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20)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역사신학·교회사)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VIII.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d. 14장 20-25절

(고전 14:20-25)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비하면서, 예언을 하는 것이 방언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혜와 악을 대조시키면서, 악에는 갓난아기들이 되고 지혜에는 성인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은 "지혜"(understanding)를 예언에, 그리고 "악"(malice)을 방언에 비유하며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지혜(phresin, understanding)에는 "아이"(paidia, children, 어린이들)가 되지 말고, 악(kakia, malice)에는 "어린 아이"(nepiazete, infants, 갓난아기들)가 되고, 지혜(phresin, understanding)에는 "장성한 사람"(teleioi, adult men, 성인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악에 오히려 장성한 사람이 되어 있어서 온갖 육체의 열매들을 맺고 있다고 바울은 비꼬며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자 하는 성숙한 자세를 갖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UT방언과 같은 황홀한 체험에만 탐닉하여 어린 아이들처럼 자기 자랑만을 일삼고 있다고 바울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UT방언의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교회공동체를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과 에베소교회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ta 'erga tes sarkos, the works of flesh-KJV)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엡 4:14-15)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nepioi, infants, 갓난아기들)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aletheuontes de 'en 'agape, But speaking the truth in love)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25절에서 방언이라는 단어를 세 번(고전 14:21, 22, 23)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복수형으로서 LT방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21절에서는 바울이 이사야 28장에 언급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외국 군대의 군인들에 의한 이스라엘의 침공과 패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군인들이 사용하는 말이 바로 외국어로서의 LT방언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En 'eteroglossais, 생소한 말, 다른 언어-필자 주)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en cheilesin 'eteron, 외국인들의 말-필자 주)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Through men of strange tongues and through the lips of foreigners I will speak to this people, but even then they will not listen to me-NIV)."

선지자 이사야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약 15년 전에 북왕국인 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 군대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남왕국인 유다 역시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그와 유사한 심판이 곧 임박해 있음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남왕국의 강퍅한 지도자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심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율법들"을 여러 차례 인용을 했는데, 넓은 의미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의미했습니다(고전 9:8, 9, 20; 14:21, 34)[Ibid., 645.].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인용을 한 구약성경의 말씀은 바로 이사야 28장 11-12절의 말씀입니다:

(사 28:11-12, 14)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사야가 등장하여 활동하기 훨씬 전인 약 700여년 전에도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외국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신명기에서 경고했었습니다:

(신 28:49-50)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이사야보다 나중에 등장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유사한 경고를 예언하셨습니다:

(렘 5:15-1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집이여 보라 내가 한 나라를 먼 곳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민족이라 그 나라 말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 화살통은 열린 무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하지는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말을 쓰는 동족(同族)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걍팍한 지도자들이 선지자들의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의 말씀에 계속해서 불순종할 때에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외국어를 사용하는 다른 이방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8장 11-12절의 말씀은 이사야가 남왕국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증거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이방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with stammering lips and other tongue-KJV, with foreign lips and strange tongues-NIV)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들을 때에는 바벨론 군대의 군인들이 말하는 외국말이 더듬거리는 말처럼 들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중얼거리는 UT방언 기도가 아니라 바벨론 군대의 군인들이 말하던 외국어 즉 LT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국말을 하는 바벨론 군인들을 통해서 불순종하는 불신의 남왕국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겠다고 경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구약성경(사 28:11-12)을 인용하며 예를 든 후에, 22절에서는 "방언의 본질"(essence of the tongues)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UT방언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LT방언이 성경적인 방언이라는 사실입니다. 14장 전체의 내용을 요약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이 구절에 사용된 방언이라는 말은 복수형 LT방언(glossai, tongues)입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본질과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 방언인 LT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 14:22a, Wherefore tongues are for a sign, not to them that believe, but to them that believe not-KJV, Tongues, then, are a sign, not for believers but for unbelievers-NIV)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불신자들, unbelievers)이 자신들이 배운 적도 사용해 본 적도 없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intelligible language)로 복음의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바로 LT방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전 14:22b, but prophesying serveth not for them that believe not, but for them which believe-KJV, Prophecy, however, is for believers, not for unbelievers-NIV)라고 말하면서, 예언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고전 14:3, speaketh unto men to edification, and exhortation, and comfort-KJV)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예언은 신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격려하게 되어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하고, 통역된 LT방언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를 결단케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UT방언은 메시지가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이기 때문에 예언과 통역된 LT방언이 하는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UT방언은 "방언하는 자 자신의 덕을 세워 준다"고 주장은 하지만(고전 14:4), 결국 교회를 세우기는커녕 교회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리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라고도 말할 수 없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UT방언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으로서의 LT방언만이 참 성서적인 성령의 은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은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UT방언 기도소리를 불신자들이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고 해석하거나, UT방언을 하게 되면 구원받은 확신이 없는 초신자가 비로소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구요셉, "방언이란 무엇인가?: 성경으로 살펴 본 올바른 방언과 예언의 의미,"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PAzx6HQ69w, 2019년 4월 25일 접속.]. 그러나 이 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마치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 일어났었던 LT방언 사건처럼,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큰 일"(행 2:11)을 말한 사도들의 기적적인 LT방언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회개를 했고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기들의 출신지들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불신자들을 회개케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적인 참 방언인 LT방언은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 자체는 복(福, blessing)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저주(詛呪, cursing)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마음 문을 열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의 복(福)을 받지만, 마음 문을 닫아두고서 걍팍한 마음으로 복음을 배척하고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詛呪)를 받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LT방언으로 말하고 듣는 복음의 메시지는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semeion eisin ou tois 'apistois, a sign for unbelievers-NIV)이 된다는 것입니다. UT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intelligible language)가 아니고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unintelligible voice)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외국어)로서의 LT방언만이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자들이 500여 형제들이 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6).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했던 때에는 약 120여명의 무리만 모여 있었습니다(행 1:15). 약 120여명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제자들의 LT방언 메시지를 각자의 출신지 언어로 알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일"(행 2:11)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함으로써 영생의 복(福)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약 380여명은 그 때에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제자들의 LT방언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거나 그것을 들었어도 배척을 했다면, 그들에게는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LT방언은 저주(詛呪)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LT방언은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LT방언(언어, 외국어)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통역이 되지 않거나 순서를 지키지 않고 무질서하게 말하게 되면, "알지 못하는 자들"(초신자들, 교회나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들, novices)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불신자들, unbelievers)이 큰 상처를 받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23절의 방언은 복수형으로 LT방언을 가리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LT방언을 통역 없이 말하게 되면, 불신자들이나 교회를 처음 방문한 자들이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ouk erousin 'oti mainesthe, will they not say that ye are mad?-KJV, will they not say that you are out of your mind?-NIV)고 사도 바울은 넌지시 비꼬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김인섭, "방언은 미친 짓이다,"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 /watch?v=fuWfqV6oy6c, 2019년 5월 20일 접속.]. 하물며 온 교회가 여기저기서 무질서하게 큰 소리로 UT방언 기도소리를 내게 된다면, 오늘날 집회 시에 통성기도 시간에 왁자자껄 떠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 연출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고 힐문(詰問)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역되지 않은 LT방언"이나 "통역이 불가능한 UT방언" 소리를 초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이 듣게 된다면, "교회도 이교도들의 신전과 별로 다르지 않구나, 미치광이들로 가득 차 있구나, 모두 다 미쳤어"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질겁을 하고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UT방언은 말할 것도 없고 통역되지 않은 채 말하는 LT방언도, 그 언어의 메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에게는 큰 시험거리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언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밝혀주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을 세워 주고 교회공동체에 건강한 유익을 주는 은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에 비하면 탁월한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4-25절에서 예언의 목적과 유익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4-25)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알지 못하는 자들"(초신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intelligible prophecy)의 말씀을 듣게 되면, 성령의 역사하심과 감동하심에 따라 그들은 다음과 같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듣게 된다.

2) 예언의 말씀에 따라 판단을 받게 된다.

3)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숨은 죄악들이 밝히 드러나게 된다.

4) 나아가 그들은 겸손히 엎드려서 회개를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

5) 결국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참으로 함께 계시는구나" 하고 인정을 받게 된다.

이렇듯 예언을 말하는 것은 LT방언을 하는 것에 비하면 교회를 세우는데 훨씬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통역되지 않은 LT방언"이나 "통역될 수 없는 UT방언"은 교회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리며, 어떤 사람들로부터 "너희는 모두 미쳤어"(mainesthe, ye are mad-KJV)라는 비방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은 신자들 사이에서 경책과 회개와 겸손한 마음을 불러일으켜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극할 것이기 때문에, 예언이 방언에 비해 훨씬 탁월한 은사라고 사도 바울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LT방언은 통역이 되어 알아들을 수 있게만 된다면 예언처럼 순기능적(順機能的)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UT방언은 교회를 위해서 단지 역기능적(逆機能的)인 역할만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지수 admin@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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