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신 앞에 솔직히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잠언 21:2-3, 로마서 2:16-24, 누가복음 8: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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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안 그래도 코로나로 온 국민이 힘든 시기에 이른바 '정인이 사건'이 알려져 더 힘들었던 지난 한 주간이었습니다. 1살 4개월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입양한 엄마와 아빠의 학대와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첫 재판을 받으러 나온 양모의 호송차 앞을 가로막고 눈을 던지며 사형시키라 외치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정인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양모와 양부가 이른바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저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설사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어도 하나님은 보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CCTV에 찍히지 않는 은밀한 공간에서 폭력과 학대를 저질렀다 해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크리스천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de facto) 무신론자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믿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거짓 자아로 똘똘 뭉쳐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사는 크리스천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역대하 16:9)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모든 걸음을"(욥기 34:21), 그리고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시편 7:9) 감찰(監察)하신다 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잠언 16:2)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시편 69:5)고 실토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다]"(시편 90:8)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전도서 12:14)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죄악을 저질러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는 이런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실상의 무신론자입니다. 성서는 그런 사람을 '악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0편입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시편 10:4, 11-12). 하나님께서 온 땅을, 그리고 사람의 모든 걸음과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며 사실상 하나님 없이 사는 자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악인이고 무신론자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매우 위선적인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르고, 집단의 명분과 개인의 잇속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며, 또 낮과 밤이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옮고 그름이 없고, 오직 '내 편'(insider)인지 '네 편'(outsider)인지만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양심과 도덕의 거울이 사라졌습니다. 마치 성경의 예언자들이 비판한 3천 년 전 이스라엘 사회와 같습니다.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이사야 59:14)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탄식했습니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미가 7:2)라고 미가 예언자 역시 개탄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5대 제사가 있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그리고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번제(燔祭, burnt offering)는 동물 제물 전체를 불태워 바치는 제사입니다. 소제(素祭, grain offering)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간구하는 제사입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자원제(自願祭, voluntary offering)입니다.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면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의무제(義務祭, mandatory offering)입니다. 먼저 속건제(贖愆祭, guilt offering)부터 말씀드리면, 이 제사는 하나님의 성물이나 이웃의 물건에 침해 혹은 손해를 끼치고 잘못을 깨달았을 때 손해에 20%를 더해 먼저 배상 혹은 보상하고 나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정말 특별한 제사는 마지막 속죄제입니다. 속죄제(贖罪祭, sin offering)는 아무 죄를 지으면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지은 죄를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가 바로 속죄제입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가 속죄제입니다. 레위기 4장 2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면]" 이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실수로 야훼의 명령을 어겨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하나라도 하였을 경우에"(공동번역) 성전에 찾아가 이 속죄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생각에 부지중에 지은 죄는 가장 가벼운 죄입니다. 의도적으로 지은 죄가 정말 무거운 죄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속죄제는 그 어떤 죄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의도적으로 지은 죄가 당연히 심각한 죄이지만, 부지중 지은 죄도 그것이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 죄가 깨달아지거든 그냥 넘어가지 말고 반드시 자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예민한 신앙 양심을 가지고 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는지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한 잡지에 실린 짤막한 글입니다.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재료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답은 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진짜 휘발유'였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가짜 휘발유를 만들려고 물을 가장 많이 넣으면 대번에 티가 나고 말겠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가짜를 만들어도 가짜를 진짜같이 만들기 위해서 가장 많이 넣어야 하는 것은 진짜인 것입니다. 기가 막힌 역설이었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진짜가 많다 해도 그 안에 조금이라도 가짜가 섞여 있으면 전체가 가짜가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지극히 적은 양의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장담하고 있는 많은 양의 진짜가 아니라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적은 양의 가짜입니다. 새빨간 거짓말만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충분히 정직하지 못한 것 또한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한희철, 『지킴 20 버림 20』 중에서)

우리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것이 마구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속엔 울고 있는 나도 있고 웃고 있는 나도 있습니다. 내 속엔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떳떳한 마음도 있고 부끄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맑고 조용한 오솔길도 나 있는가 하면 쓰레기가 나뒹구는 어수선한 뒷골목도 사방으로 뻗어있습니다. 무엇이 진짜 나이고 가짜 나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의 이런 실존을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절)라고 깊이 한탄하면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라고 시인합니다. 즉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23절)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라고 깊이 탄식합니다.

인기가수 조성모 씨가 불러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노래 <가시나무>가 바울의 이 깊은 인간 이해를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사랑하지만 이 노래가 원래 대중가수이자 기독교 복음 전도자이며 훗날 목사가 된 하덕규의 시집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1990)에 실려 있던 것을 아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시를 읽어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 당신의 편할 곳 없네 //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 당신의 쉴 곳 없네."

그런 것 같습니다. 무성한 가시나무 숲과 같은 우리 마음을 병들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만큼 우리 마음은 병들어 있습니다. 가슴 깊이 감추어둔 분노는 언젠가, 반드시 가까운 사람들을 향해, 이웃을 향해 폭력으로 드러날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서의 시인들과 함께 내 속에 있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이, 내 속에 있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이 구원과 치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시편에는 우리가 읽기를 매우 꺼리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탄원과 불평으로 가득한 시들입니다. 그중에는 심지어 무제한의 복수조차 거침없이 내뱉는 시들이 있습니다. 시편의 무려 3분의 1가량이 이런 목소리를 내고 있는 '탄원시'(歎願詩)들입니다. 이 시들을 읽을 때 솔직히 불편한 감정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런 탄원시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은밀하고 어둡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추악한 진실을 토해냅니다. 회복되고 치유되고 다시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의 불편한 진실을 하나님 앞에 가감 없이 토설(吐說)합니다. 성경이 위대한 이유는 무슨 고상한 언어와 사상을 담아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밑바닥을 신 앞에 솔직히 드러내고 구원과 치유와 회복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탄원시들은 아무 비밀도 감출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워 그분과 대면하게 합니다(월터 브루그만, 『시편적 인간 (From Whom No Secrets Are Hid)』).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시편 3:1). 화자(話者), 즉 말하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 앞에 불평을 토로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편 6:6-7). 화자는 하나님께서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시면 자신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을 폅니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시편 54:3). 그리곤 거의 명령조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편 6:2). 이어서 격정적이고 직접적인 어조로 절박한 요청을 쏟아냅니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시편 10:15).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소서]"(시편 58:6-9).

급기야 시편 69편과 137편은 단순한 불평을 넘어,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복수의 감정조차 숨김없이 내뱉습니다. 시편 69편은 적대자들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다가 그들에 대한 보복을 원하는 자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편이 되어 복수를 해줄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 그 '소원 목록'(wish list)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편 69:21-28). 이 시편의 기자는 지금 일종의 '용서 없는 보응,' 무제한의 복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편 137편은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로 시작하는 이 유명한 시편은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아픔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시의 맨 끝에 자신을 멸망시킨 바빌론을 향해 이런 끔찍한 저주의 말을 내뱉습니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편 137:7-9). 인간의 원초적인 복수감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편을 낭독해도 될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 속의 진짜 질문은 '우리가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될까요?'입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그걸 말해도 될까요? 혹시 우리가 그걸 말하는 순간 그동안 쌓아 온 이미지는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실 이걸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성서의 답은 뜻밖에도 '예!'입니다. 불평과 저주의 기도들은 사실 희망의 몸부림입니다.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전해져 온 탄원의 시들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탄원시들에 나오는 '폭력의 수사법'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한 대본이며 신앙의 안내서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은밀한 사연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편 44:21)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비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우리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비밀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분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놓은 은밀한 사연들을 토설해도 될 만큼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은밀한 비밀을 쌓아놓는 만큼 병들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속 깊이 분노와 미움을 감추고 있다면 그것은 인지되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고 결국 나 자신과 가족과 이웃의 삶에서 파괴적인 힘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어둡고 부정적인 실체들은 하나님 앞에 솔직히 표현되어야 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직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허심탄회하게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다 쏟아놓아야 합니다. 추하고 비뚤어진 내면과 상처를 아시고 그것들을 진지하게 대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솔직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밝은 빛 안에서 위로와 회복과 용서의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실제로 시편의 탄원시들은 이런 회복의 기쁨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시편 3:4)라고 시편 기자는 감탄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편 32:5)라고 감사합니다. 이제 자존감을 회복한 탄원자는 모든 정죄의 불안에서 벗어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시편 50:8-9a). 사도 바울도 이 시편 기자의 노래에 화답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로마서 8:31b-34a).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회복된 자아는 이웃과 회복된 관계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온갖 불평을 토해내던 시편 기자는 이제 두 가지를 맹세하는데 먼저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시편 51:13)라고 합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드러냄으로 회복과 치유에 이를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편 51:15)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온 세상 앞에서 자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결말입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도서 12:14)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로마서 2:16)이 올 것이라 말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로마서 2:17-20)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제가 율법을 법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로마서 2:21-24). 오늘 한국 땅에서도 앞과 뒤가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골프 역사에서 최고의 골퍼로 손꼽히는 바비 존스의 일화입니다. 1925년 US 오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1타차 선두를 지키며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드레스(공을 치는 자리에 서서 골프채를 조정하는 것)를 하는 순간 공이 살짝 움직였습니다. 공을 건드리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스스로 공을 건드렸다고 보고하고 벌점 1타를 받았습니다. 그 1점 때문에 동점자가 나왔고 경기는 연장전까지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열린 연장전에서 존스는 그 동점자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대회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얼굴은 밝기만 했습니다. 기자들이 그의 스포츠맨십을 찬양하며 쫓아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하시다니요. 규칙대로 경기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마치 은행에서 강도짓을 안 했다고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웃에게,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시편 7:10)하신다 했습니다.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역대상 29:17)하신다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신명기 6:18)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처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마태 10:26, 누가 8:27, 12:2). 하나님 앞에 숨지 마십시오. 내 안의 모든 아픔과 분노와 좌절과 미움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 쏟아놓으십시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자꾸만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 숨으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 그렇습니다. 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포기해서는 안 될 믿음은 상하고 찢긴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놓는 믿음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라]"(시편 51:17)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을 고치시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내어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정직함이라는 그릇에 하나님의 은총을 가득 담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오늘 여러분을 고치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멘. (20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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