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내게로 와서 쉬라"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입력 Jul 13, 2020 06:51 AM KST

- 신명기 5:12-15, 로마서 8:26-28, 마태복음 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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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앓고 있는 흔한 병 한 가지가 있습니다. '강박적 신경증'이라는 겁니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이거나 충동적인 집착에 휩싸여,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심한 정신적 불안이나 우울을 보이는 증세를 말합니다.

50대 중반 이모 씨의 경우입니다. 그는 한때 일에 대한 심한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 겪은 불쾌한 경험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딱 한 번 숙제를 못 해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는데, 그분의 이 한 마디가 어린아이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우등생에다 반장이라는 자식이...." 다른 학생들의 눈에 조롱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무너진 자존심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사실 그는 다른 선생님의 심부름 때문에 숙제를 못 해갔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억울함을 삭였습니다. 문제는 이날 이후부터였습니다. 그 뒤 이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을 다했는지에 대한 강박적 신경증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한 일과 내일 할 일, 그리고 일주일 안에 할 일 등을 몇 번씩 확인한 뒤에도 잠자리에 들고나면 왠지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무언가를 꼭 빼먹은 느낌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숙제 강박증'은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성적에 대한 집착증'으로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명문대학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학교에서는 유학을 권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선택했습니다. 이제는 성적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숙제-성적 강박증'은 직장에서 곧바로 '일 강박증'으로 이어졌습니다.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고단한 직장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저 사람 너무 튄다'라는 이야기도 들려왔지만 대신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판(評判)을 위로 삼아 직장생활을 꾸려갔습니다. 그러나 취직한 지 2년 만에 결국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강박증은 심한 우울증과 정서적 불안증세로 발전했습니다. 오랫동안 속에서 곪고 있던 상처가 드디어 터진 것입니다.

이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불확실성과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사는 많은 현대인이 강박으로 인한 여러 증후군을 겪고 있습니다. '휴일 증후군'은 여가문화가 발달하면서 몸은 공원에 나가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일에 짓눌려 도리어 마음이 더욱 불안해지는 증상입니다. '다이어트 증후군'은 맛있는 음식이 지천에 널렸으나 절제를 통해 날씬함과 민첩성을 유지해야만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표현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많이 앓고 있는 '속도 증후군'은 컴퓨터 실력은 문서 작성이나 겨우 하면서 성능과 속도가 개선된 컴퓨터가 나올 때마다 새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해지는 증상입니다. 자동차나 가전제품의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갈아치우는 사람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건강 증후군'은 집착할 대상을 밖에서 찾다 찾다 실패해 결국은 자신의 몸으로 집착의 대상을 옮긴 상태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진정 이 시대는 불안의 시대입니다. 쫓기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상처와 기억에 묶여서, 속도와 성공을 우상화하는 거대한 문명에 포로가 되어 자유롭고 풍요로워야 할 우리의 삶은 오늘도 날마다 서서히 죽어갑니다. 이 시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쉼터를 구하지 못하고 날마다 병들어가는 암울한 시대입니다.

근래 아주대학교 심리학과의 김경일 교수가 CBS의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코로나 시대 문명의 대전환'과 관련해 매우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코로나 시대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공존'이 살길이라고 말하면서, 무한욕망에 기초한 사회적 '인정투쟁'에서 벗어나 '지혜로운 만족감'을 추구하는 새로운 삶을 나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먼저 풍선을 사달라고 조르던 자신의 아이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하도 졸라서 아이에게 풍선을 사줬더니 5분 있다가 아이는 풍선 줄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원했던 걸 얻었는데 아이는 팔이 아프다며 그냥 놓아버렸습니다. 아빠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찍은 사진을 보니 풍선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의 주위에 다른 아이들이 모두 풍선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아빠는 발견했습니다. 나만 안 가지고 있으니까 아이는 풍선을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풍선 줄을 놓고 나서 아빠에게 혼났던 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까 그 주위에는 아무도 풍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남들이 가지고 있으니까 풍선을 원했던 것입니다. 김 교수는 여기서 '원트'(want)와 '라이크'(like)를 구분합니다. 원트는 사회적인 것입니다. 라이크는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본주의 경제라는 게 기본적으로 남이 원하는 걸 따라 하게끔 부추기면서 무한한 소비를 촉진하는 사회입니다. 일찍이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모방욕망' 이론에서 이 메커니즘을 밝혔습니다. 예를 들어 근사한 모델이 명품 가방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면 그 모델이란 매개체를 통해 그가 소유한 가방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메커니즘 말입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이것을 '인정투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40평짜리 집에 사는데 50평짜리 집에 가고 싶은 이유는, 50평에 사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라는 겁니다. 큰 차를 가지고 싶은 이유는 큰 차를 타는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어서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우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비교만큼 나의 행복을 취약하게 만드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반에서 1등을 하면 내가 비교우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교 1등이 내 반에 오면 나는 2등으로 밀려납니다. 내가 전교 1등을 해도 전국 1등 앞에 가면 다시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남의 감탄'에 목매는 인정투쟁입니다. '나의 감탄'이 아니라 남의 장단에 목을 매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감탄의 주체를 타인이 아닌 나 자신으로 바꿔야 한다고 김경일 교수는 제안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원트가 아니라 나의 라이크가 행복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끝없이 돌아다니면서 '이것도 가져야지, 저것도 가져야지' 하면서 무한욕망의 사이클 안에 살았습니다.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는데, 진정으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원하는 걸 따라, 즉 사회적 원트를 따라 살았습니다. 마치 두뇌의 포만중추가 망가진 사람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고 위장에 큰 탈이 날 때까지 계속 먹고 또 먹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이제 깨닫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한욕망 추구를 부추기는 사회나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한정 없이 자연을 파괴하게 되고,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이 앞으로 계속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원트가 아니라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라이크를 기준으로, 또 무한한 욕망이 아니라 '지혜로운 만족'을 추구하며, 그리고 무한한 경쟁이 아니라 '행복한 공존'을 추구하며, 서로 돕고 아끼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무한한 욕심과 경쟁심이 만악의 뿌리가 됨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고 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망의 뿌리가 죄고, 그 죄의 뿌리가 바로 욕심이라고 지목합니다. 인간의 경쟁심의 뿌리에도 욕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시기와 다툼[즉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야고보서 3:16). 그래서 성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러한 지혜는 위에는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 속한 것입니다"(야고보서 3:14-15, 새번역)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기초한 성공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가장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책은 구약성서의 <전도서>(Ecclesiastes)일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무슨 보람이 있는가]"(전도사 1:2-3)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전도서 2:4-9). 한 마디로 거대한 부를 일군,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전도서 2:10)라며 드러내놓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성공의 정점에서 그는 갑자기 깨닫습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11).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전도서 5:10-16). 전도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인간의 수고가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전도서 1:14)과 같음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전도서 4:4, 새번역)라고 한탄합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전도서 2:24)임을 인정합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전도서 3:13)이라고 긍정합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셨다"(전도서 3:10)라고 연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고 헛되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유는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그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도서 3:14)라고 전도자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도서 3:11)을 주셨음을 전도자는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지[키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전도서 12:13)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하며 그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만족을 추구하면 삽니다. 행복하기 위해 삽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정한 만족이고 행복입니까? 성서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편 107:9)신다고 노래합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 90:14)라고 기도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악인들이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아이들에게 물려 주"지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4-15)라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편 103:3-5). 이사야 예언자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주님의 품 안에서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이사야 66:11)라고 약속합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린도후서 3:5)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먼저 우리를 고발합니다. 이전에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베소 2:2-3)였습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에베소 2:4-8)입니다.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우리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라고 촉구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빌립보서 2:3-4) 사람입니다. 욕심과 경쟁이 아니라 돌봄과 상생의 인간입니다. 바울을 이런 '새 사람'의 원형(原形, archetype)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이렇게 확증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사람들은 더 높아지려고, 더 가지려고 싸우지만 '새로운 존재'(New Being)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고, 섬기셨습니다. 그 비움과 낮춤과 섬김 속에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채근담』(菜根譚)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감자나 무처럼 맛있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 홍자성이 지은 책인데, 간소한 삶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동양의 잠언'(箴言)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책에는, "사람은 항상 마음 한구석을 비워두는 것이 좋다"는 말이 나옵니다. 물이 차면 넘치는 것처럼 가득하면 이내 기울어지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여유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즉 욕심을 버리라는 충고입니다. 동양화에서 여백의 미가 없다면 그것은 동양화로서의 존재가치를 이미 잃은 것이지요. 음악도 음표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음표 사이에 숨죽이고 있는 숨표로 완성됩니다. 숨표가 없는 음악은 아마 소음의 연속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대학교회도 건축양식으로 볼 때 '여백의 미'를 살린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돋보이는 교회입니다. 비어 있기에 오히려 충만한 영혼의 만족을 줍니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도 인간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여백과 쉼표가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가장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가 언제입니까? 헛된 욕심과 욕망이 마음속에 일 때입니다. 반면에 우리 마음이 가장 평온하고 평화스러워질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을 버릴 때입니다. 비울 때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평온한 마음속에 자족감이 일고 새 힘이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의 사해(死海, Dead Sea)를 가보셨는지요. 성지순례를 떠났을 때 사해 바다에 몸을 담그니 정말로 몸이 물 위에 붕 떴습니다. 하지만 사해는 '죽은 바다'입니다. 염도가 보통 바다의 열 배나 돼 물고기가 전혀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펄떡이는 신선한 갈릴리 호수에서 내려온 물인 사해가 왜 죽음의 바다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해가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조금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채우기만 하고 조금도 비우지 않으니 결국 생명이 전혀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도 바로 이 사해와 같습니다. 안으로 채우기만 하는 삶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죽음의 호수처럼 만들지 않고 싶다면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회적 원트에 포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밤하늘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사해는 물로 자신을 가득 채우나 밤하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하늘은 아무리 별을 사랑해도 자신을 온통 별로 채우지 않습니다. 별로 가득 채워져 어둠이 없다면 그 밤하늘은 괴기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구름과 달이 있고, 텅 빈 어둠의 공간이 있기에 밤하늘은 신비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저 밤하늘과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 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 중에서.)

"채우지 마소서 // 비어 있기에 / 충만한 평안을 / 그대로 머물게 하소서 // 비어 있기에 / 꿈꿀 수 있고 / 내 안에 / 햇빛과 달빛이 쉬어 가고 / 바람도 노래하다 떠나며 / 빗물이 빗물로 고이고 / 눈이 눈으로 쌓일 수 있음을 / 기뻐하게 하소서 // 비어 있기에 / 온전한 사랑일 수 있음을 / 감사하게 하소서 / 끝내 비어 있도록 / 용기를 주소서." 오늘 공동기도문으로 함께 읽은 차옥혜 님의 시 <빈 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빈 잔'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께서 새 생명의 포도주를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8-30). 오늘 복음서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다'라는 말의 그리스 원어는 '크레스토스'(chrestos)입니다. '몸에 잘 맞는다,' 혹은 '부드럽다'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소가 메는 멍에를 나무로 만들었는데, 먼저 소를 끌고 가서 치수를 재고, 멍에가 다듬어지면 다시 소를 데리고 가서 그 멍에를 지웠습니다. 그때 그 멍에가 정확하게 잘 다듬어져 있으면 소의 몸에 잘 맞아 부드럽게 작동하면서 고통스러운 쓸림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목수가 직업이셨던 예수님은 당시 갈릴리에서 제일 좋은 멍에를 만드는 명장(名匠)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생의 멍에도 무거운데 새로운 멍에를 더 주시겠다는 부담스러운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당시 멍에란 두 마리의 소에게 함께 지워 한 조가 되게 하는 나무기구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것일 겁니다. '부드럽게 만든 나의 멍에의 짝이 되어 내 곁에서 일해보라. 어떻게 짐을 끄는지 배우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아라. 만일 내가 너를 돕도록 허락한다면 그 무거운 짐이 가벼워질 것이다.' 짐이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 몸에 잘 맞는 멍에를 만들어주시고 더욱이 내 짝이 되어 나와 함께 짐을 져주신다면 내 인생의 짐은 하나도 무거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 함께 진 짐이라면, 그 짐은 오히려 가벼울 것만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작은 소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소년은 자기보다 더 작은 절름발이 소년 하나를 등에 업고 가고 있었습니다. '업고 가기에 너무 무겁지 않느냐'라고 묻자 그 소년이 답합니다. '아니요, 무겁지 않아요. 이 아이는 내 동생인걸요.' 사랑으로 지는 짐은 무겁지 않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사랑의 주님과 함께 진 인생의 짐은 오히려 가볍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이 주님이 오늘 부르십니다. "내게로 와서 쉬라"고 초대하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게 멈춰 섰습니다. 우울하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입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한 가지 깨닫습니다. 진정한 쉼이 멈춤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멈추어야 비로소 모두가 쉴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공장이 멈추고서야 하늘이 깨끗해졌고, 각종 오염이 줄면서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값진 교훈도 얻게 되었습니다. 탐욕과 안식은 결코 병행하기 어렵고, 탐욕을 멈추어야 비로소 진정한 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내려놓으십시오. 비우십시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 나아와 쉬십시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십시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아침에]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주님 안에 인생의 참 행복과 만족과 영생이 있습니다. 아멘. (20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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