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한결같은 사랑(hesed)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Aug 17, 2020 07:45 AM KST

- 역대하 7:12-16, 로마서 8:24-28, 요한복음 3: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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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어제(8월 15일) 0시를 기준으로 전 세계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는 약 1,174만 명, 사망자는 54만 명을 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코로나의 재확산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예를 갖춘 경건한 장례식은 옛일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허망함과 덧없음이 무겁게 공기를 짓누릅니다. 지금은 슬픔과 불안과 상실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은 잃어버렸습니다. 다시는 그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위기의 시간에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심각한 위기는 우리에게 성서를 다시 새롭게 읽으라고 요구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히브리서 4:12)심을 믿습니다.

코로나의 재난 속에 교회마저 방향성을 잃고 세상이 귀담아들을 만한 메시지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는 이때, 세계적인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 좋은 책 한 권 펴냈습니다.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 코로나 시대 성경이 펼치는 예언자적 상상력』(Ivp, 2020)입니다.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을 나온 그는 구약의 예언서 해석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구약성서, 그중에서도 토라(Torah), 즉 모세오경과 예언서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책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수집되고 편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6세기에 바빌론에 의해 멸망 당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마침 어제가 8.15 광복절이었는데,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포로 생활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전에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세상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받아들이게 도와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관해 비전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거룩하다 여겨집니다. 같은 이유로 이 책들은 오늘 우리에게 닥친 재앙 속에서도 생명과 구원의 길을 찾는데 깊은 영적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졸업식이 취소되고, 결혼식이 연기되며, 장례식조차 치를 수 없게 처참히 무너진 미국 사회 한복판에서 저자 브루그만 교수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재앙의 한가운데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곧 환난 속에서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그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 언약 안에서 다른 모든 생명과 친밀한 사랑의 삶을 살라는 부르심 말입니다.

전염병의 출현은 과연 하나님과 관계가 있을까요?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일까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2020.3.19.)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브루그만은 전염병의 출현에 대한 구약성서의 세 가지 이해를 이 책에서 제시합니다. 첫째는 언약 위반에 대한 '동등 보응'(quid pro quo)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항했습니다. 이에 대한 동등한 보응, 즉 대갚음으로 하나님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삼중 저주'라 불린 칼(전쟁)과 굶주림(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신다고 성서는 말합니다(레위기 26:25-26, 신명기 28:21-34, 예레미야 15:2, 에스겔 6:11 등),

이 해석에 의하면 전염병은 자연의 위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창조세계의 질서를 위반하는 이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심은 걸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팬데믹)과 기후변화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된 결과라는 점에서 이 해석은 오늘도 정당합니다. 옛날 우리말에 "하늘도 노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홍성훈 님의 <하늘이 화났어!>를 읽어봅니다. "얼마나 화가 나면 / 마스크로 말을 못하게 / 입을 막았을까? // 얼마나 화가 나면 / 서로 만나지 못하게 / 거리를 두게 할까? // 얼마나 화가 나면 / 더러운 검은 손 / 깨끗이 씻으라 했을까? // 하늘을 두려워하자. / 하늘이 화났어!"

전염병의 출현에 대한 성서의 두 번째 해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신적 권능을 행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창조세계 안의 부정적인 힘을 의도적으로 동원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 힘들게 노예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해방하기 위해 내리신 소위 10가지 '재앙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서는 그 파괴적 행위가 그저 단순한 자연적 사건들의 연속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하고 의도적인 행위, 즉 '하나님의 치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해방된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으시는 겁니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출애굽기 6:6-7).

<인류에게 보낸 편지>(A Letter to Humanity)라는 글이 SNS에서 널리 공유되었는데 한번 읽어봅니다. 누가 보냈는지 상상해보십시오. "지구가 속삭였지만 당신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소리쳐 외쳤을 때 당신들은 오히려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당신들을 벌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을 깨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세계가 돌아가는 그 궤도를 내가 멈추게 했습니다... 지구의 아픔을 잊게 만들던 편안함과 당신들의 즐거운 외출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중국과 인도의 하늘이 깨끗해지고 공기가 맑아졌습니다... 베니스의 물이 깨끗해지고 돌고래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간들을 기억해 주세요... 싸움을 멈추고 더 이상 물질적인 것에만 매달리지 말아 주세요. 이웃사랑을 시작해보세요. 지구와 그 안의 모든 생명을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조주를 기억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 다시 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편지 맨 끝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가"라고 발신자가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창조세계 안의 부정적인 힘도 사용하실 수도 있다는 것이 성서의 견해입니다.

전염병의 출현에 대한 마지막 세 번째 구약성서의 설명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와 초월성입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욥이 하나님께 항의했을 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욥에게 던지신 하나님의 질문은 그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욥기 38: 1, 6, 25-27, 33). 욥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인간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는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이 길들일 수 없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모두 하나님을 자신들이 설명할 수 있는 '동등한 보응'의 틀에 맞추려 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과 희망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도 또 행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폴 틸리히는 '하나님 위의 하나님'(God above God)이라 불렀습니다. 완전한 자유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자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단호하게 한마디 했습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이사야 45:9). 하나님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성서는 요구합니다. 달나라에도 가고, 복제 인간도 만들고, 노화마저 정복해 영원히 살 줄 알았던 인간이,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책임지며 우리가 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라 말하며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자만하던 인간이 지금 자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이렇게 인간의 역사에서 경험하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같은 재난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위반한 일탈에 대한 보응이거나,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권능의 행사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 섭리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라 잃고 포로가 되어 이전에 알고 있던 세상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성서는 어떤 희망을 줍니까? 슬픔과 불안과 상실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소망을 갖게 합니까?

브루그만 교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서 발견되는 세 가지 소중한 히브리어 단어들 안에서 생명의 길과 희망을 봅니다. 그것은 '헤세드'(hesed), '하난'(hanan), 그리고 '라함'(raham)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하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라함은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긍휼' 혹은 '자비'입니다. 이 중에서 브루그만은 헤세드에 특히 주목합니다. 그는 헤세드는 '견고한 유대감'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그에게서 나의 헤세드(한결같은 사랑)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사무엘하 7:15). 여기에 사용된 헤세드(한결같은 사랑)는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다윗의 긴 '승전가,' 혹은 '감사의 노래' 맨 끝에 다시 등장합니다. "하느님은 손수 기름 부어 세우신 왕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시고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을 베푸십니다. 이 다윗과 다윗의 후손에게, 길이길이"(사무엘하 22:51, 공동번역). 다윗이 부른 이 감사의 노래는 이후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찬송(doxology, 송영)이 됩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가장 훌륭한 찬송 시의 하나는 예레미야 33:11b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개역개정). 여기 '인자하심'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헤세드, 즉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인자(仁慈)하다'라는 말은 '어질고 사랑이 깊다'라는 뜻입니다. 이 너그럽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찬송의 절정이 바로 시편 136편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아름다운 노래에는 이 구절이 무려 26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결같다'라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이 같다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인자하심]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진실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시편 36:5, 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하심[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 63:3)라고 노래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잎이 무성한 올리브 나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인자하심]만을 의지하련다"(시편 52:8)고 다짐합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한결같은 사랑]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17:2)고 찬양하는 시편 기자는 저 유명한 23편에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한결같은 사랑]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6)라고 시를 마무리합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한결같은 사랑)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진실하심, 미쁘심)과 언제나 한 짝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편 100:5). 그래서 시편 기자는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편 92:1)라고 노래합니다. 이렇듯 인자하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성서는 "신실하신 하나님"(faithful God, 신명기 7:9, 이사야 49:7, 호세아 11:2)이라고 말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仁愛 / 헤세드, 즉 한결같은 사랑]를 베푸"신다 약속합니다(신명기 7:9). 이렇게 인자와 성실을 품성으로 가지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성서는 '신뢰하라'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역대하 20:20).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가 나의 힘과 노래와 구원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이사야 12:2). '신뢰하다'는 말은 믿고 의지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은 신뢰하십니까?

깊은 밤에 홀로 산길을 가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간신히 벼랑에 자라는 소나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지만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그는 결국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그는 온갖 서원을 다 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내가 너를 살려주마. 그런데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느냐?' '그럼요, 무엇이든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를 붙잡고 있는 그 손을 놓아라.' 하나님의 대답에 기가 막힌 그 사람은 손을 놓는 대신 절벽 꼭대기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기 하나님 말고 딴 사람 없어요?' 그러고는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려 있었는데, 새벽이 밝아오자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땅바닥이 바로 발바닥 아래였다고 합니다(예화 - 한희철, 『(사순절 묵상집) 지킴 20 버림 20』 [겨자나무] 중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이 내미시는 손을 신뢰하며 붙잡습니까? 그 손이 아무리 내 생각과 다르다 하여도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알았습니다. 전염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최종 권세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칼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징벌하기도 하시지만, 한결같은 사랑(헤세드)과 은혜(하난)와 자비(라함)로 결코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절대로 단념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소망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확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대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는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갈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도 아닙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본문대로, 하나님은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하 7:13b-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종의 명령으로 네 개의 동사로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저마다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찾고, 또 악한 길들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위기를 초래한 삶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개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이 말씀은 보증합니다. 핵심은 '언약에 기초한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존재로 다시 신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과의 생명의 언약에 기초한 삶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치실 겁니다.

기도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만 하시면 고통이 간단히 사라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것은[코로나바이러스는] 어느 날... 기적처럼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순진한 신앙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신앙은 맹목적 확신이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도 아닙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과 악 속에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처럼 주술(呪術)처럼 오해되는 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바울이 처음 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스토아 철학 사상가인 플루타르크(Plutarch)의 말입니다. 그가 이 말을 처음 했을 때 그 안에는 기계적 낙관주의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본래 스토아 철학가들이 세상의 악을 설명하려고 고안한 말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또 개개인의 좋아함이나 싫어함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이성'의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불행이나 악도 결국은 보편적으로 선한 명분에 봉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바울이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만물 속에서 역사하면서 선한 결과를 지향하는 존재는 보편적 이성이라는 우주적 원리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구절에서 참 주어는 '모든 것'(panta)이 아닙니다. '합력하다'(synergei)라는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은 오히려 목적어입니다.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 역사하여 선을 이루어가신다'입니다. 세상 사물과 일들이 이렇게 저렇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요행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섭리와 의지 속에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부른 개회 찬송가 66장 안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독일 개신교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인 "다 감사드리세"(Nun danket alle Gott)는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 중에 마르틴 린카르트(Martin Rinckart) 목사가 기도 시로 작사한 것입니다. 린카르트 목사는 독일 작센주 아일렌부르크 태생인데 그 작은 도시는 당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피해 몰려온 수많은 사람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 도시의 생존자 중 유일한 목회자는 린카르트 목사뿐이었습니다. 아내마저 전염병으로 죽은 상황에서 그는 하루에도 40~50명의 장례를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혹독한 환경 한가운데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여기서 말하는 '옛날부터 주신 복, 이제와 영원히 선물로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이 바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헤세드입니다.

그가 계속해서 노래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함께 계셔 / 기쁨과 평화의 복 내려주옵소서 / 몸과 맘 병들 때 은혜로 지키사 / 이 세상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 린카르트 목사는 자신도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병들고 지칠 때 우리를 살리고 구하는 것은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곧 전쟁과 기근과 질병 속에서도 끝까지 역사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실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독일 찬송가는 다윗과 예레미야와 시편 기자가 부른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찬송과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은 모세 앞에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라함) 은혜롭고(하난)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많은 하나님이라"(출애굽기 34:6). 이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고 신약성서는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전쟁)과 굶주림(기근)과 전염병이 닥쳐와도 이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잃어버린 세계에 연연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처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찬송가 488장),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하난)와 한결같은 사랑(헤세드)과 넓은 자비(라함)에 여러분의 소망의 닻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내민 손을 잡으십시오. 지금까지의 악한 길에서 떠나 자기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며 반드시 이 땅을 고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삶을 사십시오.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변치 않고 여러분을 지키시고 여러분의 힘과 소망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자비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래 전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예레미야 33:11). 민족의 멸망 앞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의 소망을 준 이 눈물의 예언자가 품었던 소망과 비전이 오늘 여러분 자신의 소망과 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브루그만 교수의 간절한 기도처럼 우리에게도 곧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들리고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하하심이 영원하다"라는 찬송이 터져 나오며 우리 자녀들의 입학식과 졸업식과 결혼식에서 우리가 다시 춤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가 늘 의지하던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도움이 무너지고 모든 위로가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변치 않으시는 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말로 할 수 없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다른 구원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으시고, 고치시고, 구원하시고, 회복해주소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되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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