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나는 세상을 섬기러 왔노라

정인재 목사(사회적 교회 담임)

junginjae
(Photo : ⓒ베리타스 DB)
▲사회적교회 담임 정인재 목사

성경본문 : 마가 10 : 42 - 45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큰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어로는 Serve, 봉사하다 의 의미이고 명사로는 Servant, 하인이라는 뜻입니다. 섬김의 반대말은 '지배하다, 통제하다'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구약에서 '섬김'이라는 용어의 사용처를 보면, 몇 가지의 경우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쓰던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섬겨라' 할 때 쓰입니다. 다음으로 왕에게 쓰는 용법이 있습니다. 에스더 1장 10절에는 '왕궁에서 왕을 섬기는 자'들을 디아코노이스, Diakonoi, 로 호칭하기도 합니다. 즉 '왕을 잘 섬겨라' 할 때 쓰인 것입니다. 구약 후기에 와서는 개인적인 용도 또는 상위계층에 쓰임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남을 위해 일하고 섬기고 받드는 개인의 하인에게 쓰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몇몇 용법 중 가장 많이 쓰이는 일반적 것은 위계 관계 속에서 아랫사람이 위 사람에게, 노예가 주인에게, 또는 신에게 쓰이던 용어입니다. 그러다 보니 '섬기다'라는 용어의 어감이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부드럽기 보다는 다소 강압적 고압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의무적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가장 높으신 분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데 '섬기려 왔다'고 하시는 겁니다. 반대로 얘기하고 계신 것이죠.

이 말씀의 의미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동안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겼는데, 예수님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겨라' 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아, 이 말을 듣는 순간 큰일 났다 싶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라는 질문이 대번에 나오게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이유가 뭐지?" 라고 예수님은 또 다시 되묻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니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아래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죠. 상하관계가 있고 그래서 상명하복이고 난 잘났고, 난 가졌고, 난 금수저고, 난 많이 배웠고, 그래서 난 소위 성공해서 위로 올라 왔는데, 저 사람은 흙수저 이고 못 배웠고, 그래서 아래가 되어서 밑바닥 인생을 사는데, 어찌 그런 사람을 잘난 내가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아주 상식적이고 보편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일에 '위계의 억압'과 '질서의 폭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인류역사는 힘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폭력의 역사입니다. 아랫사람에게는 사람다움, 인격, 인권, 이런 것들이 전혀 없고 무시당하고 고통 받고 상위계급을 위해 인생을 소비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계급과 신분에 의한 위압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사회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일에 예수님은 제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볼 때 크게 두 가지 유형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권한형 지도자로 진정으로 국민과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한 정치를 자기희생적으로 하는 유형입니다. 또 하나는 권력형지도자로 권한을 권력으로 삼아 자기 욕망의 실현을 위해 통치하는 지도자입니다. 이런 유형은 높은 곳에 올라가 대접받고, 자기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주변사람을 착취하고 희생시킵니다. 세상에 갈등과 고통을 몰고 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첫째 유형의 지도자가 되고 또 각자의 처소에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유형의 지도자는 진정으로 '섬기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은 사실, 예수님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가져온 구조와 틀을 건드리면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특히나 그 구조에서 강자 쪽에 속해 있는 부류들은 더욱 그렀습니다. 왜냐면 거기에 이권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뛰어넘는 것이 찐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리에 앉겠다는 제자들의 욕망을 보면서, 이를 강력히 경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듯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가 상식이고 보편으로 보는 일들을 뒤 업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관점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하나님의 관점이며 하나님의 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셨던 방식으로 우리도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 있고,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앞에서고 위에 앉는, 세상 기준으로 위·아래가 형성되는 질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기준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기준을 넘어 설수 있는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이 두시는 가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두말이 필요 없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일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연결됩니다. 특히나 약자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들은 위계질서의 사회적 구조 하에서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피조물로서 한명이라도 착취되고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섬김이 가능합니다. 이념과 인종과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찰 때,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섬기고 모시고 헌신하고 나누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사랑의 위력을 경험합니다. 사랑은 모든 괴리를 뛰어 넘습니다. 사랑은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요즘에 가끔 돈 때문에 사랑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만, 나중에 후회합니다. 다버려도 사랑을 버려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 사람이 아래 사람을 섬기고,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섬김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가 사라질 때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라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이러한 사랑의 절대적 가치가 사라지고, 교리가 자리 잡고 이념이 자리 잡고, 이해관계로 얽혀 분파가 생기고 성경구절 하나를 나와 다르게 생각하면 사탄이 됩니다. 같은 크리스챤이 아닌 것으로 선을 긋고 맙니다. 이것은 사랑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진정으로 교회가 사랑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 비젼은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살아있음, 그것을 영위하는 삶, 또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영원한 삶의 소망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으로 우리의 욕심으로 그 삶 가운데서 타인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과오를 저지러 왔습니다. 현재도 우리는 그러한 과오 가운데 있음을 이 시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을 주셔서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랑의 씨앗을 뿌리게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앞장서게 하여 주옵소서.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우리 신앙인의 참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또한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생각을 다시 가다듬고 신앙의 결단이 있는 한 주간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삶을 허락하셔서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간구 드리며, 이모든 기도를 주님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