것입니다.

그분들이 왜 동성애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동성애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재작년에 최종적으로 확정된 사실로 발표되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만 보더라도 그 사실이 쉽게 확인됩니다.

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적으로 100% 일치입니다. 그럼에도 한명이 동성애자인데, 다른 한명은 이성애자인 경우가 거의 일반인의 비율과 비슷합니다(약간 높긴 하지만).

따라서 원인은 유전적이 아닌, 태아나 유아기 때 어떤 자극이 발생했거나, 우리가 알수 없는 어떤 외부의 상황적 변수로 인해 발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이분들의 성적 취향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방향으로 고착되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이분들의 성향을 무작정 비난해선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하게도 이런 동성애자 말고 그냥 호기심과 쾌락을 목적으로 동성 성관계를 즐기는 분들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트위터를 살피면, 이런 성문화도 이미 광범해졌습니다. 청소년들도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걸 법으로 말릴 방법은 없습니다. 간통도 부부 사이를 깨며 새로운 행복 추구권의 발동으로 정당화되는데, 윤리적 지탄은 받을지언정 누구도 법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인들이 이런 윤리적 붕괴를 막을 요량으로 "권력"을 동원하여 억제하려는 생각과 발상 자체를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이미 초대교회 당시 로마가 그러했습니다. 현대의 성적 타락과 방종과는 비교도 안되는 성적 문란함으로 채워진 문명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힘 좀 쓰던 부자와 귀족들은 공공연히 "미동"(이쁜 10대 남자아이)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귀부인들은 공공연히 연예인같은 미남에 물건이 실한 노예를 선물로 주고 받았습니다. 공공장소에는 문란한 성관계를 묘사한 조각상과 부조들이 즐비했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으로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길거리에 이 정도까지는 아니잖습니까?

그런 타락한 사회 속에서 교회는 동성애를 신랄히 비판했고, 문란한 성관계와 음행을 절대 금지했습니다. 그것을 어기면 출교시키고 권징을 가해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지식인이라는, 기독교 진보라는 사람들이 교회도 성문제에서 다소 너그러워지자고 말합니다. 말이 그렇지 이제 교회도 성을 어느 정도 풀자, 혹은 "다 풀자"는 뜻입니다

혼전 성 관계와 동거는 엄중한 현실인데, 교회도 "시대에 맞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20대의 뜨거운 성욕을 절제만 하라고 하면 그게 현실적인 대안이냐는 겁니다.

어떤 유명한 선교 단체의 여성 간사가 고민 상담해준다면서, 자신도 남친과 성관계를 하는데 성관계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라고 익명으로 글을 올린 것도 봤습니다. 그게 본능이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팔팔한 20대 남녀가 어떻게 절제할 수 있냐고 따집니다. 신앙의 지도자인 여성 간사의 인식이 저 정도입니다.저는 36살에 늦은 결혼을 했는데, 그러면 동정을 지켰던 저는 멍청이인가요?

하긴 군대서 저는 내부반서 야동(섹섹이라 불림)도 안보니 천연 기념물이라 하더군요. 나중에는 쫄따구인 제가 앞장서서 야동을 몰아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은 일부다처였으니 그런다 쳐도, 이삭과 요셉은 평생 일부일처였습니다. 근데 야곱, 이삭, 요셉, 누구도 혼인 전에 자신의 약혼녀와는 물론 어떤 이성과도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마리아와 관계를 갖지 않았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마리아와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 했습니다. 분명 신실한 백성은 성적으로 매우 느슨했던 사회적 풍토 속에서도 혼전 순결과 동정을 지켰습니다.

이삭은 40세까지 지켰습니다. 요셉은 가장 성적 욕망이 왕성했던 20대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성적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본능을 따르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얼마든지 비밀스럽게 관계를 유지했겠죠. 본능이란 구실로 성경의 계명의 위반을 제멋대로 정당화해선 안되는 겁니다.

저는 현대보다 소돔과 고모라, 로마의 시대가 성적 순결을 지키기 더 어려운 시대였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적 순결함을 엄중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겼습니다.

교회의 감독(장로)의 자격의 일순위는 한 아내의 남편으로 성적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 3:2)

집사의 자격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일순위였습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 3:12)

교회는 교회의 거룩함을 지켜야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윤리적 의식이 달라졌으니 교회도 달라져야 한다는 거짓과 궤변에 휩쓸려가선 안됩니다.

교회는 늘 세속의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비록 우리가 암굴과 토굴에 숨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가 갈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발 부탁드리지만 교회가 완장차고 군기반장 노릇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어떤 보수 교회들이 피켓들고 동성애 반대를 그렇게 외쳐대는데도 왜 대부분 사람들은 동조하지 않고 무관심할까요?

대다수 한국 교회는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거기에 동참하지 않을까요? 무지해서요? 제발 곰곰히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길인지 다시 모색하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순수한 신념이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스스로 꽉 막힌 이미지로 무장하면서 오히려 "확장성"을 막고 있습니다.

※ 이 글은 김경열 목사(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 강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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