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손에 쟁기를 잡았다면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성경본문

욥기 13장 20-28절, 시편 97편 10-12절, 누가복음서 9장 57-62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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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읽는 우리에게 매우 큰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매우 급진적이고 엄격하다 못해 매몰차 보입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잘한 결정이라고 칭찬을 하시거나, 잘 따라오라고 격려를 하지 않습니다. 퉁명스럽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니,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마디 던집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칭하여 말씀하실 때 자주 쓰던 말이니, 자신은 어느 한 곳 안정된 자리가 없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 언제든 떠나야 하는 떠돌이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이 인생을 사는 것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고, 오늘날처럼 국가와 영토 개념이 명확하고, 치안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떠돌이는 언제나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찾았던 두 천사가 그 동네 사람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할 뻔한 사건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듯이,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인생은 가시밭길을 가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이에게 예수님은 "네가 진정 나를 따라 그 험한 길을 갈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본인이 먼저 따르겠다고 하는 경우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안 따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르긴 따르는데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 부모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요청에도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매몰찹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이 사람이 과연 예수님을 따라 갔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예수님을 따를까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 유교적 지식인들은 이 서양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아버지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의 질서와 가정의 질서를 해친다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을 보면 선비들의 비판이 정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도 첫 번째 사람처럼 스스로의 의지를 발동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으로 보면 첫째 사람은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언제든 따르겠다고 말한 반면, 이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분명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세 번째 사람의 이야기는 위대한 예언자였던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스승을 처음 따랐을 때를 떠오르게 합니다(열왕기상 19:19-21). 부농의 아들이었던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은 갈고 있습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엘리야가 자기의 외투를 엘리사에게 던져 줍니다. 이것은 제자를 삼겠다는 표현인 동시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될 것을 암시합니다. 중국 불교, 선종의 전통에서 스승이 옷과 공양그릇(衣鉢)을 제자에게 전수해 주는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알아챈 엘리사는 부모와의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게 허락을 구하고, 곧 이어서 소가 메던 쟁기를 불태우고 소는 잡아 백성들에게 주고 곧바로 엘리야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서의 예수님은 자기를 주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려는 사람이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정성]

예수님은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자비한 눈길로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는 그 부드러운 손길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 아닌 듯 합니다.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던 그 모습은 어딜 갔을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왜 예수님이 이러셨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하나 얻었습니다. 바로 57절 첫 부분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 지금 예수님과 그 일행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의 앞부분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그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하늘에 올라가신다는 표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틀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엄중한 말씀을 남긴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상시가 아니라 비상시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예수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질 것인지 하는 존망의 기로에 서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칠십명의 제자를 세상에 파송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예수님의 심정이 가득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평상시가 아니라 비상시국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과감하게 나서서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을 때, 과연 무엇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베풀었던 놀라운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 때문이었을까요? 아마도 후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니까, 그 곳에서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예수님 무리에 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무리 가운데,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사람은 매우 소수였습니다. 영광과 승리를 기대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모두 실망하고,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떨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저는 오늘 이 첫 사람의 모습에서 한국 교인들의 단면을 봅니다. 900만이 넘는 한국 교인들은 예수님의 무엇을 보고 교회로 온 것일까요?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과연 무엇을 추구한 것일까요? 그렇게 큰 건물을 짓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 이들이 과연 머리 하나 둘 곳 없는 인자를 따를까요?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착실히 성장하여 비록 작지만 우리 소유의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차량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머물러 안주하고, 우리 몸집을 불리려는 욕망의 산물이라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꾸중을 들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 머리 두실 곳 없는 예수를 따라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새 예배 처소에 안착하기도 전에, 아직 인테리어도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하는 한문덕 목사가 야속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광야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곳 또한 바로 십자가 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것을 잊어버리는 그 순간 타락하게 됩니다.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시고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해석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지,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를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장사 지내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장사 지내는 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온 지난 삶을 잘 정리하는 것이지요. 과거를 마무리하는 것이지 미래를 앞당겨 새로 시작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새롭게 동터오고 있고, 이 때 먼저 나서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장례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나라를 새롭게 일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그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먼저 사람을 부릅니다.

이 두 번째 사람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지금 우리들이 처한 상황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코로나 세계 대 유행은 그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먼저 시도해 보고 도전해 보는 사람이 있어야만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보지 않은 길은 위험천만하고 자칫하면 크게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용기가 필요하고 굳센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모두가 과거에 묻혀 함께 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새길을 여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어야 합니다.

최근에 독감 백신이 상온에 노출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온에 노출된 백신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여 수거하고 실험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25도나 37도까지도 백신이 잘 견디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성약품이 공급한 8개 품목 모두 25도에서는 24시간 이상 품질을 유지했고, 37도에서는 5개 품목이 72시간 이상, 1개 품목은 48시간 이상 품질을 유지했고, 2개 품목은 12시간 이후부터 품질에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험을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바로 운반과정에서 어떤 백신들은 살짝 얼었다가 녹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바로 그것이 백신의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상온에서 백신이 노출되는 경험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이제 더 안전한 백신 운반이 가능해졌으며, 동결되었던 백신을 전량 수거하게 된 것입니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사회가,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도전하면서 하는 실수들을 견뎌 줄 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과감한 시도를 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집안 사람들이 비교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적인 영역이고, 집안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입니다. 공과 사의 문제에서 공적인 일에 나선 사람이라면 끝까지 그것을 완수하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일을 하면서 사적인 관계 때문에 일을 그르치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공인이 사적인 일로 발목이 잡히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 왔듯이,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았다면 과감하게 그 길로 끝까지 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다가오는 미래를 앞당겨서 지금 살아내는 일입니다. 이전 관계에 미련을 가지거나,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시골에서 소가 끄는 쟁기를 잡아보면 정말 뒤를 돌아보거나 한 눈 팔 새가 없습니다. 똑바로 앞만 보고 고랑을 만드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 새 쟁기는 땅을 파지 못하고 위로 뜨거나, 고랑의 모양이 비뚤배뚤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쟁기를 잡았다면 앞으로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은 쟁기를 잡고 엉뚱한 곳을 갈아엎으면서 좋은 밭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면, 지금의 많은 한국교인들은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하면서도 쟁기를 잡고 자꾸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봅니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이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아, 악을 미워하라!]

오늘 시편의 저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악을 미워하고, 선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먼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만이 선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옳다고 우기다가 결국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일을 하고야 맙니다. 어떤 문제는 선악의 저편에 있습니다. 선과 악이 분명히 구별되지도 않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모두가 어두우면 우리 공동체는 혼란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질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의 눈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세상에 가 있다면 하나님 말씀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속이 다 비치는 투명하고 맑은 마음으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의 뜻대로 진실되게 행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이 어려운 시국에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시편은 주님이 그의 성도를 지켜 주시며,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은 의인에게 비치며,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샘처럼 솟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개는 이 말씀이 옳습니다. '아멘'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주님이 그의 성도를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악인들의 손에서 건짐을 받지 못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연속적으로 찾아 올 때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욥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저히 주님을 기뻐할 수 없고,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를 드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어쩌면 좋을까요?

생명사랑교회에서 저를 담임목사로 불러 주셨을 때에 저는 단단한 각오를 하고 이 곳에 왔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니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4년의 목회가 그리 만만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큰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 할 때 속이 많이 상했고, 2년 마다 이사를 갔는데 가는 곳마다 속을 뒤집어 놓는 사건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상계동에 와서 겪은 일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목회자 혼자 속으로 끓이며 주님께 하소연할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욥이 하는 말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제가 했던 말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들어주시면, 내가 주님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치시는 그 손을 거두어 주시고, 제발 내가 이렇게 두려워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내가 먼저 말씀드리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내게 대답해 주십시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님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시렵니까? 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나를 공격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어릴 때에 한 일까지도 다 들추어 내시면서, 나를 고발하십니다. 내 발에 차꼬를 채우시고, 내가 가는 모든 길을 낱낱이 지켜보시며, 발바닥 닿는 자국까지 다 조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썩는 물건과도 같고, 좀먹은 의복과도 같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렇지는 않지만 때때로 저의 마음은 썩는 물건과도 같고, 좀먹은 의복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정직하게 살아도, 진정한 신앙인이 되려고 부단히 애쓰고 노력해도 불행은 찾아오고, 힘들고 아픈 시절들을 겪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도 똑같이 악한 사람이 될까요? 나도 자본주의에 물든 이들처럼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악착같이 돈을 모아 볼까요? 그럴 수는 없겠지요.

하나님의 발길에 채인 사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손에 쟁기를 잡았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놓아선 안 됩니다. 매 순간 쟁기를 잡은 그 손에 힘을 주고 오로지 앞서 가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묻기도 하고 따지기도 하면서 주님의 대답도 들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사건들이 지니는 의미를 철저하게 캐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동행할 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주님께서 내 멍에를 함께 메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멘 멍에가 예수님의 멍에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을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고통 중에서도 우리의 소중한 삶을 망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손에 쟁기가 들려 있습니까? 지금은 비상시국입니다. 비상시국에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정상이 모두 비정상이 되고 이제 새로운 정상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에 여러분 손에 쥐어진 하나님 나라의 쟁기를 꽉 붙들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밭을 굳세게 일구시기 바랍니다. 그 길에서 저와 여러분이 만나고, 우리들과 하나님이 만나고, 온 우주가 함께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오늘날 인류는 생사화복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교회도 존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붙들어 주소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않게 하여 주소서. 지치고 곤한 이웃들의 삶에 하늘의 생수를 부을 수 있도록 제자들인 우리가 정신 차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비상한 시국에 합당한 단단한 각오를 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생명사랑교회가 새 시대를 준비하며 지도력을 확보하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차량도 구입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가 지속되게 하여 주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우리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8년의 세월을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방황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거역하고 반항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할 사람들을 주시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숨어 계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주신 삶의 놀라운 선물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배운 진리와 성취할 수 있던 선한 일들을 보며 감격하며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받은 천국의 기쁨을 잘 간직하겠습니다. 바쁜 세상에서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며,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손에 쟁기를 쥐었다면 한 눈 팔지 마십시오. 끝까지 굳게 붙잡고 앞으로만 전진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뉴 노멀 시대 새로운 신앙을 가꿔가는 생명사랑 교우와 지금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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