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바리새인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Oct 12, 2020 07:00 AM KST

- 잠언 12:17-22, 디모데후서 4:1-5, 마태복음 23:25-28 -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정신의학에 '편집증'(偏執症, paranoid)이라는 증상이 있습니다. 타인의 행위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정신질환입니다. 타인의 행동을 의심하고, 그의 의도를 불신하는데 그 정도가 보통사람의 수준을 벗어나 편향된 상태를 보입니다. 그래서 정당한 근거 없이 남을 의심하고 질투합니다. 지속적으로 원한을 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행동이 잘못된 사람들에게는 곧바로 따지고 몰아붙입니다. 사실 편집증 환자는 좌절하고 거절당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대단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편집증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망상'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확증편향'이 됩니다. 즉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에 빠지게 됩니다. 쉬운 말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영혼의 질병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편집증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 왕은 골리앗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자신의 사위인 다윗에 대해 심각한 피해망상 혹은 질투망상을 갖고 수차례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아합 왕은 예언자 엘리야에 대해 피해망상을 갖고 부인 이세벨을 통해 끊임없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왕이던 헤롯 역시 피해망상증 환자로 메시아로 오시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인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빠져 끊임없이 예수님의 행동을 의심하고 그의 의도를 불신했으며 지속적으로 원한을 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바리새인(Pharisee)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백성들에게는 존경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를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사도행전 26:5)라고 불렀던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고(사도행전 23:6, 빌립보 3:5),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역시 바리새인이었습니다(요한 3:1). 그들은 구약성서의 말씀을 전부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정결해야 하는 규정들을 누구보다 성실히 지켰습니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고, 잔과 접시는 항상 깨끗이 닦았으며, 열심히 기도하고, 또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층민을 경멸하여 부르던 '암하레츠'(Am ha-arets), 즉 '땅의 사람들'과 스스로 구별하여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부정(不淨)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자기들끼리만 식사를 했고, 상거래도 자기들끼리만 했습니다. 원래 '바리새'라는 명칭은 '구별된 사람들'을 뜻하는 '페루쉼'(Perushim)에서 유래했습니다. 페루쉼은 이스라엘의 마카비 왕조가 대(對)로마 독립전쟁을 벌이던 주전 2세기 무렵에 이스라엘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이후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을 통합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백성들에게 거의 전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 왕가나 사두개인(Sadducee) 조차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일반 백성은 바리새인들의 신실한 민족주의와 엄격한 도덕성 그리고 경건한 종교성을 지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과 사상적 뿌리가 같은 열심당(Zealots)의 무장투쟁에 직접 동참하지 않았고, 따라서 예루살렘이 주후 70년에 로마의 최정예 사단에 진멸을 당할 때에도 함께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기반을 두었던 사두개인들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 것과는 달리, 바리새파는 오늘날까지 유대교와 회당으로 살아남아 유대교의 모든 것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바리새인들을 반드시 넘어서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법을 가지고 4백 년이 넘게 나라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온 이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피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도권을 잡고 백성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그 기록이 4복음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자 이에 가장 반발한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의 통치가 언제 임하느냐 따져 물었고(누가 17:20), 그 나라의 '표적'을 보여 달라 요구했습니다(마가 8:11, 마태 12:38, 16:1).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라는 악성 루머를 퍼뜨렸습니다(마태 9:34, 12:24). 병든 자가 죄에서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예수님이 '신성모독'의 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누가 5:21). 또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가 10:2, 마태 19:3)라는 교묘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거리를 찾으려 했고, 현장에서 성폭력을 당한 여인을 끌고 와서 이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느냐고 물으며 역시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거리를 찾으려 했습니다(요한 7:53-8:11).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자 서로 수군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마가 2:16, 마태 9:11, 누가 5:30, 누가 15:2).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건한 금식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힐난하기도 했고(마가 2:18, 마태 9:14, 누가 5:33, 19:39), 소위 '장로들의 전통'을 잘 지키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손을 잘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마가 7:3-5, 누가 11:38).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가장 크게 충돌한 문제는 역시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마가 2:24, 마태 12:2, 누가 6:2, 요한 9:16)라고 따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기]"(누가 6:7)도 했으며,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집에 "[음식]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엿보고"(누가 14:1) 책 잡으려 쉼 없이 감시하기도 했습니다. 성서를 보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예수님을 반대했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예수께서는 "눈 먼 바리새인"(마태 23:26)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심으로 고쳐 주신 일로 바리새인들이 겁박하자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한 9:40) 반박하셨습니다. 이 말은 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렇다면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따져 물었고 예수께서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차라리]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 9:40-41)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판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습니다. 세리를 죄인이라고 능멸하며 상종도 하지 않던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의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서, 성전 앞에 따로 서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한 바리새인보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한 세리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바리새인들의 (그리고 사두개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가 8:15, 마태 16:6, 16:11). 우리는 보통 누룩을 좋은 이미지로 알고 있지만,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셨을 때 누룩은 대단히 나쁜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곧 외식"(누가 12:1)이라고 명확히 일러주셨습니다. 후에 제자들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룩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마태 16:12).

'외식'(外飾)이 무엇입니까? '겉만 보기 좋게 꾸미는 것'입니다. 다른 성서는 이 외식을 '위선'(僞善, hypocrisy)으로 번역합니다. 위선이 무엇입니까? '겉으로만 착한 체를 하거나 거짓으로 꾸밈'이라는 뜻입니다.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엄하게 꾸짖으시고 가장 강하게 경계하신 죄가 바로 이 위선이라는 죄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이 죄를 왜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지 저는 의문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비판하셨습니다.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누가 11:39, 마태 23:25). 종교적 경건과 겸손을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누가 11;43)라고 그들의 겉다르고 속다른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누가 16:14)입니다. 이런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당대의 가장 심한 용어로 거침없이 비판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태 23:27). 예수님에 앞서서 회개를 선포한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태 3:7)라고 일갈(一喝)하기도 했습니다. 4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은 바리새인들의 (그리고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주님은 모세의 법을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이 사실은 "모세의 자리에 [차고] 앉았[다]"라고 한탄하시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이고,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며, 또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조목조목 비판하셨습니다(마태 23:1-7).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무서운 말로 화(禍)를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입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 23:13-23).

예수님의 이런 언어는 바리새인들이 '모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런 비판을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율법 교사는 예수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누가 11:45)라고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율법 교사를 향해서도 같은 화(禍)를 선포하시자 거기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누가 11:53-54)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성서를 보면, 이렇듯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던(마태 22:15) 바리새인들은 결국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마가 3:6, 마태 12:14)하기 시작했고, 이후 "대제사장들과...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마태 27:62)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요한 11:57)하였으며, 결국 가룟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요한 18:3) 주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하여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두고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이셨습니다. 성서를 보고도 그것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편집증을 앓았습니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망상 속에서, 소위 진리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혐오하고,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 5:20).

작고(作故)한 천재작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중에 『장미의 이름』이 있습니다.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소설입니다. 서양의 중세가 저물어가던 14세기 초, 이탈리아와 프랑스 접경지역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이 소설은 다룹니다. 작가는 이 기이한 살인 사건을 통해 그 시대의 편집증이 만들어낸 고통과 갈등을 집약적으로 고발하고 있으며, 우리 시대 역시 같은 편집증으로 고통과 갈등을 겪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것을 촉구합니다.

연쇄살인범은 호르헤라는 나이 많은 수도사였습니다. 연쇄살인은 그가 수십 년 전에 발견한 한 권의 책을 수도원의 거대한 서고에 미로 깊이 감추어놓고 아무도 읽지 못하게 하려던 결과로 발생했습니다. 우연히 몇몇 수사들에게 그 책의 존재가 알려지자 호르헤는 거기에 독을 바릅니다. 누군가 몰래 숨어들어 이 책을 읽으려 하지만 손에 침을 발라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독은 그의 혀를 통해 서서히 심장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런데 호르헤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었습니다. 이 책의 1권은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2권은 '코미디'를 다루고 있습니다. 코미디가 무엇입니까? '보통사람의 모자라는 면을 과장해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 제2권 '코미디'에서 코미디의 웃음 효과가 교훈적 가치를 지니며, 따라서 비극과 마찬가지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라 가르쳤습니다.

호르헤는 도저히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리란 오직 고행(苦行)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도원에서의 힘든 육체적 노동과 기도 그리고 고행을 반복하며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했단 말입니까! 그런데 한갓 천박한 시골 촌놈들의 여흥과 같은 코미디가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라니요! 호르헤에게 이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런 '궤변'이 다른 사람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에서, 즉 당대 절대적인 학문적 권위를 갖는 학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정의의 의로운 오른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권력이 닿을 수 있는 영역 안에서, 그러니까 자신만이 알고 있는 거대한 서고의 밀실에서 동료 수도사들을 하나씩 독살했던 것입니다.

범행의 전모는 결국 윌리엄 수사에 의해 밝혀집니다.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난 현장에서 윌리엄 수사가 호르헤에게 묻습니다. "웃음이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호르헤가 답합니다. "웃음은 두려움을 없앤다. 두려움을 제거하면 신앙도 사라지지. 악마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 더는 신이 필요 없게 된단 말이야." 그때 윌리엄 수도사는 호르헤를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호르헤, 악마는 물질로 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야. 악마는 영혼의 교만이야. 미소를 모르는 신앙이지. 의혹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고 믿는 진리, 바로 그게 악마야!"

예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배가 고픈 제자들이 길이 열면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까요. 그런데 이 일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크게 비난했습니다. 남의 밭 밀이삭을 잘라먹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일체의 노동을 금하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비비는 '노동'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호통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 2:27).

당대 바리새인들은 일종의 편집증 환자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굳게 믿고 있는 진리와 가치가 어떤 이유에서도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거기에는 굶주림도, 질병도, 생명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시대적 편집증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래 정신, 즉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어떤 율법도, 교리도, 제도도 거부하셨습니다. 대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이화여대 사범대학 교육관 A동 앞에 가시면 출입구 오른쪽 윗벽에 한 이상한 글씨 조각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이 완공되던 1967년에 당시 학장이던 김애마 선생님이 이화의 기독교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문구로 선택한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입니다. "헤 알레떼이아 엘로떼로세이 후마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애마 선생님은 이 말씀을 골라 조각가 김정숙 교수님께 부탁하셨고, 김정숙 교수님은 신약성서가 쓰인 원어인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로 이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헤 알레떼이아 엘로떼로세이 후마스!"(ἡ ἀλήθεια ἐλευθερώσει ὑμᾶς)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이든, 학문이든, 그리고 종교든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것이 나의 영혼을 속박하고, 내 얼굴에서 미소를 앗아가고, 내 삶에서 겸손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그것은 참 진리가 아닙니다. 의혹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고 믿는 진리, 그것은 악마입니다. 영혼의 겸손을 잃어버린 진리,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종교적 열심과 경건을 가장한 위선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바리새이즘을 극복해야 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했습니다. 참 진리는 자유를 줍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벨포 경의 시 <진리에 대하여>를 읽어봅니다. "우리가 최상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 절반의 진리에 불과하다 // 어떤 진리에도 머물지 말라 / 그것을 다만 한여름 밤을 지낼 천막으로 여기고 / 그곳에 집을 짓지 말라 / 왜냐하면 그 집이 당신의 무덤이 될 테니까 // 그 진리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때 / 그 진리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히 여기라 // 그것은 침구를 거두어 떠나라는 / 하나님의 속삭임이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은 무엇을 향해 열심히 뛰고 계십니까? 무엇을 향해 모든 것을 바치고 계십니까? 학위? 성공? 명예? 재산? 사랑? 진리? 좋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누구보다 잘 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진 마십시오. 자신의 목표에 스스로 노예가 되진 마십시오. 치열한 것만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1등만이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각자에게 고유한 가치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느 한 가지 기준에 자신을 꿰어 맞춰 그것의 종으로 살아가진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절대화하고 신성화한 어떤 가치나 풍조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시대의 편집증에 맞서십시오.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맞서 싸우십시오. 그런데 거기에는 나의 편집증과의 싸움도 동반해야 합니다. 성공에 대한, 사람에 대한, 진리에 대한 나 자신의 편집증과의 싸움도 수반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망상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리새인의 편집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용기이고, 오늘날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편집증을 앓고 있는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용기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거절당할 용기입니다. 둘째는 상처를 받아들일 용기입니다. 셋째는 남의 장점을 볼 용기입니다. 거절당할까 무서워 우리는 내 안에 숨습니다.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 다른 이의 삶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신뢰할 용기가 없어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의심하고 비난합니다. 이 모두가 용기가 없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거절당해도 괜찮은 용기, 상처받아도 괜찮은 용기,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해도 괜찮은 용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니 이 세 가지 용기가 다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한 가지 용기만 단단히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 용기는 다른 용기를 낳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용기를 내면 다른 용기가 반드시 뒤따라 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새번역) 아멘. (2020.10.11.)

오피니언

기고

과학이 "하느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표현하기 위해 하느님이란 말이 필요하다면 현대과학에 근거하여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의미..

많이 본 기사

한국 최초의 여성조직신학자 박순경 박사 별세

한국 최초의 여성조직신학자 원초 박순경 박사가 24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98세. 박순경 박사(1923-)는 한국 최초의 여성조직신학자로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