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나오미'와 '마라' 사이에서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룻기 1장 19-22절, 시편 17편 1-9절, 사도행전 21장 27-36절

[코로나와 목회의 변화]

지난 주 수요일 노원구청 문화체육과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방역당국의 코로나 대처가 변동이 있을 때마다 종교시설에 알려 주는 문자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1월 18일부터 31일까지 연장되었지만 약간의 변동이 있습니다. 이제 식당에서처럼 카페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시민들의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습니다.

종교시설의 경우 예배 시에 좌석수나 면적을 고려하여 10% 이내의 인원이 참여할 수 있는 예배를 허락했고, 이용자 간 거리를 2m이상 두게 했습니다. 우리 교회처럼 좌석이나 면적이 100명 미만이 되는 작은 교회는 10명 이내의 예배 인원이 참여 가능합니다. 정규 예배만 제외하고 종교시설이 주관하는 각종 대면 모임 활동 및 행사, 식사는 모두 금지됩니다. 금지되는 행사에 포함되는 항목은 수련회, 기도회, 부흥회, 구역예배, 심방, 성경공부 모임, 성가대 연습 모임, 각종 선교 소모임 및 교육이 포함됩니다. 게다가 큰 소리로 함께 기도하거나 암송하는 행위는 금지되고 성가대도 금지됩니다.

이 조치를 보면 코로나 확산에 조금이라도 우려가 있는 것은 미리 차단하겠다는 방역당국의 강력한 의지가 보입니다. 기존의 2.5단계에서는 예배도 온라인으로만 가능했지만, 대형교회들과 한국교회총연합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교회의 규모를 고려하여 정규 예배만 물리적 거리 두기를 확보한 상황에서 모일 수 있도록 살짝 허락한 것입니다. 코로나가 1년이 넘게 지속되는 가운데, 종교시설 중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계속 집단감염이 계속 이어지고, 7만 3천 115명의 확진자들 중에 집단감염의 경우가 45%인데, 이 중 종교시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기에 정부의 이러한 강력한 조치들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미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주가 아예 법으로 교회 문을 열지 못하게 했기에 그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예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목회활동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배도 인원제한이 있기에 예전 같지는 못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나마 온라인 예배와 신앙 영상 제작을 통해 이 난국을 극복해가려고 애쓰고 있고, 정부의 방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이런 상황에 큰 불만을 품고 있고, 종교 탄압이라는 주장까지 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할지 매우 난감해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로서는 예배를 제외한 모든 대면 모임이 불가능하고, 일시적으로 상황이 좋아지면 모이다가 언제라도 상황이 악화되면 또 모이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사실 목회는 매우 큰 혼란과 혼돈에 싸여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불확실하고, 모여서 함께 의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민주적 방식으로 교우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목회를 해오는 것을 추구하고 좋아했던 저로서도 지금의 상황이 매우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년 6월 목운위에서 수도권에서 30명 이상의 신규 확진자가 나올 경우, 모든 예배와 모임을 온라인으로 한다고 정한 바 있는데, 이 기준을 적용하면 아마도 올해도 작년처럼 내내 모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방역 당국의 지침에 따라 좀 우리가 정한 엄격한 이 규칙을 좀 더 유연하게 바꿀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에도 온라인 상에서 예배를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교육을 하는 것은 지속될 것이고 하나의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일상적이고 매우 당연한 것으로 고착화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교역자들도 무던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뀐 것에 적응하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촬영 장비를 다루는 기술, 음향과 영상을 녹음하고 일일이 편집하는 기술, 썸네일을 만드는 디자인부터 저작권과 관련하여 주의할 것들 등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게다가 온라인으로 송출하는 영상에 담길 신앙과 신학의 내용들도 알맞게 조절하고 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장에 모여서 하던 것을 영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은 기존의 것과 비교하여 5배에서 10배의 노동과 시간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한 주 한 주 지날 때마다 교역자들의 몸과 마음이 더 지쳐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엄청난 자원과 고급 기계가 지원되는 방송국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하고 있는 지금의 온라인 예배와 교육의 방식은 함께 모였을 때의 예배 형식을 그대로 온라인 상에 옮겨 놓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방송국도 아닌 교회가 이렇게 매번 이런 작업을 하기는 앞으로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또 다른 형식의 예배와 신앙 활동의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그것을 고민하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시는 김남중 교수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형의 예배를 기획하면서 예배와 삶이 분리되지 않고, 말씀을 듣고 나누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작년에 우리 교단의 목회와 신학 연구소가 주최한 좌담회에서도 말했지만, 이제는 주일 11시에 교회에 나와서 드리는 전통적인 방식의 예배도 드리겠지만, 한편으로 시간에 상관없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기존의 성직자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생활형 예배가 기획되어야 하고,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이런 새로운 생활형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변화이고, 이것이 가능할 때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밝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교회 유튜브와 수요사경회를 통해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고 계신 분들은 저에게 문자나 메일, 카톡이나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신앙 상담을 하고, 지난 주에 발송한 생명 사랑 씨ᄋᆞᆯ 미션도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가 2019년에 당회원들과 홈페이지 제작 TF 구성원들에게 생명사랑 유비쿼터스 교회를 따로 개척하여 온라인에서 만나는 사이버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것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당회와 목회운영위원회는 온라인 성도를 우리 공동체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 목회활동을 할 지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사실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정말 지치지 않고 힘을 내면서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룻기의 나오미: 고단한 인생]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본문은 룻기입니다. 제목은 룻기이고 실제로 룻이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룻기의 처음과 룻기의 처음과 끝에는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주인공처럼 등장하고, 이야기의 서술도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함께 하는 인생의 여정을 다룹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떠들썩하였고, 아낙네들이 저마다 나와서 나오미를 반기며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라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괴롭게 하셨고,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었으며, 자기를 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룻기 1장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룻기는 심한 기근으로 말미암아 고향 땅 베들레헴을 떠난 엘리멜렉과 아내 나오미,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압으로 피난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압에 거주하는 10년 사이에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을 잃고, 두 아들마저 사별하고 맙니다.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좋은 뜻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 유대인 가정은 모압 땅에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지만 모압에서 얻은 아들의 이름이 하나의 힌트입니다. 나오미와 엘리멜레의 아들 이름은 말론과 기룐인데,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이고, 기룐은 '황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땅에서 산 세월 동안 몸은 병이 들었고, 마음은 황폐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결국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모압 땅에서 결혼까지 한 아들들이 모두 또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오미와 이방 출신 며느리 오르바와 룻, 이렇게 세 여인입니다.

오늘날도 자기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대에는 씨족 사회였고, 타문화와 종족에 대한 배타와 혐오가 심했기 때문에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이방 땅 모압에서 당했을 일들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이제 여성 셋만 남았다는 것은 그들의 앞날이 깜깜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한 것이고, 그 길에 룻이 함께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라는 우리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물을 먹었던 것을 기억하듯이 "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지금 삶이 괴로워서 입맛도 쓰고 마음이 쓰리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어원을 캐고 들어가면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행복하고 즐거운 웰빙의 나오미가 아니라 쓰디 쓴 맛을 느끼는 마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능자께서 자신을 무척 괴롭게 만들었고, 자신을 쳤고,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불평합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나오미를 꽤 괜찮은 시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제법 신앙도 좋을 것이라고 유추하지만 오늘 말씀만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기억도 조금 왜곡되어 있는데, 자신이 고향을 떠날 때는 가득 찼었는데 다시 돌아올 때는 텅 비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고향을 떠날 때도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가득 찬 것도 아닙니다. 물론 남편과 두 아들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잃고 말았으니 그것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나오미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고 그게 다 하나님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 나오미의 신세 한탄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정말 힘들 때는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힘든데 안 힘든 척하는 것보다 그 힘든 상황을 모두 털어 놓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고, 사실은 신앙을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착각]

그동안 한국교회는 하나님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고 연신 가르쳐 왔습니다. 예수 믿고 지옥 길에서 벗어나 천국 가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아 본인도 잘되고 집안도 잘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수 있다고 엄포도 놓은 적이 많습니다. 제가 다양한 자리에서 신앙 상담을 해보면, 방금 전에 말한 것을 자신의 신앙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성경 전체로 볼 때 반만 알고 나머지 반은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주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반대로 주님을 믿어도 고난을 겪으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도 악인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주님께서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자신을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잘못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남들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언제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고 주님의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 사람이 지금 자신을 변호해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자기를 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달라고 애원합니다. 자기를 지켜주시고 숨겨달라고, 악인들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발생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뜻하지 않은 어려움들과 불행들이 닥칩니다. 유한한 우리는 때때로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겪습니다.

그럴 때면 오늘 나오미처럼 하나님을 원망해도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속은 문드러지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입양한 유아를 숨지게 한 양부모 이야기를 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와 도덕성을 지킨다면서 겉으로만 그런 체하는 위선적인 인간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하지만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참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우상화시키면서 도덕군자처럼 여기고 엄청난 기대를 품기 보다는 누구나 약하고 추하고 타락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데도 더 좋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천사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더 큰 상처를 입게 되고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온전한 삶으로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부족하지만 부족한 그대로 서로 도와 가며 도전해 보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어여삐 보아 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손과 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은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 전환을 이룬 한 사건을 다룹니다. 즉 바울이 체포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과 이방 선교의 중요성을 인정받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로 갑니다. 예루살렘의 교인들을 위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모든 구제금을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동시에 바울이 그동안 유럽 세계 각지에서 벌인 자신의 활동에 관하여 다소 유대적인 예루살렘 교인들의 가지고 있던 오해를 풀어주고, 또 새롭게 더 넓은 지역으로 선교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신이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예감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바울도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1세기 유대교 내의 종교적 지형도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로마 지배하에서 유대의 독립을 꿈꾸고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은 언제나 긴장된 사회였습니다. 언제든지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고, 유대교의 독립에 방해가 되거나 미온적 태도를 취하는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테러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의 선교는 열혈 유대인들의 감정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방 선교를 위해서는 할례도 중요하지 않고, 유대의 민족주의 감정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는 바울의 설교와 태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유대교에 열성인 사람이 볼수록 바울은 배신자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유럽 선교에 반드시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과 지지, 후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에 가서는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고, 바울은 자신의 이방 선교가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보고 합니다. 보고를 들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만, 열성적인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는 것도 얘기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열정적인 유대인들 사이의 불필요한 갈등과 긴장, 다툼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나실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식을 치를 때, 바울도 함께 정결 예식을 할 것을 권합니다. 바울은 이들의 충고를 잘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고 군중을 충동질했고, 흥분한 사람들은 다짜고짜 바울을 체포하여 투석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죄목은 바울이 성전을 적대해서 가르쳤다는 것이고 이방인을 성전으로 끌고 들어와서 몸소 성전과 적대적인 가르침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로마의 천부장의 등장으로 흥분한 군중들이 바울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흥분한 군중들의 난동은 계속되었고, 천부장은 진상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체포된 바울은 결국 로마로 압송되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바울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얼마든지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것일까요? 왜 바울은 예수를 믿어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바울의 회심과 전향과 그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인생은 나오미의 고백처럼 부모가 지어준 좋은 이름처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시절만 계속 될 수는 없고, 정말 인생의 쓴 맛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길을 버리고 오히려 고생이 뻔히 보이는 길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을 이렇게 이끌었던 그 뜻과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코로나 19 시대는 행복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나날들이 더 많아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바울 사도처럼 고난 속에서 뜻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주영석 교수팀은 인간의 폐포 세포를 실험실에서 3차원으로 구현하는 것에 성공했고, 그래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가 폐 세포를 파괴하는 과정을 정밀하게 규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폐 세포가 살아서 활동하는 조건을 만든 것인데, 이것은 정말 폐와 관련한 모든 질병의 치료에 획기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입니다. 이렇게 고난의 순간에도 놀라운 연구는 계속되고, 오히려 고난이 하나의 삶의 변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 오르막과 내리막, '나오미'와 '마라' 사이를 늘 오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런 우리의 삶을 잘 조절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매일의 삶이 더욱 뜻 깊고 의미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오미의 귀향이 결국 다윗 왕의 탄생으로 이어지듯, 지금의 고난을 견딘다면 그것이 더 큰 행복과 보람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서, 삶의 양지와 음지, 이 쪽 저 쪽을 모두 체험하면서 더 무르익고 더 깊어지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삶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 맛있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과 비바람이 불고, 소쩍새가 울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한 알의 곡식이 여물기 위해 뜨거운 여름 태양빛을 견뎌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굴곡진 삶들이 우리들을 알차게 만들게 하여 주소서. 주님 따라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우리에게 인내하는 힘을 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지혜도 주소서. 장기화 되는 코로나 속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말며, 눈을 높이 들고 주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하여 주소서. 거룩한 주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에게 닥치는 삶의 물결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담대하게 맞이하고 꿋꿋이 겪어 나갑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주님을 만나고 넘치는 은총을 가슴 깊이 새기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아픈 세상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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