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사함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레위기 4:13-21, 에베소서 1:3-7, 누가복음 7:3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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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어딘가에 속하고, 소중한 존재로 대우받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두려움 가운데 가장 큰 두려움은 아마도 '단절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란,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쓸모가 없어서 남들에게 외면당하고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수치심(羞恥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수치심'이란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믿는, 몹시 고통스러운 느낌이나 경험입니다(브레네 브라운, 『수치심 권하는 사회』, 가나출판사, 2019). 단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치심 때문에 우리는 침묵하고 비밀을 깊이 감춥니다.

수치심은 '죄책감'(罪責感)과 비슷하지만 서로 다릅니다. 둘 다 자기평가에 대한 감정이지만, '나는 나쁘다'는 수치심이고 '나는 나쁜 짓을 했다'는 죄책감입니다. 수치심은 '존재'의 문제지만 죄책감은 '행동'의 문제입니다. 죄책감은 자신의 윤리관이나 가치 혹은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태도를 취할 때 생깁니다. 반면에 수치심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낄 때,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느낄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낍니다.

이런 수치심의 반대는 '공감'(共感)입니다. 공감은 타인을 진심으로 배려하면서 대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남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남을 대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힘든 상황을 남에게 털어놓았을 때 상대가 열린 마음으로 그것이 자기 일인 양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공감은 표현하면 할수록 관계가 깊어집니다. 공감의 전제조건은 '연민'(憐愍)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귀 기울일 수 있을 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연민과 공감에 의해 정죄의 수치심에서 벗어나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누린 한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7장(36-50절)에는 예수께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이 인상적인 이야기는 누가만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하지만 누가의 본문은 여러 면에서 선명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마가복음(14:3-9)과 마태복음(26:6-13) 그리고 요한복음(12:1-8)에서는 이 사건이 베다니에서 일어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에서 일어납니다. 둘째로, 마가와 마태에서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유월절을 앞두고 일어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비교적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납니다. 셋째로, 마가와 마태에서는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데, 누가에서는 이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고 입 맞춘 후 향유를 붓습니다. (요한도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넷째로, 마가와 마태에서는 식사 초대자인 시몬이 한센병 환자였는데, 누가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으로 소개합니다. (요한은 이와 매우 달리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집입니다.) 다섯째로, 마가와 마태에서는 이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낭비했으며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누가에서는 이런 언급이 전혀 없고 유일하게 이 여인이 '죄인'임을 강조합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마가와 마태 그리고 요한에서는 이 여인의 기름 부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장례와 관련이 있으나 누가에서는 그 행위가 이 여인의 '사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누가에서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빚진 자에 대한 비유(7:41-43)가 이 이야기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의 본문을 찬찬히 읽다보면, 혹시 누가가 그림을 그리는 미술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이야기가 생생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장면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 뜰 안입니다. 당시 유복한 사람들의 집들은 가운데에 오목하게 활짝 트인 뜰을 끼고 사방으로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흔히 이 마당에는 화원과 우물이 있었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기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런 집에 랍비가 초대되면 함께 식사를 할 때에 여러 계급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옥같은 지혜의 말씀을 듣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여성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설명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의 집에 어떤 손님을 초대할 때에는 언제나 세 가지 일이 행해졌습니다. 우선 집 주인은 자기 손을 손님의 어깨에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뜻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랍비의 경우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둘째는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당시 길이라고는 먼지투성이인 땅에서, 더욱이 신발이라고는 밑창만 있는 것을 발에 끈으로 묶고 다녔으니, 청결과 피로회복을 위해 시원한 물을 발 위에 부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향내가 좋은 약간의 향료를 분향하든가 아니면 감람유나 장미향 한 방울을 손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당연히 해야 하는 예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초대자 시몬은 이 중 단 한 가지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시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과 적대관계에 있다고 알려진 바리새인이 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을까요? 세 가지 추리가 가능합니다. 첫째로,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모두 예수님의 적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헤롯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고 예수님께 조용히 알려주는 어떤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누가 13:31).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존경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손님에 대한 예의가 없는 분위기가 그걸 반증합니다. 둘째로, 시몬은 예수를 고소할 근거를 찾으려 일부러 예수님을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몬은 예수님을 '랍비'(선생)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 이것이 가장 가능한 추론인데 - 시몬은 명사(名士)들을 초대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은 호의, 반은 멸시하는 태도로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보였겠지요. 그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세 가지 예절을 다 생략한 것을 보면 이것이 가장 잘 설명이 되는 추론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네 복음서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이 여인을 '죄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누가는 이 여인을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37절)라고 소개하고, 본문에서 시몬도 그 여인을 "죄인"(39절)이라 속으로 말하며, 예수님은 자신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을 향해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라고 말씀하시고 한 번 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른 모든 복음서가 이 여인을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십자가 죽음과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라고 소개하는 것과 달리, 누가복음서는 이 여인을 "사랑함이 많음"으로 인해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어 사함과 구원을 받은 여인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은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을까요? 왜 누가만 유독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고 강조하는 걸까요?

그동안 많은 주석가들과 설교자들이 이 여인을 '창녀'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 어디에서도 그 여인의 '부도덕한 행위'가 용서를 받았다고 보도하지 않습니다. 누가의 본문을 잘 보시면, 이 여인은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행동'을 보시고 그 여인의 죄를 사하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38절)은 이유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사랑함이 많음"(47절) 때문이었습니다. '참회'가 아니라 '사랑'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랑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현재 '완료' 수동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용서를 비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받은 용서를 감사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얼마나 울었으면 예수님의 발을 다 적실 정도였겠습니까? 하염없이 흐른 그 여인의 눈물은 이미 받은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 여인의 '행동'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라고 구원과 평화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존재에 대한 용납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사함을 받은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었습니다. 죄책감은 '행동'의 문제이지만, 수치심은 '존재'의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나쁜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지만, '나는 나쁘다'는 수치심이라 말씀드렸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 여인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에 떠는 '죄인'이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sin)는 단수입니다. 그것은 '죄들'(sins)처럼 복수형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어떤 비도덕적 행위가 아닙니다. '죄'라는 단어는 "따로 떨어져"(asunder)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분리'(separation)를 의미합니다. "죄는 곧 분리입니다"(폴 틸리히, 『흔들리는 터전』[뉴라이프, 2008]). 나와 나의 분리, 나와 이웃의 분리, 나(우리)와 하나님의 분리,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죄는 어떤 '행위'이기 이전에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계십니까?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해 거룩한 자로 살려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바르게, 종교적으로 신앙의 규례를 철저히 지키며 살려 했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다른 모든 '죄인'들과 자신들을 분리해 성결한 '의인'으로 살려 했습니다. 시몬이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죄인'이라 불리며 멸시 당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와 창녀였습니다. 그들은 부당한 권력자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비천한 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정결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죄인이라는 '사회적/종교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했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고, 소중한 존재로 대우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 즉 '단절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들입니다. '수치심'에 떨었던 사람들입니다. 수치심이란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믿는, 몹시 고통스러운 느낌이나 경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졌습니다. 업신여김을 받았기에 있으나 없는 것과 같은 존재로, 무존재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 6:20-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 2:17, 마태 9:13, 누가 5:32)라고 말씀하시며 이른바 '의인'을 자처하는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소위 '죄인'으로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품어주셨습니다. 바로 그런 죄인들에게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만 보아도, 예수님은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그에게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누가 5:20)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죄인'으로 나타나는 어부 베드로와 세리 레위와 열심당원 시몬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누가 5:7, 27, 6:15). 게다가 예수님은 당시 이방인과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이나 한센병 환자나 세리가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포합니다(누가 10:25-37, 18:9-14). 사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른바 '죄 많은 여인'을 향해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은 누가가 전한 복음의 전체 맥락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집 주인 시몬은 예수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붓는 여인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39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들으신 예수님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라고 정색을 하시며 갑자기 '두 빚진 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은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절). 당연히 많은 탕감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시몬도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답하니,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절).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절).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다시 펼쳐 읽어보곤 합니다. 살면서 외로울 때,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 때,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경험할 때 제가 다시 펼쳐 들고 위로받는 구절이 바로 이 누가복음 7장 47절 말씀입니다. 복음의 진수입니다. 구절 외우기도 쉽습니다. '누가 747.'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He who has been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공동번역 성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라고 번역합니다. 새번역은,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씀은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일 겁니다. 용서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용납되고 받아들여진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씀일 겁니다. 저는 그것을 경험을 통해서 압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환영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에 평생 시달린다고 합니다. 혹 여러분 안에 아직 이런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아픔'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노력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 주(主)정서인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건 수치심을 강요하는 일이 된다고 합니다. 몸에 대해서, 용모에 대해서, 혹은 성공에 대해서 세상이 정한 기준은 우리에게 수치심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종류의 수치심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수치심을 가르칩니다. 남들과 어울리려면, 관계에서 단절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정해줍니다. 그리고 거기에 잘 따르지 못했을 때 '정죄'합니다. '너의 잘못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고 있다고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개적으로 일러줍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침묵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내가 무가치하다고 여기며 한없는 무기력에 빠져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로마서 7:23) 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는 바울의 한탄은 사실 모든 인간의 한탄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식이 있습니다. 오늘 교독한 시편 19편에는 우리가 노래로도 만들어 부르는 한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복음성가로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라는 노랫말로 불립니다. 여기서 '열납되다'(be acceptable)라는 말의 히브리어 어원(ratsown)을 찾아보니 그 말의 뜻이 너무도 좋습니다. 그 말은 '기쁘게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혹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받아들여진 경험은 햇볕과도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말과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 의해 기쁘게 받아들여질 때 나의 영혼은 춤추고 나의 마음을 해방되어 푸른 하늘을 납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면 뇌에서 객관적 현실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되고, 제3의 눈이 열려 지혜롭게 행동한다"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생명보호 시스템을 타고 나는데, 주변 상황으로부터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불안감, 흥분, 경계심으로 경직, 공격성, 실수 반복, 우울, 무기력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반면, 반면 자신이 받아들여졌다고 느끼면 안정적이고 평안한 상태가 되고 자신도 알지 못하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디 저만의 경험이겠습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기도를, 우리를 마음을 '열납'하십니다. 무엇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무엇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내 모습 이대로 그냥 좋아하시고 받아주십니다. 폴 틸리히는, "기독교의 복음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받아주셨다는 이 한마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용납되었습니다. 열납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거부된 것의 용납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를 엄습합니다. 은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시에 찾아오는 것, 즉 '엄습'(掩襲)하는 겁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서 5:20)라고 했습니다. 정죄로 단절의 공포가 가득한 곳에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엄습합니다. 내가 무기력과 무의미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엄습합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고독할 때 그 은혜가 엄습합니다. 내가 갈망하던 삶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아 절망이 나를 억누를 때 그 은혜가 엄습합니다.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그 은혜가 나를 엄습합니다. '너는 용납되었다'고, '너는 열납되었다'고, '너는 너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선포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을 용납하게 됩니다. 자신을 용서하게 됩니다. 자신의 아픔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많이 탕감받았기에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되었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그 여인처럼, 우리도 사함의 은총을 많이 받았기에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사함의 은총, 받아들여짐의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용납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열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정죄와 단절의 두려움, 수치심의 고통으로부터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연민이 많으신 분입니다.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헤미야 9:17)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로마서 8: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로마서 8:33-34, 37-39)라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서 모두가 '죄인'처럼 정죄받아 단절의 두려움에 떠는 이 세상을 비추는 환한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내가 미워지고 원망스러울 때마다, 내 모습 이대로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오늘도 많이 '사함' 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함'은 곧 '자유롭게 함'(누가 4:18-19)입니다. 사함을 많이 받았기에 모든 정죄와 단절의 두려움과 수치심에서 해방되어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그 여인처럼 '사랑함이 많은'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사함'과 '사랑함,' 그 둘은 영원히 서로에게 회귀하며 우리를 구원하는 신비의 한 짝입니다. (20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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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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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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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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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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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