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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 매료되다-국내 첫 여성 조직신학 박사 박순경의 신학과 인생(2)
대담자 서광선, 글 이민애

입력 Oct 28, 2020 08:44 AM KST

편집자주- 국내 첫 여성 조직신학 박사 원초 박순경 박사(98)가 지난 24일 오전 자택에서 노환으로 소천했습니다. 본지는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회장)와 고 박순경 박사가 생전 진행한 특집 대담을 대담자와 해당 대담 전문이 실린 혜암신학연구소(『신학과교회』 2016년 겨울호) 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며 고 박순경 박사가 한국교회에 남긴 신학 유산을 기리고자 합니다. 대담은 총 3편에 걸쳐 싣습니다.  

국내 첫 여성 조직신학 박사 박순경의 신학과 인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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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혜암신학연구소 제공)
▲고 원초 박순경 박사 살아생전 대담을 진행하는 모습.

서광선: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부터 그렇게 마르크스를 생각하신 거예요,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자예요? 그리고 1945년 해방 정국에서 좌우 갈등이 있을 때 선생님은 여운형 씨를 지지하셨죠?

박순경: 여운형 선생 계통이었는데, 그 이후에 아마도 여운형 선생님 보다 더 급진적인 사상을 가졌을걸요. 지금도 급진적이고 .... 또 한 번 마음대로 사상을 풀어놓으라고 하면 얼마든지 급진적으로 풀어요. 그런데 내가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적응을 많이 했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리 돌아가시기 전인 1943년에 나는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거기서부터 내가 확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때 나에게 민족이라는 것이 떠올랐던 거예요. 그 민족의 문제가 떠오르기 전에는 뭘 생각 했냐면, 인간의 귀신들을 생각했어요. 그저 귀신들이 내 주변에 우글우글해요. 그리고 아프면 헛것이 보이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내가 윤회설을 가지고 씨름을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가 아들 넷을 낳았는데 막내가 제 목숨을 다 못 살고 죽었습니다.

업혀서 나갔다가 상량식 떡 얻어먹고 들어와서는 급사했어요. 옛날 사람들은 잘 모르고 애에게 떡을 먹였잖아요. 아마 그게 인절미였던 것 같은데 목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 태몽이 개예요. 그래서 그 죽은 아이가 재생한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렇게 내가 윤회설을 가지고 자꾸 추궁하다 보니 사람들을 봐도 저 사람은 전생에 뭐였겠다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그런 생각이 막혀버렸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한 두세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의 친구가 상처를 하여 아들 하나를 우리 집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아이를 그렇게 좋아한 겁니다. 걔가 어리니까 내가 어머니 품에서 내려나와 앉아서 걔가 젖을 먹게 하려고 나는 일부러 안 먹는다고 핑계를 댔어요. 그리고 걔가 대소변을 보면 식구들이 야단들 했는데 나는 그런 야단법석이 그렇게 보기 싫더라고요. 그런데 걔가 죽었어요. 그래서 나는 맨날 울면서 걔를 데려오라고, 먼 산 바라보면서 걔를 생각하고 그랬습니다. 그 다음부터 꿈에서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를 찾아다니는 꿈을 열여덟, 열아홉 살까지 꿨어요. 한번은 그 모자를 찾아다니는데 어느길을 따라가다 보니까 큰 종각이 하나 나와요. 내가 그 종각을 돌면서 '아 걔가 이렇게 종각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마지막 꿈이고 그 다음부터는 안 꾸었어요.

그렇게 그 아이의 꿈을 더 이상 꾸지 않으면서 떠오른 것이 민족이예요. 내가 세브란스에 1943년에 들어갔으니까 열아홉도 채 못 된 나이였죠.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 때 나보고 답사(答辭)를 하라는 겁니다. 나는 답사가 뭔지도 모르고 부끄러웠는데 나가라고 하니까 그냥 냅다 나가서 "민족의 영웅이여 일어나라!"라고 소리를 질렀거든요. 그렇게 크게 외마디 소리를 외치고 들어왔어요. 그게 시작이 돼서 내가 민족을 찾기 시작했는데, 세브란스 어디 구석에서 민족을 찾겠어요? 그러고 있는데 동기 중 김옥선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오빠가 서울대에서 민족운동, 공산주의 운동을 했어요. 그 오빠가 폐병이 걸렸고, 그의 둘째 오빠는 이미 이전에 운동하다가 감옥에서 옥사했지요.

서광선: 일제하에요?

박순경: 네, 일제하에 항일운동하다가 죽었어요. 그리고 큰 오빠가 중퇴를 했었는데, 가끔 옥선이가 보약이 귀한 시절에 토닉을 한 병씩 오빠드린다고 들고 갔었어요. 나는 민족을 찾으려고 했었으니까 김옥선에게 접근을 했는데, 김옥선은 종종 형사들이 와서 지키곤 했습니다. 내가 옥선이를 찾아가는 것을 보면서 선생들은 나를 염려했지요. 그런데 한번은 김옥선이 오빠한테 가서 돌아오질 않아서 내가 토닉 한 병을 사서 신의주로 갔습니다. 이름도 주소도 안 묻고 한밤중에 기차를 타고 비밀리에 움직였지요.

서광선: 서울에서요?

박순경: 네, 서울에서 출발했어요. 기차를 타고 좌석도 없으니까 바닥에 앉아서 그렇게 밤을 새면서 그 이튿날 오후 서너 시경에 도착했어요. 신의주역에 내려서 김옥선 네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오.

다같이: 하하하.

박순경: 알음알음 물어서 그 집에 찾아가니까 집은 괜찮았어요. 농가인데 산이 있었고, 거기 그의 큰오빠는 앓아누워 있고, 김옥선은 내가 가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지요. 내가 거기서 일주일간 묵고 돌아왔는데, 그때 김옥선 큰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가 나에게 무슨 설득을 했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가 거기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와 민족을 떠올렸거든요. 피지배 민족은 공산주의가 아니면 자본주의 세계를 택해야 되요. 서양 미국을 택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서양은 우리 식민지 역사에 있어서 일본과 협잡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건 안 된다, 그러니까 길이 공산주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기독교와 민족과 공산주의, 이 삼자가 만나야 된다는 것을요. 이것을 8.15전에도 생각했고 그 이후에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44년에 김옥선과 같이 여운형 선생을 만나러갔어요. 해방되기 전이었죠. 갔더니 집이 왁자지껄했는데 거기가 아마 혜화동이었던것 같습니다. 왁자지껄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애들이었지 않아요? 그래도 그 어른이 딱 나와서 우리를 만나줬어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도 잘 안 나는데 말이지, 그분 풍채가 기가 막히게 정말 좋았어요. 여운형 선생이 풍채가 아주 좋아요. 그냥 질려서 나는 눈도 살짝 떠서 얼른 슬쩍 얼마 보지도 못했지요. 그런데 딱 한 마디 기억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일본이 항복할거다"라고 했어요. 그때가 44년이었으니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조금만 더 참아라, 기다려라" 이래요. 참긴 뭘 참아요, 우리는 어렸기에 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하여튼 그 말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운형 선생의 딸들도 그렇게 사모하고 흠모하고 그랬어요.

서광선: 그분들은 아직 살아 계신가요?

박순경: 지금은 다들 없지요. 하여튼 그 만남이 계기가 되어 공산주의 운동하는 사람 몇을 만났어요. 그런데 이것은 신론(神論)에서 걸려요. 그 사람들은 다 무신론자들이죠, 그런데 나는 귀신들을 봤잖아요? 하다못해 마귀들도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안 계시느냐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나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서광선: 그러면 김옥선 씨나 여운형 씨를 만나기 전에, 그러니까 세브란스의 고등간호학교에 들어가시기 전에 이미 기독교 신자였어요?

박순경: 내가 내 주변에 있는 귀신들을 물리쳐야 되니까 기독교가 필요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불교에 심취하셨던 분이고 아버지는 유학자셨어요. 내가 두 분을 다 닮은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는 예수님을 야소 씨라고 하시더라고요.

서광선: 맞아요, 옛날에는 그렇게 표현되곤 했죠.

박순경: 그러시면서 야소 씨는 서양 종교이기에 안 된다고 하시고, 나를 교회에 못 가게 하셔서 내가 몰래 나가 기도하곤 했죠. 그리고 나는 학교교육 과정을 순서대로 못 밟았었는데, 아버지의 친구 한학자가 학원 선생님이셨는데 그분께서 우리 아버지를 설득하셔서 내가 그 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2학년에 편입되어 시작했지요.

서광선: 그게 미션스쿨이었나요?

박순경: 그렇지는 않아요. 한학자인데 좀 개방적인 분으로, 아버지와는 아주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옮겨놨는데 내가 그걸 따라갔어요. 그리고 좀 있다가 원주 봉산소학교(국민학교)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어요. 그래서 5, 6학년은 일제하의 국민학교에서 공부했지요.

서광선: 그때 일본말로 공부하셨어요?

박순경: 일본말로 공부를 했는데 잘은 못했죠. 그래도 내가 언어에 소질이 있기 때문에 일본어 문법은 잘 알았어요. 공부하면서 일본말을 습득한 셈이지요. 그 다음에 서울사범에 시험을 쳤는데 거기서 떨어졌어요. 글을 쓰라고 하면 내가 쓰겠는데 그 해 따라 유난히 구술시험을 다봤거든요. 내가 말을 잘 못해서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서광선: 믿어지지가 않네요.

박순경: 떨어져가지고 갈 데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고아 사업을 해야겠다 싶어서 두 친구들과 고아원을 찾아다녔고 고아원으로 갈 준비도 다 마쳤었어요. 그런데 원장이 나보고 안 된다고 했어요. 왜냐고 물으니, 내가 거기서 밥을 잘 먹질 못했었는데 원장이 그걸 봤는지 어쨌든 나는 실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고아원에 못가고 있었는데 해방이 되었어요. 해방이 되니까 비로소 공부를 해야겠다는 열정이 다시 생기더군요. 어떻게 뭘 공부해야할지 모르잖아요? 갈 데도 없고. 그런데 안국동 중앙중학교 옆에 이희승 선생님 같은 훌륭한 분들이 한글 강습소를 만드셨어요.

한글 강습회에 갔습니다. 세브란스에서 매일 8~10시간 근무한 뒤 중앙중학교가 있는 안국동까지 걸어서 오갔어요. 제대로 먹는 것이 없이 일했습니다. 그런데 한글 강습소에서 하루 6시간씩 공부했지요. 그렇게 3일을 다니다가 결국 병이 났는데 늑막염이었습니다. 절망을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해 있었는데, 이때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을 때였거든요. 1945년에 두 분 다 돌아가셨으니... 그만 인생 허무감에 떨어져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광선: 완전 고아네요, 그때부터는.

박순경: 그렇죠, 고아죠. 그래서 그때부터 부모님에 대한 내 불효 때문에 밤마다 울었습니다. 한 14, 15년을 울었어요, 미국 가서도....

서광선: 왜 눈물이 그렇게 나요?

박순경: 잘 때면 아주 울 채비를 하고 잤어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우리 부모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예요, 자식들도 다 멀어지고.... 부모님을 기억하면서 맹숭맹숭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울면서 불효자식인 나의 죄를 회개했지요. 그러다가 1946년에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광선: 세례는 언제 받으셨어요?

박순경: 세례는 46년에 감리교신학교에 들어가서 받았지요.

서광선: 그럼 감리교인이군요?

박순경: 감리교이든 다른 교파이든 그런 건 상관이 없는데, 내가 처음에는 조선신학교를 찾아갔었어요. 조선신학교는 장로교죠. 그런데 세브란스 졸업 가지고는 입학이 안 된다고 그러더군요. 학력이 순조롭지 않았지요. 내가 상명 실천 여학교를 들어가서 본과 3년은 너무 길어서 전수과 2년을 했어요. 어딜 들어가든 1등을 하는데 내가 자꾸 1등만 하다가 졸업 때는 아마 4등인가 5등을 했어요. 어쨌든 그것 가지고도 학력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수간호원 하다가 늑막염 걸려서 오빠네 집에 있다가 감리교 신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본과는 안 된다고 해서 전수과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학생들 실력은 본과나 전수과나 비슷했고, 나중엔 두 개가 합쳐졌어요. 그래서 3년제 본과생이 되었죠.

서광선: 그때 허혁 박사가 계셨어요?

박순경: 네 계셨어요. 좀 냉정하고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사람이었지요. 감신에서 제가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정치계에서 여론조사를 왔을 때 내가 여운형계를 지지한다고 손을 들었거든요. 그랬더니 학교가 발칵 뒤집혔죠. 하나님의 동산에 붉은 세력이 틈타 들어왔다면서요. 나를 내쫓으려고하는데 그때 날 옹호해준 사람이 윤상범 교수였고, 몇몇 학생들도 같이 옹호해줬어요. 그래도 공부하러 왔는데 어떻게 내쫓느냐면서요.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울기만 했었죠. 어쨌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은 했습니다.

서광선: 그러다가 6.25 한국전쟁 때는 그대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나요?

박순경: 아니에요. 감신 재학 시기에 내내 어학에 치중해서 희랍어, 영어, 독어, 불어를 공부했어요. 오빠가 돈을 얼마간 지원해주면 굶으면서도 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서울대 편입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들어갔어요. 고려대도 합격했는데 서울대가 학비가 싸고 거리상으로도 가까웠어요. 그게 1948년경이었습니다.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거기서 1년을 지냈는데 그래도 거긴 독일어로 세미나를 했거든요. 라틴어도 했어요. 나중에 미국에 가서 모두 다시했죠, 영어, 독어, 불어, 희랍어, 히브리어까지. 제가 에모리대학에 다니면서 그 언어들을 모두 별도로 공부했어요. 그때 운이 좋았던 것은 저를 도와준 맥 스톡스(Mack B. Stokes) 교수의 가족이 한국의 선교사이셨습니다. 동생 찰스 스톡스가 한국에 있었던 것이지요. 맥 스톡스 교수는 미국 에모리대학에 있으면서 나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언어를 배우겠다고 하면 다 허락을 해줬어요. 돈을 현금으로 준적은 없고 사무적으로 처리를 했지요. 나는 식권을 사무실에서 타서 그것을 식당에 가서 돈으로 바꿔서 식비를 절약하고 그것으로 책을 사서 공부했죠. 먹을 것이 많은 미국에서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서광선: 선생님을 후원해준 것은 에모리대학이었군요.

박순경: 네, 에모리가 디딤돌이 되어주었어요. 하지만, 맥 스톡스 교수와는 신학관이 맞지 않았습니다. 맥 스톡스는 보스톤의 퍼스널리즘 계통을 밟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탁월한 인간형으로 보고, 인간의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관점이지요. 나는 한국에서부터 바르트(Karl Barth)를 공부했거든요. 내가 스톡스 밑에서 공부했다면 장학금이라든지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많았겠지만 내가 바르트편이니까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북쪽의 드류대학교로 갔습니다. 유니언신학교와 하버드에도 지원을 했었어요. 등록금 장학금을 약속받았는데 드류대학교가 전액 장학금을 약속해서 그쪽으로 갔습니다.

서광선: 유니온신학교에 1년인가 계셨잖아요?

박순경: 그건 에큐메니칼 스터디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스톡스 교수가 그 프로그램을 소개해줘서 알았지요. 자기 밑에서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미국 사람들은 이렇게 아량이 있어요. 그렇게 제가 그의 추천으로 유니언을 거치면서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에 대한 환상을 버리게 되었어요. 틸리히(Paul Tillich)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틸리히의 카이로스론이 사회주의와 가까웠거든요. 그런데 틸리히도 니버도 아니었어요, 바르트만이 달랐지요. 바르트는 대단한 사회주의 계열 신학자이지요.

칼 바르트의 '제3의 길'과 '민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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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혜암신학연구소 제공)
▲고 박순경 박사의 저택에서 서광선 박사가 집어든 사진은 박순경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호송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서광선: 선생님은 한국 여성 신학자로 철저한 바르트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르트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대성통곡했다는 소문이 지금 신화가 된 정도입니다. 왜, 무엇이 바르트 신학에 끌리게 되셨는지요.

박순경: 얼굴을 대한 적은 없어요. 바르트는 미국의 초청을 여러 번 사양했는데, 꼭 한번 미국에 오셨지요.

서광선: 프린스턴에서 초청을 했죠?

박순경: 프린스턴에서 초청한 것 하나만 받았어요. 유니언에 파우크(Wilhelm Pauck)라는 역사학자가 있는데, 그이가 바르트와 가까웠지요. 파우크가 바르트 보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은 미국에 대해서 너무 편견이 심한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안 오시는 거죠? 당신은 미국 모르지 않지 않나요?" 이랬더니 바르트가 파우크를 쳐다보다가 "사람이바닷물을 다 마셔봐야 짠 거를 아느냐? 혀끝으로도 짜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답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냥 깔깔거리고 웃었다지요.

서양 사람들은 참 여유가 있어요. 우리 한국 사람 같으면 '제까짓 게 뭐!' 이럴 거 아니에요? 서양 사람들의 너그러운 부분은 한국 사람이 배워야 돼요. 그렇게 껄껄거리고 모두 웃었어요. 바르트의 유머가 아주 대단하거든요. 한번은 그가 이발하러 갔는데 이발사가 "당신은 유명한 칼바르트를 아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바르트가 올려다보면서 "그럼 알다마다요, 내가 그분의 수염을 매일 아침 깎아준다우"라고 했답니다.

다같이: 하하하하하.

박순경: 바르트가 유머가 아주 유명해요.

서광선: 그런데 바르트 돌아가셨을 때 정말 울었어요?

박순경: 제가 울었냐고요? 본래 눈물을 잘 흘리니까 펑펑 울었지요. 그렇다고 통곡을 한건 아니었고요.

서광선: 소리 없이 눈물을 그렇게 흘리신 이유가 뭐에요? 뭐가 그렇게 안타까워서 우셨어요?

박순경: 큰 신학자가 갔다 이거였어요.

서광선: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박순경: 하하, 그거 이상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또 하나, 1974년에 바르트가 있었던 학교 바젤에 갔을 때 생긴 일이 있군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에 내가 민족 문제를 다뤄야겠다 싶은데 먼저는 이념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유럽에 간 거예요. 1974년에 나가서 1976년에 들어왔는데, 내가 바젤에서 변선환 교수(감신대)를 만났거든요. 내가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러 왔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눈을 아주 휘둥그레 뜨면서 "한국의 반공은 세계적으로 공헌을 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하하.

그러니까 그때부터 변선환과 나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어요. 내가 변선환 교수에게 중매했던 신옥희 선생은 나를 보면 "박 선생님 참으세요, 참으세요"라면서 중재를 하곤 했지요. 그러면 내가 "이게 참을 문제야?"라면서 아주 만나기만 하면 둘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싸웠어요. 나도 안지고 변선환도 안지거든요. 둘이 아주 눈을 부라리고 튀어나온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그렇게 야단을 부렸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렇게 싸우면서도 역시 친분이 있으면 달라요. 변선환이 나를 데리고 안내를 해줘서 바르트 무덤에 갔지요. 내가 거기서 무덤 앞에서 절했는데 그것을 변선환이 카메라로 찍어서 나중에 사진을 나에게 주었어요.

서광선: 혹시 그 사진 있어요?

박순경: 어딘가 있을 거예요. 그때 내가 바르트 무덤에서 절을 한 걸두고 "이제 마지막"이라고 그랬다는 소문이 돈 겁니다. 스위스에 있는사람들은 그런 쓸데없는 것을 또 좋아해요. 막 좋아하면서 그걸 한국에도 퍼트렸어요.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2014년 11월에 나의 책출판기념회 때 밝혔어요. 함세웅 신부가 축사하면서 "바르트를 넘어서"라고 그럽디다. 나는 그동안 바르트를 넘어선 사람을 못 봤습니다. 그런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바르트가 우리 민족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문제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놓여있을 겁니다. 나는 우리 민족이론과 통일이론을 말하고자 해서 한국신학으로 전환해야 했을 뿐이거든요.

서광선: 마르크스도 우리 민족을 모르잖아요. 바르트보다 더 모를걸요?

박순경: 내가 공부를 많이 한 건 아니지만 마르크스를 들여다보면 이게 성서와는 쌍둥이 같아요. 그래서 내가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와 쌍둥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이것을 홍동근 목사가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미국과 북측 사람들이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들도 다 전달이 되었어요. 그런데 내가 구약을 공부하면서 무슨 전제를 가지고 추구한 것은 아니었어요. 구약의 예언 전통의 종말론, 묵시론적 역사 최후의 종말론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서 비롯되더라구요. 이것은 다름 아니라 역사 혁명의 계기들입니다. 칼 마르크스의 혁명론이 그러한 구약의 종말론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하지만 묵시론적 종말론과 관련해서는 무슨 이원론이니 신화니 갖다 붙이면서 완전히 다른 말을 하는 경우들이 많더군요. 마지막 최후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처음을 이야기해야 하는 겁니다. 창조 이전으로 가서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혁명의 계기를 제시하시지요. 그래서 나는 구약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혁명을 말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 칼 바르트 그리고 스위스 종교 사회주의자들도 혁명을 말하지요. 종교사회주의자로는 레오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tz), 헤르만 쿠터(Hermann Kutter) 등이 있습니다. 나와 같이 살고 있는 한신대 김애영 교수가 이걸로 박사논문을 썼어요.

종교사회주의에서 나온 게 '하나님의 혁명'이라는 개념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이 유럽에 많아요. 우리나라가 반공 때문에 이렇게 됐지만, 서양에는 아주 많습니다. 바르트는 자펜빌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노조운동을 했거든요. 바르트는 '빨갱이 목사'라고 일컬어졌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주의 치하에서 겪은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면 자본주의로 가야하는 운명이었죠. 식민지배 체험을 한 아시아 민족들이 대체로 처음에는 사회주의로 될 뻔 했는데, 미국의 입김이 세고 영 ․ 미의 세력이 강하니까 우리도 미국을 따라갔어요. 그런데 사실상 식민주의 피억압 민족은 미국을 따라갈 수 없지요. 하지만 그때 나는 미국을 그렇게까지 인식하지 못했었고, 어쨌든 자본주의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공산주의로 가야겠죠. 그래서 우리민족과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만나야 된다고 내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서광선: 선생님이 80년대 초부터 민족의 미래와 통일 문제에 대해서 책을 많이 쓰셨는데, 여성신학자의 입장에서 선생님의 통일의 비전을 말씀해 주십시오.

박순경: 네, 그거 이전에 조금 더 이야기할게 있어요. 내가 어떻게 남미 해방신학에 관여하게 됐는지에 관한 것인데, 제3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자협의회(Ecumenical Association of Third World Theologians, EATWOT)라는 게 있어요. 내가 1981년도부터 참여를 했지요. 한국 연락책을 맡았었습니다.

서광선: 그때는 제가 해직되어 있었을 때인데 그때 선생님 때문에 제가 여기 들어오게 되지 않았습니까?

박순경: 아, 그랬구나! 내가 제3의 길이라는 것을 홍콩회의 때 자꾸 얘기했잖아요? The Third Way, 제3의 길이란 것이 어디서 나왔냐는거예요. 그때 서광선 박사님과 이우정 선생님이 제게 반립(反立)했어요. 두 분은 나의 말이 무슨 소리냐 이거였지요. 이우정 선생은 북한도 안 되고 남한도 안 된다는 입장, 오직 김대중 선생만을 따르려는 입장이었어요. 서 박사님은 제가 말하는 제3의 길이 사회주의 지향이라는 것에 대해 반립해 계셨구요!

서광선: 저는 순교자의 아들이거든요.

박순경: 그래요 나도 알아요. 서 박사님 아버님이 그렇게 총살되셨지요. 김동수 박사도 그래요. 그런 부분은 제가 이해를 하지요. 하여튼 그 제3의 길이 어디서 나왔냐면, 바르트가 "between East and West"를 말했는데 이게 제3의 길이예요. 그가 말한 제3의 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몰라요. 1940년대에 동유럽을 방문했을 때, 그는 동유럽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와 협력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체코에 조셉 로마드카(Josef Hromadka)가 있죠. 로마드카는 공산주의 편이었는데 한국 편도 많이 들었어요. 한국전쟁이 났을 때 미군을 파병하면 안 된다, 분단 문제는 한국이 해결하게 하라고 말했던 사람이에요. 그가 WCC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죠.

그 사람이 바르트와 가까웠고, 바르트는 동구권에 가면 공산당에 협조하라고 했었지요. 공산당은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혼동하지 않는데, 서양 자본주의는 기독교를 기독교 자본주의로 혼동한다는 겁니다. 그는 동유럽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많이 했어요. 나는 제3세계 에큐메니칼신학자협의회에 가서 이것을 강조했고, 제3의 길을 소셜리스트(사회주의)라고 주장했습니다. 소셜리스트가 아니면 캐피털리스트(자본주의)가 되어버리는 거니까요. 다른 길이 없어요. 자본주의자들의 종말을 우리는 현재 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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