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레위기 25장 35-43절, 시편 131편 1-3절, 고린도전서 14장 26-33a절

[어느 날 아침의 경험]

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자명종 소리를 맞춰 놓지 않아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럼에도 또 혹시 몰라서 늘 손 전화에 알람 설정을 해 놓습니다. 지난 화요일 오전에도 어김없이 5시에 일어나라고 따르릉 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미 깨어 있었지만 소리를 끄려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갑자기 방안이 뱅글뱅글 돌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옆으로 몸이 기울면서 옷장에 부딪쳤습니다. 제게는 처음 있는 일이어서, 요즘 무리했나 생각을 했습니다. 알림 소리를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여전히 천정이 빙그르르 도는 것이었습니다. 좀 쉬면 낫겠지 했는데, 별 차도가 없고, 발이 땅바닥에 붙어 있지 않고 약간 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라, 얼른 인터넷에 어지럼증에 대해 검색을 했습니다.

검색을 해 보니, 어지럼증에 대해서 다양한 분석과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원인으로 딱 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대체로 이석증과 같은 말초성 질환의 경우와 뇌에 이상이 있는 중추 신경계 질환, 또 심혈관계를 포함하여 내과적 질환의 영향으로 현기증이 발생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면 자극적인 제목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지럼증 호소 뒤 뇌종양 판정? 얕봤다가 큰 코 닥치는 어지럼증!"과 같은 제목을 단 글도 있습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갑자기 두려움이 들지요. '혹시 뇌에 문제가 있나?' 생각은 갑자기 비약을 합니다. '만약 내가 뇌종양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생명사랑교회도 그렇고 내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두려움이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더 해보니, 제게 찾아온 어지럼증은 이석증일 확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의사가 아니기에 천철우 집사에게 전화해서 제 상황을 설명하였더니,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동작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동작을 몇 차례 반복했더니 어지럼증이 정말로 한결 덜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코로나 19의 상황도 두려움을 유발하게 하는 계기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두려움'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며, 두려움은 꼭 나쁘고 피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 되면서 우리 국민들의 불안 지수가 높아졌고, 최근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집단감염이 계속 되고 있어서 시민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기에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좀 덜 힘들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경험을 예상했을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불안한 감정인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눠 보자면 공포와 불안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포는 자신을 위협하는 특정 대상이나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 되어 그 대상이 지각되었을 때 생기는 감정적 반응입니다. 길을 가는데 갑자기 뱀이 나타났다든지, 목줄 풀린 개가 달려온다든지 하면 무섭지요. 미처 예측하지 못했는데, 우리에게 닥쳐온 불쾌하고도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나 힘을 맞닥뜨리게 될 때는 공포를 느끼며 온 몸이 경직되고 종종 이성이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위협의 대상이 사라지면 공포심도 빠르게 없어집니다.

불안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대상이 불확실하고, 뭔가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미래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추측이나 생각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을 때, 취직은 안 되고 나의 앞날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어지럼증을 느끼며 몸이 기우뚱했을 때도, 이런 현상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기에 저 또한 잠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공포와 불안처럼 우리의 생존이나 삶을 위협하는 것에 대하여 느끼는 두려움은 실제로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해 마련된 자연스런 몸의 반응입니다.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해도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면 실제로 죽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대책을 마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포나 불안을 매우 쉽게 알아차리도록 진화되어 왔습니다. 위험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빨리 대처하기 위함이지요. 과거에 뱀에 물려 고생한 사람은 뱀 사진만 보아도 금방 몸이 반응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즉 죽음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또 우리는 자신의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갇히거나 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지닙니다. 폐소공포증이 이런 종류의 하나인데, 엘리베이터나 비행기 등 좁은 공간에서 크게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또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서 몸이 장애를 갖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곤충이나 짐승들을 보고 유독 두려움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가 끊어져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만약 우리가 버려지거나 무시를 당하면 매우 큰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안정감을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하루하루의 삶이 정해진 일과에 따라 진행되지 않고 뒤죽박죽이라면 사람은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을 잘 정돈해 줄 권위 있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위험의 대상을 알 수 있는 공포가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불안한 상황들이 반복되면 불안장애나 공황장애, 광장공포증, 특정 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병으로 비화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 포경선 엑세스호 선원들 이야기]

미국에서 처음으로 네 번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해야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말인데,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은 보통 '두려움 그 자체'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은 다소 어색하게 들리지만 여러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를 경험했던 우리들은 낯선 모임에 초대를 받거나, 어색한 자리에는 잘 가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두려웠던 기억들 때문에 그 두려움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도 피하고, 미루게 됩니다. 어떤 때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을 느낄 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실제 벌어진 것과 상관없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이야기는 과장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합니다.

1819년의 어느 날, 칠레 해변에서 3,000마일 떨어진,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에서 한 척의 배가 향유고래와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20명의 미국인 선원들은 그들의 배에 바닷물이 차오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할 때, 세 대의 작은 구조선을 내리고 각각 거기에 나누어 탔습니다. 이 사람들은 집으로부터 10,000마일 떨어져 있었고, 가장 가까운 육지로부터 1,000마일 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작은 배 안에서 그들은 그저 가장 기본적인 항해 장비만 가지고 있었고, 남은 물과 음식은 조금 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뒤집힌 지 하루가 꼬박 지났고,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몇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 선원들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섬이 1,200마일 떨어져 있는 마르키즈 제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섬들과 근처의 몇몇 섬에는 식인종이 살고 있다는 끔찍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섬에 상륙한다면 자신들이 살해되어 저녁 식사로 잡아먹히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또 다른 도착지 후보는 하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계절을 고려한 선장은 폭풍우를 만날 것을 염려 했습니다. 마지막 선택은 그들을 남아메리카의 해변으로 보내 줄 바람을 만나길 바라면서 정남쪽으로 1,500마일을 항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항해의 길이는 남은 음식과 물을 아껴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선원들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식인종은 너무나 위협적이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섬은 포기했습니다. 대신에 더 멀고, 훨씬 더 어려운 항로인 남아메리카로 출발하였습니다. 바다에서 두 달 이상을 보내고 나자, 그들이 예상했듯이 식량은 고갈되었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들이 지나가는 두 대의 배에 구조되었을 때, 선원들 중 반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생존해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먹는 식인 행위에 의존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이들은 굶어 죽는 것보다 식인종들을 훨씬 더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왜 이들은 한 쪽 이야기에 훨씬 더 동요되었던 것일까요? 식인종에게 잡아먹히는 것, 폭풍에 난파당하는 것, 그리고 육지에 도달하기 전에 굶어 죽는 것. 이 세 가지는 모두다 선원들의 상상력 안에 맴돌던 두려움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두려움들 중에 첫 번째 것, 식인종 이야기는 그저 소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확인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 육지로 가는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지난 항해의 경험상 식량의 고갈은 곧 닥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난파선을 떠난 선원들은 처음에는 가장 가까운 타히티 섬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지만, 섬에 살고 있다는 식인종과 관련된 잘못된 정보가 이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고, 결국 선원들의 합리적 사고를 막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우리들의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하나의 소중한 정보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버린다면 우리는 소중한 정보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하고 잘 파악하고 있다면, 오히려 우리는 이 두려움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고,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판단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몸살을 앓고 있고,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코로나 19는 계속 확산세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보면 실제로 현재 확진자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일만명이 넘는 사람이 완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망자를 생각해 보면 교통사고나 그밖에 다른 일으로 다치거나 사망하게 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적은 확률일 것입니다. 코로나 19의 빠르고 광범위한 감염력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해야 하지만, 과도한 두려움과 불안은 코로나 19로 인해서 변화하는 세상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위기의 순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의 정체를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위기에서 벗어나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젖을 뗀 아기가 엄마 품에서 안겨 있듯 자신의 영혼도 그러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신앙의 백성들에게 조언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시인이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에 이르기 전에 그는 매우 혼란하고 부산스런 삶을 지낸 것 같습니다. 1절을 보면 그는 분에 넘치는 일을 이루려고 분주하게 지냈고, 큰 것을 가져보고자 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모두가 주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한 마음과 만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일상의 평온을 누리지 못한 것처럼, 오늘 시인은 교만과 오만 때문에,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큰 것을 추구하며 분에 넘치는 일에 함부로 나섰기 때문에 오히려 평온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온갖 일을 겪으면서 공포와 불안에 빠지지 않으려면, 차분한 삶과 고요한 평온을 누리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에 대해서 잘 파악해야 합니다. 자신의 깜냥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남을 돕고, 또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돕는 방법을 알고 서로 도울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당부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은사를 지닌 교인들이 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삶의 경험도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다르고 교회에서 꿈꾸는 비전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름이 함께 모여 일을 할 때에는 서로에게 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특별히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통역이 없어서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하면 침묵하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기준은 소통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서려면,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면 제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말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하고 자기하고만 말하면 되지, 교회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과 비교되는 예언은 뜻을 알 수 있는 교회에 덕이 되는 말입니다. 각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얻은 통찰과 깨달음을 가지고 함께 의논하는 자리가 예언의 자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얘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각을 주시면 그 사람 말을 경청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한 마디씩 하게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모두가 배우고, 권면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코로나 19는 지금 교회 공동체에게 큰 도전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이전과는 다른 목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생명사랑 신앙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레위기의 말씀에서 저는 그 답을 찾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내리시면서 가난한 사람,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이익도 남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종으로 팔려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일을 시키되 종 부리듯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종으로 이방인에게 팔아 넘겨서도 안 되고, 희년이 되면 다시 자유의 몸이 되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저는 코로나 19가 장기화될 경우 우리가 겪게 될 근본적 어려움은 경제불황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우들의 삶 전체가 이전보다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면 그 때를 지금부터 준비해서 우리 교우들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만의 능력과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능력이 때를 잘 만나면 남들보다 많은 것을 해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능력을 발휘해서 서로 필요한 곳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오프라인 교회활동 못지않게, 온라인 활동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기에, 지금 우리 교역자들은 온라인 목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 꽤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모든 수고가 우리 교단의 목사후보생을 돕고, 그들이 목회에 대한 꿈을 펼쳐나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더 노력해서 유무상통하던 초기 공동체처럼 구제비와 생활지원비 등을 잘 비축해 놓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부활절에 전교인 생활지원금을 통해 우리 삶에 작은 활력이 되었듯이, 앞으로 우리가 삶을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면모를 더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레위기의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 두려운 줄 안다면 동족을 곁에 데리고 함께 살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때,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들이 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엄중히 받들면 그 어떤 위기에서도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오직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나머지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십시오.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그 두려움을 통해서 나 자신의 믿음과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더욱 깊은 신앙과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면 하나님 외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고 신앙공동체 식구들을 챙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활약하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한 하나님!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모든 지혜의 근원임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굳건한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능력을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데 사용하게 하여 주소서. 때때로 세상살이에 지치고, 더러운 얼룩이 묻고, 쓰러지고 넘어질 때에도, 살아 계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닿아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영원하시며, 언제 어디서나 사랑과 지혜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방황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반항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할 사람들을 주시고, 아름다움은 누리게 하시며, 고요히 머물 장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삶의 놀라운 선물들, 우리가 배운 진리와 성취할 수 있던 선한 일들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받은 천국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바쁜 세상에서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며,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으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온전히 하나님만 경외하며 두려움 없이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고, 평온함과 고요함을 유지하십시오.

*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람이 되어 여러분을 주님 곁으로 데려가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의 힘이 되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생명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전능하신 주님,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원히 여러분 곁에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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