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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방언(15)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역사신학·교회사)

입력 Nov 14, 2020 01:19 AM KST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VIII.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을 쓸 때에는 방언이라는 단어를 모두 뜻과 메시지가 있는 언어들(glossai, 복수형, 외국어들, languages)로서의 LT방언만을 의미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2장, 10장, 19장)에서 썼던 것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4장에서는 방언이라는 말을 단수형(glossa, speaking in tongue)으로 쓰기도 했고 복수형(glossai, speaking in tongues)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단수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2절, 4절, 9절, 13절, 14절, 19절, 26절, 27절 등 여덟 번이고, 그리고 복수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5절(두번), 6절, 18절, 21절, 22절, 23절, 39절 등 모두 여덟 번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9절에서 단수형으로 사용된 단어(dia tes glosses, "혀로써," by the tongue-KJV, with your tongue-NIV)는 "방언"이 아니라 단순히 발성기관인 "혀"(舌, glosse, tongue)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고(사도행전 2장 3절에서는 "불의 혀"라는 단어를 복수형으로 사용했음), KJV 영어성경에서 unknown이라는 낱말이 삽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비록 문장의 구조 상 단수형으로 사용되었지만("너희에게...... 방언도 있으며," every one of you...... hath a tongue-KJV, everyone has...... a tongue-NIV), 실제적인 의미는 LT방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KJV 영어성경에서 unknow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혹은 많은 방언들"(all or many tongues)이란 표현에서는 복수형을 썼지만, "각 방언"(each tongue)이란 표현에서는 단수형을 썼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이라는 낱말을 열여섯 번 사용했는데, UT방언을 가리키는 말로는 여섯 번을, LT방언을 가리키는 말로는 아홉 번을 사용했습니다. 한 번은 발성기관인 "혀"(舌)를 의미했습니다. 같은 장(章)에서 "방언"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단수형 단어와 복수형 단어, UT방언과 LT방언을 의도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했던 깊은 뜻 혹은 숨은 뜻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을 쓰면서 "방언"이라는 말을 복수형과 단수형으로 썻는데, 단수형을 쓸 때에는 "대체로" U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룰룰룰루, 쌀라쌀라, 할렐루루루, 쉬쉬룰룰루" 등 중얼중얼하는 소리(voice)는, 다양한 종류의 언어들(LT방언들, 고전 12:10, "각종 방언 말함을," divers kinds of tongues-KJV, speaking in different kinds of tongues)과는 달리 모두 비슷비슷한 소리(similar voice)로서 결국 하나라고 보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러한 UT방언을 단수로 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UT방언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습관적으로 행하던 이교적인 신앙행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UT방언은 거짓방언, 가짜방언, 마귀적인 방언임을 암시하였고, 그들의 관행과 주장에 대해서 풍자적으로 비꼬는 어투로 비판을 하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두 가지 종류의 방언(UT방언과 LT방언)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지만, 성경적인 방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LT방언만이 성령께서 기적적으로 베푸신 성경적인 참 은사(恩賜, gift)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장에서 단 한번, 26절에서 바울 사도는 단수형(glossa)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UT방언이 아니라 LT방언입니다.

그래서 영국왕 제임스 1세의 주도 하에 1611년에 번역·출판된 KJV(King James Version) 영어성경에서는, 단수형 단어들 앞에 "unknown"(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뜻 모를)이라는 단어를 여섯 번(고전 14:2, 4, 13, 14, 19, 27) 이탤릭체로 쓰거나 괄호 속에 넣어서 삽입을 해 놓았습니다[KJV 영어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글성경으로 출판한 정동수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하는 단수형 단어 unknown tongue을 "알지 못하는 언어"로, 복수형 단어 tongues를 "타언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언어"(unknown tongue)를 그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외국어(unknown foreign language)를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을 하며 설교했습니다. 정동수 목사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이라는 말을 단지 언어 혹은 외국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만 썼다는 것이고,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중얼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기도라는 개념으로는 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동수, "방언 및 각종 은사 강해 4-5(고전 12-14장),"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tHdq5QO8Lc, 2019년 3-4월 접속.]. 희랍어원어성경에는 없는 낱말이지만 아마도 독자들이 보다 쉽게 잘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로 KJV 번역위원회가 삽입을 해놓은 것 같습니다.

a. 14장 1-5절

(고전 14:1-5)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린도전서 14장 1절의 말씀은 14장 전체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4장은 전장의 마지막 문장(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을 이어받아 "그 사랑을 추구하라"(Diokete ten 'agapen, Follow after charity-KJV, Follow the way of love-NIV)는 권면과 명령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을 의미하며, "더욱 큰 은사"(고전 12:31a, ta charismata ta meizona, the best gifts-KJV, the greater gifts-NIV)와 "가장 좋은 길"(고전 12:31b, kath 'uperbolen 'odon, a more excellent way-KJV, the most excellent way-NIV)을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15가지 속성을 지닌 아가페 사랑(고전 13:4-7)을 말합니다.

"추구한다"(dioko)는 말은 "뒤쫓아가다"(follow after), "사냥하다"(hunt), "집념을 가지고 추적하다"(chase after with intensity)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박해를 하다"(persecute, 고후 4:9)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John MacArthur, I Corinthians, The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 (Chicago: Moody Press, 1984), 371.]. "그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은 바울파와 아볼로파와 게바파와 그리스도파로 분열되어(고전 1:10-12) 분쟁하고 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라는 권면이기도 하고, 동시에 거짓방언 은사(UT방언)를 퍼뜨리고 있는 광명의 천사들을 향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고전 1:23)로 인해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이미 체험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거짓 은사로 인해 분열과 무질서와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며,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추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zeloute de ta pneumatika, desire spiritual gifts-KJV, eagerly desire spiritual gifts-NIV)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신령한"이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2장 1절에서도 "형제들아 신령한 것들(spiritual gifts-KJV, NIV)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신령한 것들"(ta pneumatika)은 "영적인 것들," "영적인 선물들"(spiritual gifts), "성령의 은사들"(gifts of the Holy Spirit)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것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무언가 "신비스러운 것들을 사모하라"(desire mystical things)는 의미로 오해하게 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적으로 베풀어주시는 구체적인 성령의 은사들(선물들, gifts)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라"(eagerly desire)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mallon de 'ina propheteuete, desire..... but rather that ye may prophesy-KJV, eagerly desire..... especially the gift of prophecy-NIV)는 말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주제요 결론입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14장에서 UT방언의 근거를 찾고 있고, UT방언 기도의 은사를 간절히 추구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4장에서 "UT방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장(章)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초점은 예언에 있습니다. 결코 방언에 있지 않습니다.

"특별히"라는 번역보다 "오히려" 혹은 "차라리"(malon de, but rather)라는 번역이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러나 혹은 그렇지만"(de, but)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그러나 오히려 혹은 그렇지만 차라리 예언을 하려고 하라"(mallon de, but rather that ye may prophesy-KJV)고 명령하고 있습니다[David E. Garland, I Conrinthian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Academy, 2003), 632.]. 이 문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어 했던 내용의 핵심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방언을 최고의 은사로 여기면서 방언은사 받기를 그토록 사모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혹은 "그렇지만 차라리"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UT방언 주창자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을 방언 장(章)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4장은 방언 장이 아니라 예언 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칭시켜 가면서 대조법을 사용하여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더 가치있는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언을 더욱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은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예언(豫言)과 예언(預言)입니다. 예언(豫言)이란 미래에 발생하게 될 일을 점을 치듯이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預言)은 예치되어 있는 말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예치해 두셨는데, 그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것을 알려주거나 선포하는 은사를 뜻합니다. 문효식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전자의 의미를 중시하여 '미리' 예(豫) 자를 사용하여 예언(豫言)이라 번역하였고, 중국어 성경에서는 '맡길' 예(預) 자를 사용하여 예언(預言)이라 번역했다"[문효식,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 66.]. 아마도 중국어 성경에는 예언(預言)이라고 되어 있나 봅니다.

예언(預言)이란 개인의 장래 일을 점치듯이 알려주는 예언(豫言)이 아닙니다. 후자의 예언은 개인의 장래사에 대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행위로서,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이방종교의 악습이었습니다(레 19:31; 신 18:9-12; 렘 29:8-9):

(레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점쟁이길흉을 말하는 자요술하는 자무당이나, 진언자신접자박수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쫒아내시느니라."

(렘 29:8-9)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전자의 예언(預言, prophecy)은 마치 예금자가 은행에 돈을 예치(預置)하듯이 하나님께서 누군가(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 Navi', 예언자 혹은 선지자)에게 예치하고 맡겨 놓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겸허하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대언"(代言)하거나[정동수 목사는 한글성경에서 예언(prophecy)을 "대언"(代言)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해 주거나 가르쳐 주는" 은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대로 말하고 가르치는 특별한 은사가 바로 예언(預言)의 은사였습니다. 신약성서가 완성된 이후에는 예언(預言)이 성취가 되었고 종결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예언의 말씀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성경 말씀을 올바르게 깨달아서 잘 가르치고 선포하는 은사를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후 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1세기 당시의 코이네 희랍어 문장에서는 오늘날의 한글이나 영어 문장에서처럼 의문표(?)나 느낌표(!)나 콜론(:)이나 세미콜론(;) 등의 부호들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용문을 표시해 주는 따옴표(" ")가 사용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이 주장하는 말인지 자신을 비판하는 상대방의 말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대의 문장에서는 글을 쓰는 사람이 상대방의 말을 인용할 경우에는 따옴표를 사용해서 그것이 상대방의 말이라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희랍어원어성경에서는 따옴표 부호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글에서도 "바울 자신의 주장"인지 "고린도교회의 일부 방언주창자들의 주장"인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의 모든 문장에서 희랍어알파벳을 대문자로만 썼기 때문에 문장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경해석자는 전체적인 문맥이나 문장의 앞뒤를 세심하게 살펴가며 문장을 읽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주장의 핵심적인 근거를 14장 2절과 4절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번역 상의 미비 혹은 오류로 인해, 그들은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이 구절들의 진의를 왜곡하여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2절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일부 방언주창자들의 주장을 인용해서 말한 것이고, 3절은 사도 바울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고전 14:2-3)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희랍어원어성경에는 1절과 2절 사이에 중요한 접속사 gar(왜냐하면, 왜 그런가 하면)가 사용되었는데, 한글성경에는 이 단어가 번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그렇지만 오히려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 후에, 왜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2절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혹은 '왜 그런가 하면' UT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예언하는 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어떤 신(a god)에게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사용된 "방언"(glosse)이라는 단어는 단수형입니다. 즉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리는 UT방언을 가리킵니다. 이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소통하는 것" 혹은 "복음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방언 본래의 본질(언어로서의 LT방언)을 벗어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 예언은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speaking to men, 언어 혹은 외국어)이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praying to God)이 아닙니다[권동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마귀의 걸작품 가짜방언," [Youtube 동영상] https:// www.youtube.com/watch?v=07lEO0Wo_T8, 2019년 4월 30일 접속; 권순현, "가짜 방언기도와 성경적인 방언,"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z-dIKtJkTw, 2019년 5월 7일 접속.]. 원래 방언이나 예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방언(LT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적인 역사로 "하나님의 큰 일" 즉 복음의 메시지를 사람들의 언어(외국어, LT방언)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은사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방언은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을 한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지금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비꼬며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말하는 자기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사도 바울은 냉소적으로 비꼬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는 말도 "(UT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자신의 영으로 신비(musteria, mystery)를 말한다고 (주장)한다"라는 뜻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비밀"(secret)로 번역이 되어 있어서 오해를 빚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는 LT방언은 영과 마음이 하나 되어서 말하는 자의 뜻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데,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UT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랍어원문은 "비밀"이 아니라 "신비"(musteria, mystery)입니다. 이 말은 은밀한 것들(secret things)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것들(mysterious things)입니다. 그들은 신비종교(mysticism) 혹은 밀교(비밀종교, mystery religion)에서 중얼중얼 기도하던 그들의 옛 습관을 다시 반복하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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