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Sep 14, 2020 08:51 AM KST

- 에스겔 18:23-32, 에베소서 4:25-32, 누가복음 1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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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한 노인이 지나가는 대학생들에게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노인을 피해 지나가는데 한 학생이 말을 걸었습니다. "어르신, 아직도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믿으십니까?" 노인이 답했습니다. "학생이 원한다면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꿀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물로 변화시키는 기적도 행하신다는 사실을 당장에라도 보여줄 수 있네." "그럼 보여주시지요."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다시 답했습니다. "학교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가서 혹시 집시 스미스(Gypsy Smith)라는 사람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게. 아마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그가 악명 높은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걸 자네에게 말해줄 걸세.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네. 그런데 그가 지금은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인생을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네. 그 사람이 바로 자네 앞에 서 있는 나일세.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그분은 지금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포도주를 물로 변화시키신다네." 영국의 부흥사 집시 스미스(Gypsy Smith)가 남긴 일화입니다.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의 내용입니다(요한복음 2:1-11).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예상보다 많은 손님이 몰려왔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집의 사람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여섯 항아리 아귀까지 물이 가득 차자 그것을 연회에 내가라고 하셨습니다. 물은 포도주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이것을 예수님의 "첫 표적"(개역개정), "첫 표징"(새번역), 혹은 "첫 번째 기적"(공동번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어 원문으로는 '기적의 시작'(αρχη, 아르케)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공생애 3년 동안 예수께서 나타내실 많은 기적의 '시작'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 기적은 어떤 기적이었습니까?

첫째로, 가나 혼인 잔칫집의 기적은 창조의 기적이었습니다. 성서의 맨 처음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할 때의 '태초'가 바로 '아르케'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이 말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케 하고, 가치 없던 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창조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쓸모없던 인간이 쓸모있는 인간이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썩어 없어질 몸이 다시 살아 영생하는 재창조의 기적을 예수께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거듭나게'[重生] 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새 사람'으로 창조하는 분입니다. 만물을 새로 지으시는 분입니다.

둘째로, 포도주의 기적은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의 곤경을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으로, 그들의 곤경을 자신의 곤경으로 공감하셨습니다. 그 긍휼하신 마음이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은 항상 "긍휼히 여기시고," "측은하게 생각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입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화내는 일이 전혀 없으신가요?" 그러자 수녀님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낼 틈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의 기적은 이와 같은 마음, 사랑하기에도 바빠 화낼 틈도 찾기 어려운 마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시작됐습니다.

셋째로, 포도주의 기적은 기쁨과 활력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생기를 잃고 파장 분위기로 가던 잔칫집은 예수님의 기적으로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은 우리에게 기쁨과 활력을 줍니다. 성서에서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이 기쁨과 기도와 감사, '3대 희망'입니다. 성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자유와 생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세상 모든 역경 속에서도 내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됩니다.

기적은 있을까요? 무엇이 기적일까요? 기적을 원하십니까? 지금 기적이 필요하십니까? 가나의 혼인 잔칫집 기적과 같은 창조와 배려와 기쁨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도 일어나길 바랍니까? 성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시편 77:14)이라고 말합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분"(시편 98:1)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40편의 기자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시편 40:5)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의 교독문인 시편 107편의 기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어다"(8, 15, 21, 31절)라고 네 번이나 반복해서 찬송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큰 기적입니까?

주중에 캐롤 윔머(Carol Wimmer)가 쓴 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When I say, "I am a Christian")가 인상적이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외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종종 길을 잃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이 길을 택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겁니다.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주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서 하나님께서 나의 인도자가 되어주셔야 한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의 강함을 드러내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약하니 생을 이어가는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성공했다고 허풍떠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실패했으며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시인하는 겁니다.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혼돈 속에 있으며 그러므로 내가 갈 길을 보여달라고 겸허히 요청하는 겁니다.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자신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결점은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받아주심을 믿는 겁니다.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고통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 심장이 터질 듯 아파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겁니다. /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누구를 심판하거나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단 하나, 나는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겸손한 믿음을 보여주었다면 세상이 이처럼 교회를 질타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기적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입니까? 나는 늘 길을 잃고 헤매지만, 종종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지만, 연약하지만, 혼돈에 빠져 있지만, 결점이 너무도 많지만,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바로 기적입니다. 그런 나를 용납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시며, 갈 길을 밝히 보이시고, 삶을 지속할 용기를 주시며, 마침내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에스겔 18장은 읽을수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리고 인내와 은총을 깨닫게 하는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아비가 죄를 지으면 자식이 그 죄를 물려받아 그 죄를 담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하시면서(3절), 아비든 자식이든 모든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말씀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도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20절). 이렇게 에스겔 18장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30절)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25, 29절)이시며, 따라서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13절) 경고합니다. 무서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23절에 이르러 놀라운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이렇게 최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라"(30-32절).

하나님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살기를 바라십니다. 스스로 돌이켜 생명의 길로 오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7편 기자의 말대로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편 7:11-12)고 경고했습니다. 바울도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한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로마서 2:5-6)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라는 것이 성서의 최종적 선언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자신의 피는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신 심판의 하나님은 악인이 자신의 죗값으로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어 마땅한 자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 살기를 바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예수께서는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처럼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읽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4-7)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악인이 자기 죄로 죽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삶에서 탈락하고 좌절한 인생이 회복되고 치유되어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자비가 기적입니다. 이 인내와 긍휼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경제가 멈추고 일상이 멈춘 오늘의 세계는 마치 포도주가 다 떨어진 가나의 혼인 잔칫집과 같습니다.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깊은 무력감과 우울 속에 빠져 있습니다. 생기와 활력을 잃었습니다. 이런 세계에 오늘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 기적은 '태초'(αρχη, 아르케)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기적입니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는 기적입니다. 무기력을 활력으로 바꾸는 기적입니다. 우울을 환희로 바꾸는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연, 곧 그분의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멋대로 파괴하고 함께 살라 지어주신 동물들을 학대하여 무서운 질병을 불러와 자기 머리 위에 스스로 진노의 불길을 쌓던 우리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다시 지으시는 창조의 기적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든 '옛 사람'(old self)에서 당신의 공의와 진리 안에서 모든 생명과 더불어 거룩하게 살아가는 '새 사람'(new self)으로 다시 창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계십니다. 우리의 돌 항아리에 어귀까지 물을 가득 채우라 하십니다.

박기평 시인의 <나 하나의 혁명이>를 읽어봅니다.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이 지구 위 인류 모두가 /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 내가 먼저 적게 벌고 나눠 쓰면서 / 덜 해치고 덜 죄짓는 맑아진 얼굴로 / 모두 나처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되고 / 푸른 지구 푸른 미래가 살아난다고 /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것 //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기적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기적도 기적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인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옷 입은 새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베드로후서 3:14)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무엇이 배려(配慮)입니까? 이정록 시인의 시집 『어머니 학교』에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중 <그늘 선물>이라는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땀 찬 소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 따가운 햇살 쪽에 서는 것만은 잊지 마라 / 소 등짝에 니 그림자를 척하니 얹혀놓으면 / 하느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장하겄냐?"

어머니는 자식에게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친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장한 자리'가 있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자신도 피곤하겠지만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 쪽에 서서 종일 고단하게 일한 소의 등짝에 자신의 작고 시원한 그늘 하나 만들어주는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어머니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자식은 분명 이웃을 배려하고 세상에 기쁨을 주는 존재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배려란 "나를 비워 누군가가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한희철, 『지킴 20 버림 20』[겨자나무, 2020]).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등'(等)은 순위나 등급을 나타내지만, '류'(流)는 위치나 가치를 나타냅니다. '등'에는 외양적 의미가 드러난다면, '류'에는 내면적 의미가 드러납니다. 누구나 일등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삼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류는 삼류와 다릅니다. '류'는 인간 삶의 질과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밤늦게 KTX를 타고 상경할 때였습니다. 열차가 어느 역에 도착하자 중년 남자 대여섯 명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올라와 의자를 돌려놓고 마주 앉더니 안주와 소주를 꺼내 술판을 벌였습니다. 주위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차가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떠들썩하게 먹고 마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삼류라고 생각했습니다. 삼류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천박합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남을 이해할 줄 모르고 양보와 배려의 정신이 부족합니다. 이 세상에 누구나 다 일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삼등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삼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삼류인생, 삼류사회, 삼류국가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비채, 2013] 중에서). 그리고 교회도 삼류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가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남을 이해할 줄 모르고 양보와 배려의 정신이 부족하다면 삼류가 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딱한 일입니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우산>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한 교우께서 제게 보내주셨는데, 비가 많이 오던 지난 장마철에 읽어서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이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런 '단비와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 자신의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 비 오는 인생길에서 다른 사람의 우산이 되어주는 사람, 그렇게 이웃과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가득한 사람이 되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게 바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변화가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회개가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탐욕과 유혹의 구습을 따라 삼류의 삶을 살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과 다른 모든 생명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류의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 하늘에서 가장 기뻐하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로마서 12:2) 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 받은 새 사람"은 오늘 읽은 신약서신(에베소서 4:25-32)의 말씀처럼,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릇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즉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이 혁명이고 기적입니다. 그 기적을 이루어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포도주를 물로도 변화시키십니다. 그분이 지금 나를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과 같은 세상에서 만물을 새로 창조하고 계십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세상이 '거듭나는' 중생(重生)의 기적이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드린 공동기도문(로저 크로포드의 <별똥별>)처럼 "제 안의 모든 원소를 찬란히 불사르는 하나의 별똥별"처럼 생명의 불꽃을 찬란히 불태우는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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