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아모스 5:4-8, 골로새서 3:1-4, 누가복음 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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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지난주일 예배 후 계단 아래서 환송할 때 한 교우께서 저에게 쪽지 한 장 내밀고 총총히 사라지셨습니다. 여러 번 접은 편지였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로나 19에, 폭염에, 여러 가지 위태하고 불안한 이슈들로 가득한 상황에서도 오랜만에 교회에, 학교에 간다는 생각으로 설레는 토요일 밤에, 목사님께 안부 전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한글 '양재벨라체'로 타이핑한 반듯한 편지였습니다. "우선 기쁜 소식 전하면, 회사에서 진급을 했습니다. 동기들에 비해 늦은 편에 속하지만, 입사해 근무하는 동안 녹록치 않은 현실과 스스로의 한계에 일상적으로 마주한 저로서는 ... 제가 속한 조직에 일말의 신뢰가 생기는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축하하는 마음과 함께, 저는 이 교우께서 얼마나 어렵게 직장 생활을 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진급을 하고, 정말 어렵게, 한 사람 몫의 업무가 온전하게 주어졌는데, 저는 새로 입사한 것처럼 서툴기만 한 시간을 보내면서 목사님이 작년 여름, '선한 싸움'의 제목으로 설교하신 목소리를 밤마다 듣고, '선한 싸움 싸우고, 달려갈 길 마치고, 약속을 지켰다'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말을 되뇌며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쓰러지고 싶은 순간에 1회전을 더 버틸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쓰러지고 싶은 순간순간에, 저는 또 1회전을 더 버티겠습니다." 이 편지를 덮는 순간, 저는 다음 주일에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바로 알았습니다.

한 전문 산악인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이 조난당한 현장에서 죽는 경우는 퍽 드물어요. 대부분 마을 가까이 내려와서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조난당한 사람은 자기가 마을 인근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요.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림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은 '조난을 당해서 버티다가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30분만 더 버티라'고 가르칩니다"(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30분만 더 버텨라"는 말은 쓰러지고 싶은 순간에 1회전을 더 버티라는 말과 같은 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30분'이란 시간의 단위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더 참고 견뎌보라는 인내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중도에서 포기할 만큼 힘든 상황이라도 '기다림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인내라는 용기'를 가지고 더욱더 노력해보라는 뜻입니다.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도 어쩌면 무거운 짐을 지고 먼 사막의 길을 가는 낙타의 일생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여기까지 걸어왔으면서도 마지막 깃털같이 가벼운 짐 하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물론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를 참지 못했다는 것은 그동안 그것을 참지 못할 정도로 있는 힘을 다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깃털같이 가벼운 짐이지만 지금까지 참고 견뎌온 무게보다 수천 배 더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더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합니다(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태풍이 불어와도 나뭇가지가 꺾였으면 꺾였지 새들의 집이 부서지지 않습니다(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성경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은 가끔 인간에게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원망하며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고,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주춧돌 삼아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신이 던진 돌멩이에 맞은 인간은 참으로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그 고통을 견디고 이기면 인생의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이사야 40장)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31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찬송가로도 만들어져 애창되고 있습니다(354장, 주를 앙모하는 자).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다'라는 말은 '오직 여호와를 믿고 바란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성서의 기자(記者)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 것을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고 비유했을까요? 독수리가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하늘의 제왕'이라는 독수리는 평균 수명이 인간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30년 좀 넘게 살게 되면 무뎌진 부리가 자라 목을 찌르고 날개의 깃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한다고 합니다. 날카롭게 자란 발톱마저 살 속을 파고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때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태어날 것인가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새 삶을 선택한다면 이때부터 6개월 정도 먹는 것도 포기하고 힘든 과정을 견뎌내야 합니다. 높은 산정에 둥지를 틀고 암벽에 수도 없이 부리를 쳐 깨뜨리고 다시 새 부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새 부리가 나면 오래된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 부리로 낡은 깃털도 다 뽑아내고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때 독수리의 몸은 피범벅이 됩니다. 그런데도 독수리는 그 고통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을 갱신하고 새 삶의 문을 엽니다(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이사야 40:28)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도 말할 때, 성서의 기자는 바로 이런 독수리의 삶을 오래 관찰하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동경'해야 합니다. <어린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무한한 바다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동경'(憧憬)이 무엇입니까? 동경이란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해서 그것만을 생각함'입니다. 아이들에게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 마십시오. 저 무한한 바다를 동경하게 하십시오. 스스로 배를 만들 것입니다. 공부하라 다그치지 마십시오. 새로운 멋진 세계를 상상하고 동경하게 하십시오. 스스로 책상 앞에 앉을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또 "마음으로 보아야만 분명하게 볼 수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이라고 말했지요. 우리는 마음으로 저 넓은 바다와 저 높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동경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그분만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여호와를 앙망하고 동경하는 자는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를 힘차게 헤쳐나갈 튼튼하고 안전한 배를 만들 것입니다.

언젠가 들은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전 두 한국 세일즈맨이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습니다. 목적은 신발을 수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서 보니 기가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사람은 모두가 신발을 신지 않고 그냥 맨발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그곳을 답사한 다음 각각 본사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보고입니다. '신발 수출 불가. 아무도 신발을 신고 살지 않음.' 이것은 사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의 보고는 조금 달랐습니다. '여기는 황금시장. 가능성 백 퍼센트. 전원 맨발임.' 참으로 큰 시각의 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문제를 앞에 놓고 어쩌면 이렇게 그것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자세가 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사막을 단지 사막이라고 보는 현실적인 눈과 사막을 황금시장으로 보는 이상적인 눈의 차이는 분명 하늘과 땅 차이의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갈등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상주의는 현재보다 미래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장래의 소망을 위해 지금의 고통을 견디려 합니다. 현실주의는 현재의 일을 더 소중히 여기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생일날 잘 먹자고 이레씩 굶을 수는 없다"라는 말이 바로 현실주의의 대표적인 말입니다. 또 이상주의는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깁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것이 정신적인 빈곤을 상쇄하지는 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주의는 물질적인 기초가 마련되어야 비로소 정신적 가치도 고양된다고 믿습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지"라는 옛 속담이 그런 입장을 잘 대변합니다. 또 이상주의는 가능한 인간의 욕망을 줄여서 절제하고 자족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현실주의는 인간의 욕망은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충족시켜서 더 큰 성장의 동력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입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어느 편이 완전히 옳고 어느 편이 완전히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의미 있는 진보와 발전을 가져온 것은 땅만 보고 살았던 때가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현실에 집착해서 살았던 때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넓은 바다와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던 이상주의의 시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의 높이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로 인한 진보와 발전의 크기도 그만큼 높았습니다. 사람은 두 발로 일어서서 머리를 위로 향해 걷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살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시인 윤동주가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사실 성경도 수없이 "너희 눈을 들라"고 말합니다. 땅의 것만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합니다. 땅의 지평선이 아니라 천상의 지평선에 눈을 맞추라고 말합니다. 시편 121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서이다"(1-2절)라고 노래합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이 그 산에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즉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높은 곳을 바라보며 동경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인간이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그리워하며 삽니다. 문제는 하늘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은 것은 누구라 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행동은 실제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념과 믿음 속에서 행동이 되지 않은 이상은 죽은 이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 지치게 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이른바 '희망 고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천이 없는 이상은 곧 우리의 무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꿈과 이상을 가진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이상과 꿈을 추진해 나가는 신념과 행동입니다. 성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말합니다. '실상'(實狀)이 무엇입니까? '실제의 상황'입니다.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들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이루어지고 있는 실제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보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눈앞의 '실제상황'으로 보게 만드는 마음의 눈,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말씀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아모스 5:6)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아모스 5:8)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마태 7: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라고 권면합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새번역)하라는 말입니다. "천상의 것들을 추구"(공동번역)하라는 말입니다. '추구(追求)하다'라는 말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뒤쫓아 구함'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trive for"입니다. 영어에서 이 단어는 매우 적극적인 동사입니다. '노력하다,' '애쓰다,' '힘쓰다,' '분발하다,' '분투하다,' '다투다,' '싸우다,' '맞서다'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즉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라는 말씀은 가만히 앉아서 위의 것을 동경하고만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감히 첫발을 내딛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그것을 실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꿈과 이상을 향해,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노력하고, 애쓰고, 힘쓰고, 분발하고, 분투하고, 다투고, 싸우고, 맞서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되었다는 말은 단지 약속에 대한 꿈과 이상을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추구해 나갈 믿음, 즉 신념과 끈기와 실천력을 가졌다는 말이 됩니다. 행동 없는 신앙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디모데 4:7)라고 말하면서 디모데도 "선한 싸움을 싸우라"(디모데 1:18)고 권면합니다. 디모데를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디모데 6:11-12)라고 당부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선한 싸움'입니다. 영생은 '취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디모데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로마서 12:9), 그리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21)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라' 했습니다. 미워하라의 어원 '아포스튀게오'(apostugeo)는 매우 적극적인 동사입니다. 악을 '질색하라,' '혐오하라,' '증오하라'라는 의미입니다. 또 악을 '이기라' 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인 '니카오'(nikao) 역시 매우 적극적인 동사입니다. '정복하라,' '격파하라,' '승리자가 되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악을 이렇게 철저히 미워하며, 악이 아니라 선으로 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단호하게 악을 반대하는 편에 서서 악과 싸우지 않는다면 주기도문을 드릴 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구절을 빼고 드려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믿는 것을 향해 '싸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입니다. 믿음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희망입니다. 박선옥 시인은 <그리움은 힘이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하고 또 소망하라 / 주저앉으면 까마득히 높아지는 하늘 / 일어서면 성큼 다가서는 하늘 / 그 작은 차이가 믿음이다." 주저앉아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일어서서 하늘로 성큼 다가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저앉음과 일어섬의 '그 작은 차이'가 바로 믿음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위에 있는 것들'은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이어령 선생님은 이 지구상에서 사탕을 깨물어 먹는 민족은 한국인 외에는 없다고 했는데, 이제는 이것이 더 이상 사실이 아니길 바랍니다. 성격이 급한 한국인들이 가장 참기 힘들어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첫째는 인터넷 속도를 모뎀 시절인 128kb로 줄이는 거라고 합니다. 둘째는, 버스가 완전히 정차한 후에 일어나 내리는 거라고 합니다. 셋째는, 엘리베이터의 닫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하는 거라고 합니다.

옛날 중국의 산둥성에 한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의 집 맞은편에 커다란 동산이 시야를 가로막아 이 노인은 매우 답답하게 느꼈습니다. 노인은 그 동산을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불러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동산을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마음의 친구가 지나가다 말했습니다. '자네 미쳤군! 언제 이 큰 산을 곡괭이와 삽으로 옮긴단 말인가? 제발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게.' 그러자 노인이 답합니다. '아닐세. 내가 죽는 날까지 파다가 다 못하면 내 자식들이 할 것이고, 내 자식들이 다 못하면 그 자식의 자식들이 할 것이고, 그들도 다 못하면 또 그들의 자식들이 할 것 아닌가. 그렇게 파다보면 언젠가 이 동산이 옮겨질 것이 아닌가!' 이것이 그 유명한 중국의 '만만디'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뚝심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저력입니다. 모든 것이 과속이지만 이 시대에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느림의 미학'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지치지 않을 줄 아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노인이 결국엔 그 산을 옮겼다가 아니라, 그 노인은 자신의 꿈을 이미 현실로 맛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커다란 산을 옮겨버리겠다는 소망은 이미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실상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꿈과 이상은 우리의 인생 맨 끝에 가서야 정복되는, 다가가면 언제나 도망가는 저 먼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상은,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요 과정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이미 현실이어야 합니다. 저 높은 삶을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미리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찬양대가 부른, 우리가 사랑하는 한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化)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를 비교하면 이 말이 쉽게 이해됩니다. 수도원과 감옥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 안에 사는 수도사나 죄수의 삶은 외형상 별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엄격한 규율과 제한 속에 갇혀 삽니다. 그런데 감옥은 '타의에 의한 절망'의 시간이고, 수도원은 '자의에 의한 소망'의 시간입니다. 죄수들에게 출옥은 미리 맛볼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수도사들에게 경건과 절제와 기도와 노동의 힘든 순간들은 그들의 높은 이상을 매번 지금 여기서 맛보게 하는 기쁨과 희열의 순간들인 것입니다. 천국의 시간들인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높은 이상을 가지십시오. 나이가 들수록 이상은 더 높아져야 합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발은 이 땅에 굳건히 두시기 바랍니다. 그 발로 첫 걸음을 내딛고 높은 이상을 향해 날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소망을 향해 노력하고, 애쓰고, 힘쓰고, 분발하고, 분투하시기 바랍니다. 행동 속에서 여러분의 꿈을 실현하시는 신앙인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서두르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이상과 소망을 여러분의 매일의 삶에서 미리 맛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주일 저에게 쪽지를 남기신 교우님은 편지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신] 신앙은, 막연하게 구원을 꿈꾸거나, 유토피아를 말하거나, 그저 신의 뜻이 있음을 추상적으로 좇는 신앙이 아니라, 녹록치 않은 이 땅에서,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어주고, 겉옷을 벗어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모양으로 저항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진 기독교적 가치를 선택하고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3년, 대학교회에서의 저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드린 것 같아, 편지를 닫고 많이 울었습니다. 편지를 보내신 교우님,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 턱 내십시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가 어떤 향수인지 아십니까? 발칸산맥에서 나오는 장미 향수입니다. 그런데 이 장미를 가꾸는 농부들은 한밤중에, 그것도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인 자정에서 새벽 2시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향기도 가장 극심한 고통 중에 피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절망과 고통의 밤에 비로소 별빛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 쓰러지고 싶은 순간입니까? 1회전만 더 버티십시오. 지금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습니까? 버티다가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30분만 더 버티십시오.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고 하지요.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과 약속을 진실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명기 31:6)고 성서가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참 의지합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누가 7:8)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이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5)고 노래했습니다. 저도 날마다 이 노래를 부르려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골로새서 3:1, 새번역).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공동번역).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십시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나아가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할 것입니다(이사야 40:31). 아멘.

기도합시다. 주님, 지쳐 주저앉았습니다. 손잡아 일으켜 주소서. 주님, 그만 여기서 멈추고 싶었습니다. 등 두드려 일으켜 주소서. 내가 절망할 때 나의 소망이 되어주시고, 내가 포기할 때 나의 능력이 되어주소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걷겠습니다. 다시 일어나 당신의 높은 하늘을 날겠습니다. 내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나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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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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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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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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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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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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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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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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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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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