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네가 사람을 낚을 것이다"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Feb 08, 2021 07:21 AM KST

- 에스겔 18:32-32, 고린도후서 7:9-11, 누가복음 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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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한 해 동안 코로나19가 인류를 흔들어 놓으면서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곳은 교회입니다. 한국의 개신교회입니다. 신천지의 집단 감염으로부터 시작된 세상 사람들의 비판은 이단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교회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예배는 죽어도 예배당에서 드려야 한다고 고집하는 목회자와 교회가 많습니다. 코로나19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입니다.

코로나19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어서 코로나19가 끝나고 다시 일상이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가 이구동성으로 코로나19가 끝나도 이전과 같은 일상의 회복은 어렵다고 말합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회복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은 끝났습니다. 코로나19의 위기는 인류 문명의 위기입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일 년째 고통받고 있는 인류는 마치 타이타닉(Titanic)호에 탑승한 승객과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와 지구의 신 가이아(Gaia) 사이에 태어난 거인 중 하나라는 괴력의 신 타이탄(Titan)의 이름을 딴 배, 그래서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배'라고 자부하던 배, 하지만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50분에 빙산과 충돌하여 1천 1백 20명의 목숨을 앗아간 배, 빙산과 충돌하기 전에 적어도 6번 이상의 경고를 받고도 최고속도를 고집한 배, 벨파스트 항을 출발할 때 일어난 불길한 석탄 창고 화재사건도 은폐하고 출항했던 배, 2천 2백명의 승객을 태우고도 그것의 절반밖에 안 되는 1천 1백 78명분의 구명보트만 실었던 배, 그나마 훈련이 안 된 선원들이 그 구명보트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않고 사람을 내려 겨우 7백 5명밖에 구조하지 못한 배, 그렇게 어이없게 얼음장과도 같은 차가운 북대서양 바닷속으로 침몰한 배, 바로 그 타이타닉과 같은 배를 우리가 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타이타닉호를 타고 가다 지금 코로나19라는 큰 빙하와 충돌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배의 룰(rule)은 1등석 승객부터 먼저 구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화 <타이타닉>에서 보여준 것처럼 3등석에 탄 여자와 어린이는 갑판에 올라올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럽과 북미 선진국들이 코로나19 백신을 독점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탄 배는 노아의 방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탄 타이타닉이라는 배는 강철로 만들었으나 그 강철의 두께는 겨우 10cm입니다. 수천 미터 깊은 바닷속 얼음장 같은 물로부터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강판의 두께는 겨우 10cm에 불과합니다. 선원들은, 그리고 승객들은 아무도 이 지극히 간단한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배를 운항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지도자들은 충분히 훈련된 선원들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배 위에서 '나만 1등석에 타고 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가르칩니다. 교인들은 배가 파선하는데 나만 구명보트에 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너무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오늘의 복음서(누가 5:1-11)에서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서 그가 맨 처음 하신 일은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게네사렛(Gennesaret)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두 배 중 시몬, 즉 베드로의 배에 올라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아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와 말씀 듣기를 청하니 아마도 배를 뭍에서 조금 물려야 했던 것 같습니다. 가르침을 마치시고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이에 놀란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이 보통사람이 아닌 것을 깨닫고 그의 무릎 아래 엎드리자 예수께서는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 말씀하시며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에서 '취하리라'로 번역한 그리스 단어는 '조그레오'입닙니다. 그 뜻은 '구하여 살리다' 입니다. 이 동사는 구약성서 민수기 31:15과 신명기 20:16에서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구하여 살리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마태는 이 구절을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 4:19)로, 마가는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가 1:17)로 전하고 있으나 누가만이 특이하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는 잡히면 죽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런 부정적인 인상을 피하려고 '조그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사람을 취한다,' 즉 '사람을 구하여 살린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부를 통해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일은 구약성서 예레미야 16:15-16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멸망해 자기 땅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모으실 때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부가 하는 일은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한 데 모아 그들을 본래 땅으로 데려오는 사역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상한 것을 치유하며,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회복의 사역입니다. 바로 그 일을 이제부터는 시몬이 하게 되리라고 예수께서는 그를 제자로 부르시며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사람을 구하여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부르심은 지금 코로나19로 갈 길을 잃은 한국 교회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위기의 시대에 한국 교회가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방향은 예배당에서 많은 교인이 모여 예배하는 것이나, 교회를 성장시키고 유지하는 게 아니라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과 가난과 질고를 겪고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하여 살리는 일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로하고 상처에서 회복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설령 교인이 감소하고 재정이 줄어들더라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이 안전하고 평화가 유지되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고 구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교회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고기를 잡고 살던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본문 11절이 명확히 말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는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태 4:22)고 했습니다. 마가는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마가 1:20)고 했습니다. 가난한 어부들에게 배는 생업입니다. 그들과 가족의 유일한 생계수단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버렸다고 했습니다. 고대 가부장 시대에 아버지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말은 그야말로 누가의 말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말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코로나19로 인한 새로운 변화 속에서 이렇게도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결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은 지금까지 붙잡고 살아온 그것만이 진리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예수님이 등장하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소중하다고 여겨 왔던 수많은 것들을 버려두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할지 모릅니다. 코로나19가 끝나도 이전과 같은 일상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성경 공부하고, 친교를 가졌던 전통적인 모습은 점점 약화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교회'로 '예전의 신앙생활'로 그대로 회복되기를 막연히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고 하셨습니다. 역사의 전환점이 된 아브라함의 부르심 사건입니다. 이렇게 부르신 후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고 약속하십니다. '너는 복을 많이 받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즉 새번역 성서의 번역대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로 인해 너의 가족이, 너로 인해 너의 이웃이, 그리고 너로 인해 세상이 복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용감하게 응답하는 사람들이 받는 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떠나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말씀처럼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죄악에서 떠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살라고 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에스겔 18:30-32).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라고 한탄하셨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죽는지도 모르고 죽고자 하는 우리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마크 제롬 월터스가 쓴 『에코데믹, 끝나지 않는 전염병』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쓴 책인데 그때는 아무도 지금과 같은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올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꼭 어제 쓴 것과 같은 책입니다. 동물과 가까이하며 치료하는 수의사인 저자는 21세기 우리가 사는 도시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도시에 기이한 새 질병이 돌고 있다." 그는 21세기 인류의 문명에 돌고 있는 기이한 전염병 여섯 가지를 추적합니다. 먼저 광우병입니다. 지난 20세기 중반에 고기 생산자들은 동물을 도축할 때 버려지는 부산물을 소나 양 같은 초식동물의 사료로 돌리면 이윤이 남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래 하나님께서 식물을 먹도록 창조한 동물에게 인위적으로 'MBM'(meat and bone meal), 즉 농축된 고깃가루와 뼛가루를 먹였습니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광우병입니다. 둘째로 에이즈는 보통 성병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숲을 파괴한 결과입니다. 서양의 목재 회사들이 아프리카의 광활한 숲을 베어낼 때 벌목 현장에 고용된 수 천 명의 벌목꾼들은 먹을 게 없어 고릴라와 침팬지를 비롯한 숲의 온갖 야생동물 고기로 연명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감염된 동물의 고기를 다루다가 전파된 병이 바로 에이즈입니다. 셋째로 살모넬라는 항생제 내성(耐性)의 예견된 결과입니다. 몹시 비좁고 대개 비위생적인 대규모 가축 사육 시설에서는 자주 항생제 약물을 쓰는데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이런 항생제 살육에서 살아남은 세균들은 어떤 항생제에도 듣지 않은 강력한 저항력을 지니게 됩니다. 넷째로 '제2의 에이즈'라고도 불리는 라임병은 인간이 깊은 오지(奧地)까지 파고들어 숲을 파괴해서 생긴 병입니다. 숲속 사슴이나 설치류에 붙어있는 진드기가 사람을 물 때 문제를 일으키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다섯째로 한타바이러스 폐증후군은 희생자가 자신의 체액에 익사 당하는 치명적인 감염 질환인데, 엘니뇨 현상과 같은 기후변화로 비가 많이 내린 곳에 생쥐 수가 급증하자 이 병이 찾아왔음이 밝혀졌습니다. 여섯 번째로 웨스트나일뇌염은 나일강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인데 이 아프리카 바이러스는 철새를 따라, 특히 세계를 여행하는 인간의 도움을 받아 이내 세계적인 바이러스가 되었습니다. 즉 '세계화'라는 인간의 문명이 만든 질병이 바로 웨스트나일뇌염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21세기 인간의 도시에 창궐하고 있는 무서운 전염병들이 모두 인간에 의해 발생했음을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현재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것 역시 인수공통 감염병의 하나입니다. 이 모든 대규모 전염병은 하나도 예외 없이 인간이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이 숲을 없애고, 생물 간 균형을 교란하고, 지구온난화를 일으키고, 세계를 마구 돌아다니며 각지의 토착 생물들을 뒤섞고, 항생제를 남용하고, 초식동물에게 고기를 먹이는 등의 온갖 '기괴한' 파괴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새로운 전염병이 창궐하고 우리가 스스로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과 같은 자연 파괴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위험에 빠져 있을 것이며 앞으로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 귀에는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라는 하나님의 한탄이 오늘 우리는 향한 하나님의 깊은 탄식으로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가정(假定, assumption)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성서의 언어로는 '근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두 가지의 근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세상 근심'(worldly sorrow)으로 그것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Godly sorrow)으로 그것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고린도후서 7:10)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새번역)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죽는 길인지도 모르고 죽고자 애쓰는 인류 앞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온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 8:22)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어야 우리에게 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고린도후서 7:11). 무려 7번이나 '얼마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이런저런 핑계로 머뭇거리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태 8:22).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 10:38)고 하셨습니다. 오래전 아주 단순한 복음성가 한 구절이 이 진리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No turning back)."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 오늘의 공동기도문처럼(정종수, <길가의 돌>) - "길가의 돌 하나 주워 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것밖에" 안 될지라도 - 오늘 부른 찬송가(515장)처럼 -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시는"(찬송가 515장) 주님께서는 그 작은 돌 하나로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을 포함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 제자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야 합니다. 과거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이전의 삶의 터전은, 이전의 신앙 행태는 더 이상 우리가 안주할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를 따르기 전과 후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문명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고 했습니다. 탈무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에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두렵다"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요. 우리는 마음으로 새 교회와 새 문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없으면 사람들은 무너질 것입니다"(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 잠언 29:18)라고 성서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에너지를 온통 경쟁과 성공과 소득과 소비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무언가 깊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나 하나만, 내 가족만 잘되게 해달라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지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의 가치와 윤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바뀌어야 합니다. 나 하나만을 위한 삶에서 - 김옥길 선생님이 늘 강조하신 것처럼 - 이웃과 세계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5)고 성서는 명확하게 말합니다. 타이나틱호와 같은 우리 배에 구명보트가 모자라면 나만 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배에 있는 모든 승객을 다 구조할 수 있는 구명보트를 달아야 합니다. 아니 노아처럼 생명의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타이타닉호와 같은 이 배를 호를 구조하는 일에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불러 '사람을 살리고 구하는 일'에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이때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며 나서겠습니까? 이사야 6: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오늘 부른 찬송가(515장)처럼 "눈을 들어 하늘 보[니]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옵니다]...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Arise, let us go from here - 요한 14:31). 진정한 가르침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우리를 사람을 살리고 구하는 제자의 삶으로 부르신 예수님의 얼굴은 벌써 보이지 않습니다. 일어나 앞장서 떠나시기에 오직 그의 등만 보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사람을 살리고 구하는 일'에 일어나 앞장서셨습니다. 그분의 등이 보입니다. 사랑으로 온 생명을 살리고 구하시는 그분의 성실하고 듬직한 등이 내 눈앞에 보입니다. 그 등을 따라 배우며 우리도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길에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일을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을 부르시는 은혜와 소명의 말씀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20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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