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여호수아서 1장 6-9절, 시편 119편 73-80절, 누가복음서 22장 35-38절

[코로나로 바뀌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최근 며칠 사이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경고한대로 겨울이 다가오면서 새로운 유행으로 번지는 형국입니다. 지난 대 유행들은 특징적 사건을 계기로 확산된 반면 이번의 경우는 생활 속에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무증상 감염이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1단계에서 1.5단계로 상향 조정되었고, 순천은 2단계로 격상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곧 전국이 2단계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국의 제약 회사들이 만들고 있는 백신들의 임상 효과가 매우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신이 우리나라에서 상용되려면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측하지만, 그래도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은 코로나의 종식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분명히 인류는 지금의 세계적 전염병 대유행을 극복해 낼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올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코로나는 반드시 끝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또 다른 바이러스가 찾아올 가능성은 여전히 높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에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요?

14세기 유럽 사회를 휩쓸었던 페스트는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대다수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영주에 소속되어 있던 농업노동자들이 페스트로 사망하게 되자, 농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고, 높은 상품가치를 지니게 된 농노들은 영주들과 협상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농업 노동자들의 감소는 급료를 현물 대신 현금으로 지급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상업 발달을 가속화 시킵니다. 한편 농업노동자들의 감소는 기계의 발달을 불러 오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페스트는 유럽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몰고 왔고,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던 중세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서 기도를 했는데, 실제적인 치료 효과는 없었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신을 믿던 사람들이 신에게서 마음을 돌려 자연과학에 더 관심하게 되고, 인문학의 싹이 트기 시작하여 결국은 르네상스를 불러 옵니다. 이제 중세라는 시대가 저물고 근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세계적 전염병 대 유행은 바뀌는 세상의 변화의 속도를 훨씬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도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변화 중 하나는 인공지능의 가속화와 가상세계, 즉 온라인 기반의 세상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급격하게 바뀐다면 그것에 적응하는 이들은 살아남을 것이고, 적응하지 못하면 꽤 오랜 시간 혼란과 고통, 그리고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올 해는 코로나를 처음 겪어서 그 때 그 때 처신해 왔지만, 내년도 말까지는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올해 보다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응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당회는 매 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처음 모일 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할 지 매우 막막했지만, 지난 주 모임에서는 어느 정도 길이 보였습니다. 2021년 목회에 대해서 오늘 오후 목회운영위원회의 회에서 더 다듬고, 다음 주일 전교인 공청회를 통해 더 자세하게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19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파송과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상]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본문 또한 제자들에게 곧 닥치게 될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 곧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제자들만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신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시고 체포당하시기 바로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앞뒤 구절을 읽어 보면 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이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 질문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서에 보면 두 번에 걸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번은 열둘을 내보냈고(9:1-6), 또 한 번은 70명의 제자를 내 보냈습니다(10:1-16).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 신발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지 말며, 속옷도 두벌 이상 소유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전도 여행을 떠났으나, 이들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 제자들의 선교 여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낯선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쳐 주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진지하게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을 내어 주고, 제자들은 그 방에 머물며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 신자들과 복음 선포자들은 최초로 자발적인 나눔 공동체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진 것이 없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간구하면서 집집마다 들러 자신들을 소개하고 머물기를 청했고, 하나님 나라 소식에 반가웠던 이들은 자신의 집을 개방합니다. 이렇게 낯선 이들을 환대하면서 펼쳐가는 하나님 나라 선교는 당시에 매우 독특한 것이었고, 새로운 운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기본적인 의식주가 필요합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하기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 힘과 제 능력을 가지고 애를 씁니다. 자신의 집과 토지를 마련합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힘을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사람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게 되고, 주인과 종,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리되었습니다. 이들이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살면 좋겠지만,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부의 불평등이 고착화되면 대체로 사회적 약자들은 고통을 당하고, 강자들은 약자들의 노동으로 자신의 배를 불립니다. 신분제가 당연하고, 사회적 계급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시절, 대다수의 평민들은 왕이나 귀족, 군인, 높은 관리들에게 세금과 노동력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법과 제도도 만듭니다. 그래서 불평등한 사회를 뒤집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평등한 사회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남의 것을 착취하여 빼앗아 자신의 부를 즐기는 이들을 비판하며 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소유로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자급자족한다는 의미로 자루와 자신이 먹을 빵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초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들 모두와 달랐습니다. 누구의 것을 빼앗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인용 자루나 빵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지팡이나 신발도 신지 않고, 온전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했습니다. 즉 이들은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사람이 함께 도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그렇게 서로 자신의 것을 서로 나누면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시도했던 것입니다. 소유를 통한 안정감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믿고 선한 이웃의 마음과 양심을 믿고, 그렇게 참된 인간다움을 발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믿고 전도여행을 간 사람들에게 은총이 부어지고, 정말 부족한 것이 없이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보여준 그리스도교는 당시의 폭력적이며 제국적인 삶의 방식에 균열을 내었고, 결국 그들이 이룬 상생의 세상과 그들이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를 도래하도록 이끈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민주주의 사회 이상입니다만.

[위기의 도래]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지난 경험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오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서로 돕고 나누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가 가고, 박해와 환란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우선 살아남는 것이 매우 중요해 집니다. 전에는 어느 마을로 가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제국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유대인의 왕을 자처했다는 것이 제국 전체에 알려지면서, 그것으로 인해 제자들까지도 박해를 받으며, 어떤 동네에 가서도 이전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도래할 그 시대를 두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이전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선교여행을 떠난다면 아마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보다 굶어 죽거나 박해와 시련을 당하거나,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매우 단호한 어조로 스스로 살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는 말씀은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 추측하게 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옷, 특별히 겉옷은 단순히 몸의 보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분의 상징이요,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그것을 팔아서 칼을 사야할 정도로 외부의 상황이 위협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중 일부는 이 말을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로 오해했지만, 예수님께서 칼을 말씀하신 것은 정말 무력과 폭력으로 로마제국과 맞서라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칼은 비유였습니다. 지금의 모든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내는 적극적 의미에서 중요한 수단과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라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듯이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덮친 지금, 한국교회도 큰 위기와 시련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돈주머니를 준비하고, 자루를 챙기고, 칼을 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진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준비해야 2021년 코로나 19가 계속 되는 상황에서도 그 시련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 더 나아가 오히려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지금까지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모습에서 한 단계 더 성숙하고 단단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

[코로나 파도를 넘기 위해]

코로나로 모두가 어려울 때지만, 꼭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매우 좋은 호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그 미래를 내 것으로 담보하려면 우리의 삶을 미래형 인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미래형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과거에 안주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코로나 이전 세상은 오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누구나 그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옛 시절을 기대하고, 그 옛날에 갇혀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는 새로운 삶을 요구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예전의 방식 대규모 집회를 중심으로 전교인이 모두 모이는 방식으로 목회할 수 없습니다. 목회의 전적인 탈바꿈이 필요합니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도 매우 근원적인 것을 묻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이러한 것입니다. 예배당에 모여 너희가 예배한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한 것인가? 하나님께 예배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 만나서 함께 한 것이 좋았기 때문인가?

평화로운 시절에는 이 두 가지를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로 하여금 묻게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꼭 기존의 방식이어야 하는가? 모이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인가? 만약에 모이지 못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면, 내 신앙은 그동안 예배와 모임에 의존한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사람 만나려고 교회 온 것이지 하나님 만나려고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어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갈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조언하십니다.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모세는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데리고 나온 백성을 이끌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는 예배가 불가능하고 함께 모여 하는 교회활동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오늘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가 오늘날 지킬 수 없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하나님의 이 명령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밤낮으로 율법책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것을 삶에서 적용해 보는 훈련은 예배와 상관없이 가능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매일 말씀과 관련된 영상을 볼 수 있는 지금이 어떤 면에서 더욱 더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은 예배와 교회활동을 한 것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 보다는 다른 것들이 주가 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굳세고 용감하려면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 훈련을 평소에 했어야 하고,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뿌리를 더 깊이 내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예배와 교회 활동을 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그저 사람들 사이의 친교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 자신이 굳세지 못하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 사이의 친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일구려고 모인 것이지, 그냥 서로 좋아서 모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깊은 성서 연구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들리는 말씀이길 빕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가 들었던 명령입니다. 늘 율법책을 가까이에 두고 깊이 묵상하고 되 뇌이고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주님의 법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말씀을 통해서 총명을 얻었고 말씀 속에서 희망을 걸고 살아갔기에, 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제 다시 주님의 말씀에 깊이 빠져들어야 합니다. 함께 모이지 못해도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과 의도를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놓고 씨름해야 합니다. 코로나 19는 그것을 위해 매우 적절한 시간을 우리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옷을 팔아서 칼을 사십시오. 옷은 여러분의 사회적 지위, 여러분이 드러내고 싶은 욕망, 여러분이 꾸미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 옷은 자본주의가 여러분에게 부추겼던 것들이고, 그 옷은 여러분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이제 칼을 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칼 두 자루가 있다고 하고, 예수님은 그것으로 넉넉하다고 하셨습니다. 카톨릭은 교황에게 영적인 검과 세상의 검을 주신 것이라 말해왔지만, 저는 이 칼 두 자루가 하나는 자연이라는 책,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성경이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 시대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권의 책이라고 말했던 이 창조세계와 성서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자연과학적 지식은 우리를 코로나라고 하는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성서라는 칼은 우리의 영혼을 쪼개는 칼입니다. 세상의 불의를 끝내는 칼이고, 악을 물리치는 칼이며, 나의 고집과 어리석음을 베어 버리는 칼입니다.

코로나를 무서워하시지 마시고, 이 때에 여러분의 신앙의 검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이번 코로나 19를 기회 삼아 신앙의 검을 준비한다면, 이제 삶이 예배가 되고, 여러분의 존재가 곧 복음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준비된다면 어느 날 주님의 손에 붙들려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의 검을 허락해 주소서. 세상의 검으로 또 다른 세상의 검과 맞서지 않게 하시고, 거룩한 영의 빛 가운데서 주님의 지혜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이때야말로 주님의 능력을 만방에 보일 수 있는 때임을 알게 하여 주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작고 약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작기 때문에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약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목회를 준비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공간도 꾸밉니다. 주여!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향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믿음이 굳세어 용감한 자로 살게 하여 주소서. 언제나 우리를 보살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1월을 보내며 올 한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겪는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때로 주님께 소홀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시대에 적응하며 또 다른 내일을 다시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배 공간을 이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새 공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그곳에도 하나님 나라 선교를 잘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이제는 모든 겉치레를 벗어 던지고 자신의 골수를 쪼개고 영혼을 다듬는 칼을 준비하십시오. 생명사랑 신앙공동체 구성원답게 활인검을 들고 여러분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살리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새 시대를 준비하며 신앙의 반석을 단단하게 하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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