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정종훈 목사(연세의료원 원목실장)

대학교회 주일예배 설교(2020.10.18.)

본문

출애굽기 20:8-11, 디도서 1:12-16, 마가복음 3:1-6

jungjonghoon
(Photo : ⓒ이화여대 대학교회 유튜브 영상화면 갈무리)
▲정종훈 목사(연세의료원 원목실장)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가득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한 사람들은 마치 디도서에 기록된 그레데인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레데인 선지자는 자기 동족에 대해서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로 살고 있고, 악한 짐승처럼 잔인하게 살고 있으며, 성실하게 일하기보다는 자기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레데인들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 시대 악한 사람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지금 세상은 악한 거짓말쟁이들이 뿌리는 가짜뉴스로 인해서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는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그것을 사실로 알도록 왜곡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스마트폰 영상시대가 도래하면서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공공의 선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활용되면 참 좋을 텐데,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얻기 위한 악의적인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어 문제입니다. 우리는 진짜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짜뉴스인데도 진짜처럼 미화되고, 진짜뉴스인데도 가짜처럼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진짜뉴스를 가려내려는 진실함의 열정보다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는냐의 여부가 기준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짜뉴스가 진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제대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삶의 최선이라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고난의 심연 가운데 있습니다. 밀림의 야수들은 자기보다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고 생존하지만,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를 않습니다. 배가 고프면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더 잡겠다는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수들은 나중에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서 미리 잡아놓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은 먹고사는 충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비축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 악한 짐승보다 더 잔인한 셈입니다. 예전의 게그 프로그램 가운데 '가진 것들이 더해'라는 멘트로 이어지는 꼭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없는 중에도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누려고 하는데, 부자들은 더 부자인 사람을 부러워하며 없는 사람들의 것까지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것을 풍자하는 꼭지였습니다. 이처럼 야수보다 더 야수적인 강자들로 인해서 약자들은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자신의 욕망과 자기 가족만의 행복만 충족되면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서 주변의 더 많은 사람들과 주변의 더 많은 가족들이 불행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집 아들들이 군대가서 고생하는 것은 자신의 관심 사항이 아닙니다. 자기 집의 자식이 좋은 성적을 받는 것과 모든 특혜를 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집 자식들이 차별을 당하거나 손해를 입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지구에 온난화가 계속되면서 엘니뇨 현상과 라니냐 현상, 폭우와 폭설 등 바다와 기후 현상에 온갖 문제가 야기되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국가들은 처음에는 자국의 노동자와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면서, 나중에는 가난한 약소국가들을 식민지로 개발하고 착취하면서 국가의 부와 자본가들의 부를 증대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든 말든, 다른 국가들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나나 우리나라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더불어 살아야 할 세상을 망가뜨렸고, 지금도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레데인들의 실상을 증언한 그레데인 선지자의 말이 참되다고 말하면서,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디도가 그레데인처럼 악하게 살고 있었다면, 바울이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꾸짖으라고 했을까요? 디도의 악이 악한 사람들의 악과 도낀 개낀 별 차이가 없었다면, 아니 디도의 악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하면, 바울은 디도를 먼저 꾸짖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분명 악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을 단단히 꾸짖으라고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과연 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우리는 분명 세상의 악한 사람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리 자신 없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한편 바울은 디도에게 그가 책망할 사람들이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감히 하나님이란 단어조차 입에 담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도나이'라는 다른 말로 대체해서 읽거나 아예 침묵하고 넘어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에게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유대민족의 해방자로서 여전히 살아계신 분이 아니라 관습적인 기억의 존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태도가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에 대한 공경의 의무를 외면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고르반'이라고 외쳤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헌물로 바치기로 예정된 것이니, 다른 용도로 쓸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정작 고르반의 재물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핑계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부모도 하나님도 우습게 만든 것인데, 그들의 말이 허탄한 말로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그들 삶의 지침이었습니다. 그들의 선조는 이집트 파라오의 전제주의적 지배 아래 노예로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이집트의 천민이었던 하비루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당시를 기억하며 새로 정착할 땅에서는 적어도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목적을 십계명에 담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4계명에서는 아들이든 딸이든, 남종이든 여종이든, 아니 가장 사회적인 약자였던 나그네라도, 안식일에는 쉬도록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계명은 노예를 거느린 주인이나 자유인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쉴만한 환경, 사람답게 살만한 조건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 시대에는 사랑의 동기가 빠지고 율법의 형식만 유대인들에게 남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손이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을 때,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의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율법의 목적,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사랑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와 달리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근거한 왜곡된 명령을 차단할 것을 디도에게 충고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악한 사람들을 책망하고 허탄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한 사람들의 명령을 차단하도록 디도에게 충고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디도와 그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음으로 형성합니다. 믿음 말고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만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분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던 과정을 직접 본 사람이 있었을까요? 태초는 하나님만의 시간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태초에 근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천지창조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존재의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도약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고,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기대치에 상응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출발은 논리적으로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고, 먼저 믿고 나서 알게 되는 과정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믿음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형제자매인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때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시화시켜주는 것, 맨살 같은 믿음에 옷을 입혀주는 믿음의 온전함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일체화시킨 온전한 믿음의 사람을 깨끗한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온전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자신을 회복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다른 사람들까지 넉넉히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전하게 믿지 않는 사람을 더러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미움과 시기, 욕심과 욕정 등 더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 역시 안중에 없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만 있고, 자기 가족만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관심이 없고, 자신의 관심만 있습니다. 그의 양심은 더럽습니다. 더러운 양심은 본래적인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양심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양심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양심에 따라서 선과 악을 구분하며 행동합니다. 양심의 어원을 보면, 희랍어는 syneidesis, 라틴어는 conscientia, 영어로는 conscience입니다. 이들 단어는 모두 '함께'라는 단어와 '알다'라는 단어 두 개의 단어로 합성되어 있습니다. 함께 아는 것이 양심인데, 이때 누구와 함께 아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조직 폭력배의 보스와 함께 아는 것은 폭력으로 나타날 것이고, 사기집단의 동료와 함께 아는 것은 사기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고, 하나님과 함께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할 때까지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랑으로 행동하기 전까지는 바른 양심을 견지할 수 없고, 온전한 믿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양심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운운하지 않아도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의 양심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양심이기에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굴과 얼굴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확고한 양심이 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디도서 말씀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시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16절입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에 비추어 말하면, 분명히 교회를 다니는 교인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그의 삶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사랑으로 진실되게 살아가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을 가증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나아가 모든 선한 일을 외면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입으로 시인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사람을 일컬어 '실천적인 무신론자'라 지칭하고 싶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재물일 수도 있고, 정치 권력일 수도 있으며, 자랑과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기가 얻고자 하는 목적의 수단이 되며, 그 결과 하나님은 스스로 만든 우상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에 하나님은 없고, 자신의 이해관계만 있게 됩니다. 그의 삶에 경건의 모양과 형식은 있지만, 사실상의 경건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없고, 우리를 질식시키는 악취만을 맡게 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이론적인 무신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달아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나약한 인간이 위로를 받기 위해서 만들어낸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회적인 통제를 하기 위해서 권력자들이 만들어놓은 통제 도구라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의 방법으로 규명할 수 없는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이론적인 무신론자들은 온전한 믿음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신앙적인 도전을 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진실한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싶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없다고 이론적으로 확신해 왔지만, 삶의 우여곡절 속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이론적인 무신론자들은 어느 순간 신앙인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면, 알 수 있는 기회라도 얻을 수 있을 텐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거나 알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말씀처럼 자기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을 향해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13)

존경하는 이화여대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속한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외형적인 교인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하지만,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 비해 신도가 제일 많다'는 한국 개신교가 교인의 수조차 허수로 과장하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난 8월 30일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코로나19 세계적인 재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 개신교의 신뢰도가 더욱 떨어졌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을 보며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더 좋아졌다는 한국인들의 응답은 1.9%, 이전과 비슷하다는 응답은 24.8%였던 반면에 더 나빠졌다는 응답은 63.3%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불교는 더 좋아졌다가 8%, 이전과 비슷하다가 86.8%, 더 나빠졌다가 5.3%였고, 가톨릭은 더 좋아졌다가 8.9%, 이전과 비슷하다가 83%, 더 나빠졌다가 8.1%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사회에서 질타를 당해온 것이 개신교였는데, 우리 개신교인들을 매우참담하게 만드는 통계입니다.

지금 면대면으로 또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 역시도 교회를 다니고 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는 알면서 교인으로서 살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사람의 눈은 피하고, 세상의 법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은 결코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이 정말 맞습니까? 민족시인 윤동주의 서시에 등장하는 시어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그런 심정으로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올곧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양심의 사람들,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시인하고, 사실상 하나님 없이 사는 껍데기 교인들이 세상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하는 말도 안 되는 자칭 목사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선을 도모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으로 표현하면,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양심의 사람들',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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