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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은 이렇게 죽었다! 그래서 "무신론적 인도주의"가 세상을 구원한다!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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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사제관 앞 기도처에 서 있는 고난 받는 예수상.

2천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리고 냄새나는 장터에서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평생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거침없이 말했다. 그는 성전에서 민중들에게 십일조 헌금과 희생재물을 바쳐야 하느님의 용서와 축복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분법적 필수조건의 협박과 폭력적인 착취에 대단히 분개했다. 또한 그는 로마제국의 비인간적인 혹독한 탄압에 목숨을 내걸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항거했다. 결국 그는 제국의 황제에게 저항했다는 정치범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그의 이름은 예수이다. 예수가 죽은 후 민중들의 가슴 속에서 그가 가르치고 살아내었던 정신이 되살아났다. 예수를 따랐던 그들은 가난과 질병과 절망 속에서도 참사람 예수가 가르쳤던 하느님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낼 수 있었다. 예수에게 종교의 의미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이다.

예수의 하느님은 성전의 하느님이나 교회의 하느님과는 정반대였다. 예수의 하느님은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이고 분노하고 징벌하고 심판하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고, 믿어야만하는 객체적이고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 그 자체이다. 예수의 하느님은 종교와 인종과 사상의 경계 넘어 자율적으로 깨달아 아는 관계론적인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따라서 예수의 하느님은 믿어야만하는 상대적이고 객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삶 그 자체이다. 예수의 하느님은 이 세계 밖에 저 세계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이고 내세적인 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평등이다.

참사람 예수가 죽은지 100여년이 지난 후에 그는 교회에 의해서 거부되고 버려졌다. 교회는 가짜 예수 즉 신적인 예수를 만들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참된 인간으로 살았던 역사적 예수는 종교와 인종의 부족적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비전을 가르치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살아냈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철저히 반대하고 항거했던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유대교로부터 배척당하고 결국 그들의 고발로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분명히 말해서, 유대교 성전과 조금도 다를바없는 현대 교회의 교리적 기준으로 보면 참사람 예수는 무신론적 하느님의 의미를 가르치고 살아낸 무신론자이다.

오늘날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주류 신학계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하느님 없는 기독교" "종교 없는 사회" "위대하지 않은 하느님" "예수에게 솔직히" "태양같은 윤리" "떠나 보낸 하느님" "신앙의 종말" "종교가 악마가 될 때" "무신론자의 영성" 등의 무신론적인 기독교 교회의 필요성을 출판과 강연회와 설교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원초적으로 종교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에 대한 것이며, 참사람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하느님 내지는 신적인 예수가 필요없다. 기독교인(Christian)이란 말은 역사적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물론 예수는 믿음체계에 맹종하는 유신론적인 종교인이 아니었다. 예수는 종교체제가 만든 유신론적 하느님에 대한 교리적 믿음을 철저히 반대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무신론적이었다. 오늘의 말로 하면 예수는 지극히 인도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기독교(Christianity)는 역사적 예수의 무신론적-인도주의적 정신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기독교의 원조는 유신론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당연히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예수가 무신론자인 확실한 근거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선 예수는 매주 꼬박꼬박 인격신론의 이분법적인 하느님을 숭배하는 성전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성전에 반드시 나가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차별적이고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성전신학과 제국신학을 반대하고 그것들에 철저히 항거했으며 심지어 성전을 완벽하게 허물어 버리라고 경고했다. 오늘 예수가 여기에 있다면 유대교 성전과 너무나도 흡사한 교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예수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성전의 제사장이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중보(仲保)성전을 철저히 반대했다. 예수는 성전에 십일조와 희생재물을 바쳐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성전신학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경고했다. 예수가 중보성전과 성전신학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성전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자처하고 인간의 본성 즉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교회는 예수가 그토록 반대했던 성전의 중개인 신학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주류 신학계의 많은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성전신학과 제국신학에 항거했던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한편 보수적인 유신론적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무신론자로 정죄한다. 결론적으로 참사람 예수는 유대교 성전이 숭배했던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을 철저히 반대했기 때문에 무신론자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유신론을 반대하는 무신론자 기독교인이다. 오늘날 교회 안밖으로 이들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신중하게 주목해야 할 것은, 민중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셨던 참사람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의미는 오늘 교회가 신봉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이 아니다. 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참사람 예수의 정신과 그 예수의 하느님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분법적으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선별하는 배타적인 성전의 하느님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예수의 정신은 교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했다. 교회는 스스로 성차별, 빈부차별, 종교차별, 인종차별의 십자군이 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운동으로 시작된 과학혁명과 계몽주의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고 여기저기에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소리가 교회 안밖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20세기에 현대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보편화되면서 과학이 현대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기초가 되었다. 현대인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잠재력이 놀랍게 확장되고, 그들의 가슴은 전통적인 종교체제 보다 훨씬 더 넓고 깊어졌다.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이고 유신론적인 신(神)의 죽음은 확장되고 확실하게 되었다.

특히 지난 2-3세기 동안에 교회기독교가 맹신하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날이갈수록 신뢰와 설득력을 잃고 죽었다.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이 믿음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억지로 붙들려 있지만 그 원인은 그들의 의식이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컴퓨터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었던 수준높은 과학과 인류학과 고고학의 정보들이 셀룰러폰을 통해서 쉽게 접할 있게 됨으로써 신(神)의 죽음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종교인들은 과학에 항복하고, 과학과 하느님 모두를 섬기는 유신진화론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 수천년 동안 종교체제가 믿었던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확실히 죽었기 때문에 무신론적 과학에 유신론을 억지로 개입시키는 것은 몰상식하고 퇴행적인 행태이다. 창조론과 지적 설계론과 유신진화론으로 과학시대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유신론적 하느님을 주입시키려는 노력은 헛된 수고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적으로 보편화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이란 말조차 불필요하게 될 전망이다. 종교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의미로 성숙해지지 못하면 생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유신론적 종교는 미래가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일으키는 기적의 시대는 끝났다. 지난 2-3세기 동안 인류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은 전통적인 종교의 믿음체계가 주장하던 것과는 180도로 달라졌다.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의미가 하루하루 발전하고 성숙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생존의 두려움에서 발생하는 부족주의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구속되지 않고 우주적으로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 종교인이 되기보다 참된 인간이 되기 원한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종교체제에서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생명이 창조되었다는 옛날 이야기가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상실했다. 38억 년 전 원시 지구는 무기 화합물에서 유기 화합물이 합성되기 좋은 조건이었다. 우주세계가 무(無)에서 우연적이고 자연적으로 출현했듯이 생명을 이루는 유기화합물은 지구 원시 대기에서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지구에만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지구 밖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광활한 우주세계에 다른 생명체들이 있을 것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성적인 양심과 지성적인 상식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한다. 인류역사에서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이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다는 사실과 그런 기적은 앞으로 미래에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 세계 밖에 거주하면서 소위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간혹 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삶과 자연현상에 멋대로 간섭하고 통제하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죽었다. 21세기 과학시대의 현대인들은 더 이상 우주세계의 운행 방식과 자연 현상과 인류 역사의 흐름에 대해 유신론을 원인과 결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신론자들은 기후와 일기는 하느님의 손에 달렸다고 믿으며, 가뭄과 홍수, 산불, 토네이도와 폭풍우와 태풍, 지진과 쓰나미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현대 천체학과 기상학과 지질학은 기후변화와 일기의 패턴과 지진과 화산활동의 원인들을 발견했다. 과학을 이해하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천연재해들이 인간의 도덕적인 문제를 통제하기 위해 하느님이 조정한다는 유신론적 주장은 거짓이고 비상식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존재가 자연현상을 좌지우지한다는 유신론적 믿음은 망상이 되었으며, 이 하느님은 설득력을 잃었다.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만든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융(Carl Jung)은 이미 반세기 전에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더 이상 유신론적인 신화적 교리들에 매달릴 수 없기 때문에 반신화적 즉 무신론적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이 과학적 합리주의를 인식함으로써 유신론적 신화를 억지로 믿는 것에 지칠대로 지쳤으며, 사람들은 우주의 법칙이 깨어지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믿기 위해서 이성과 지성을 희생할 수 없었다고 선언했다.

기독교 교회는 유신론의 정의와 하느님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왜곡하기 때문에 단순히 비유신론자(nontheist)를 무신론자(atheist)로 단정해 버린다. 쉽게 말해, 유신론을 거부하는 것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무신론자로 치부하며, 무신론자는 마치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교회의 믿음체계를 떠나 인도주의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무신론자 인도주의자들이다.

인류사에서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도록 인간이 창조한 것이다. 원초적으로 종교적인 유신론은 인간의 자아의식의 불안과 충격을 막을 수 있게 고안된 장치이었기 때문에 근세부터 인격신론의 초자연적 하느님은 더 이상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방어벽이 되지 못하고 죽어가기 시작했다. 19세기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처음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1960년대에 급진적인 신학자들이 하느님의 죽음을 공표했다. 오늘날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은 사회의 일반대중들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이미 60년대에 자신의 저서 <세속 도시>에서 경고하기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교회는 무엇인가 잘못된 현상이라고 경고했다.

유신론적 기독교인들이 열광적으로 맹신하는 믿음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교회 밖 사회에서 보기에 참된 인간의 실천적인 가치관과 윤리관과는 너무나도 큰 모순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유신론을 멀리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결국 유신론은 신뢰를 잃고,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은 무용지물이 되어 죽었다. 예를 들자면, 교회는 이혼과 낙태를 성서적으로 반대하지만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자유롭게 이혼과 낙태를 시행하며, 이혼율은 증가하고 있다. 교회는 동성애가 정상이 아니고 비성서적이라고 가장 잔인하게 정죄하지만, 유럽 국가들과 북미의 캐나다와 미국은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했다. 전세계의 주류 기독교 교단들은 동성애자들에게 목회자 안수를 허용한다. 미국 의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며, 사람들 11명 중에 한 사람이 자연적으로 동성애 성향을 갖는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믿음체계들의 유신론적이고 초자연적인 설명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불안과 혼돈 만을 가증시킨다. 원초적으로 인간은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의 본성인 존엄성이 있다. 또다시 인간을 폄하하는 유신론적 하느님과 종교를 만드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죽은 하느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고대 신화의 하느님, 성서문자주의의 하느님, 초자연적인 하느님, 유신론적 하느님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인식해야 한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무신론자 기독교인으로써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 자신과 가정과 세계를 위한 구원의 길이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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