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신명기 8:1-4, 야고보서 1:1-3, 12-15, 마태복음 4: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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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기사는 흔히 사순절(四旬節, Lent) 첫 주일을 위한 성구로 채택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8)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고린도후서 1:5)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험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 세 개의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하지만 단 두 구절만 짧게 시험받으셨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마가(1:12-13)와 달리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을 매우 상세히 보도합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비슷한 시험을 당하는 우리 독자들에게 시험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게 이끌리어"(마태 4:1)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시험의 역할을 마귀에게 돌리는 것은 성서의 오랜 전통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즉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야고보서 1:13)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시험하다'라는 낱말의 그리스어 원어는 '페이라제인'(peirazein)입니다. 영어에서 '시험하다'(tempt)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페이라제인'은 '시험하다' 보다는 '테스트하다'(test)라는 뜻입니다. 자동차 회사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이 판매하려는 자동차가 혹한이나 사막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온갖 시험(test)을 다 거쳤다는 것을 보여주곤 합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테스트'(test)이고 마귀의 편에서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신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廣野, wilderness)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신 광야는 예루살렘과 사해(死海, Dead Sea) 사이의 광야로 구약에서는 여기를 '예시몬'이라 불렀습니다. 그 뜻은 '황폐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길이 57km, 넓이 24km가 되는 이 지역은 부스러진 석회암과 자갈이 흩어져 있는 곳입니다. 석회암은 불에 타서 껍질이 벗겨진 것만 같고 바위는 노출되어 톱날같이 날카롭습니다. 강한 햇볕을 받으면 일대는 뜨겁게 달아올라 이글거립니다. 이런 광야로 예수님은 시험받으러 가셨습니다. 광야는 고독과 위험과 고난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구경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역시 고독과 위험과 고난의 광야와 같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마태 4:2) 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금식은 유대교의 금식과 달랐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낮 동안만 금식했고 밤에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금식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처럼, 40일을 '밤과 낮'으로 금식하셨습니다. 성서에서 '40'은 특별하고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했고, 노아의 홍수는 40일 밤과 낮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40일을 보냈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40일을 지상에 머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바이러스 시대 우리가 애쓰는 '검역'(檢疫, quarantine)도 40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대에 항구에 도착한 배는 40일 동안 격리되어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지 검역해야 했습니다. '40'은 무언가 잘못된 것과 관계를 끊고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시험하는 자"(마태 4:3)가 나아와 세 가지의 유혹을 던졌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마귀를 "시험하는 자"로 부르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마귀(diabolos)는 문자적으로 "참소하는 자"(요한계시록 12:10)입니다. 참소(讒訴)란 '남을 헐뜯어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 고해바침'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서는 마귀를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한복음 8:44)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던진 첫 번째 유혹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 4:3)였습니다. 떡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마태 4:2) 상태였습니다. 예전에 김구 선생은 가장 혹독한 고문은 가해보다 오히려 우대라고 말했습니다. 맛난 음식으로 대접하고, 좋은 말로 치켜세워주고, 높은 자리까지 준다면 아마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유혹하는 말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마귀는 유혹의 무기를 우리의 가장 깊은 정신과 욕망 속에서 찾아냅니다.

마귀의 유혹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이 번역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에이'(ei)는 '만일... 이라면' 보다는 '... 이므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돌들을 떡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께 던져진 첫 번째 유혹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놀라운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기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떡 몇 덩이를 엄청난 양으로 늘려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우실 겁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대로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돌들을 떡 덩이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신적 능력으로 충분히 돌을 떡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神性)에 속한 능력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받는 시험도 우리가 가진 능력이나 재능을 통해 올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 능력을 사용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장점도 파고듭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악은 인간이 부여받은 이성의 자유라는 최선의 것에서 온다고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미국의 영성가 로버트 로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마다 나는 굳게 맹세한다. 내 채소밭으로 돌아가서 진정 내가 의지해야 할 것들만 의지하겠노라고." 그는 비난과 실패만이 아니라 칭찬과 성공도 우리를 진정한 삶에서 탈선하게 할 수 있음을 경계하라 말합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에 대해 예수님은 구약성서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시며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 4:4)고 응답하십니다. 사실 떡(음식)은 단지 몸과 관련된 욕구만이 아닙니다. 그건 몸의 허기(虛飢)만이 아니라 마음의 허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의 기원도 먹는 것과 관련됩니다. 뱀의 유혹을 받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세기 3:6) 하였습니다. 이같이 음식은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어떤 음식을, 어떻게, 얼마나 먹느냐가 나의 존재를 말해줍니다("You are what you eat"). 먹는 것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마귀는 예수님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다가왔습니다. 같은 마귀는 오늘도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선언하심으로써 이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35)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위로하셨습니다. 인간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19)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려고 하면 반드시 마귀의 유혹에 빠집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이름 없는 들풀을 입히시는(마태 6:26-30) 은총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첫 번째 유혹에 실패하자 "시험하는 자"는 공격의 각도를 바꾸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갑니다. 성전은 시온(예루살렘)의 산꼭대기에 세워졌습니다. 그 한 모퉁이에는 솔로몬의 행각과 왕실 행각이 만나는 모서리가 있는데 그 아래로는 140m가량이 되는 낭떠러지, 즉 급경사가 진 기드론(Kidron)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 성전 꼭대기에는 매일 아침 제사장이 나팔을 들고나와 헤브론산 위 첫 새벽 놀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첫 새벽빛이 비칠 때 사람들에게 아침 희생제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길게 나팔을 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올라서서 수많은 사람이 운집한 성전 뜰로 뛰어 내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후기 유대교의 미드라쉬(Midrash, 성경 주석 설교)에서는 메시아가 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라 했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리던 백성의 기대를 한껏 만족시켜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마귀는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태 4:6). 마귀가 인용한 성경 구절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한 시편 91편입니다. 놀랍게도 마귀는 성서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성서를 부정직하게 사용합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합니다. 성서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계적이거나 마술적인 힘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성서를 인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성서를 인용하는 마귀의 유혹을 예수께서는 성서로 물리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태 4:7). 여기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입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심하게 불평하고 모세와 다투었던 사건(출애굽기 17:1-17, 민수기 20:1-13)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는데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기]"(출애굽기 17:7)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이 사건이 자주 언급됩니다. 시편 78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40-41절)고 탄식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며 마귀가 의도적으로 빠뜨리고 아전인수격으로 한 구절만 끌어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을 바로 잡으십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취사 선택하여 성경 전체를 왜곡하는 것에 일침을 놓으십니다. "기록하였으되"라고 유혹하는 마귀를 예수님은 "또 기록하였으되"로 물리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부분이 아닌 전체로 받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맥락 속에서 귀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성서를 공부해야 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부러워하던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는 기막힌 생각을 해냈습니다. 나뭇가지 하나를 자기 입에 물고 있을 때 새가 양쪽에서 그 가지를 물어 하늘을 나는 생각입니다. 개구리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새들이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오르자 개구리도 덩달아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비행이란 말입니까. 이 모습을 지켜본 동료 개구리들은 감탄하여 자기들 위로 날아가는 개구리에게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멋진 생각을 해낸 거야?' 하늘을 날던 개구리는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했지'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뗐습니다. 그 순간 개구리를 높은 하늘에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내가 바로 너희의 메시아다'라고 대중 앞에서 과시하라는 유혹입니다. 세상의 환호와 갈채를 받을 절호의 기회를 잡아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끝내 표적(表迹, miraculous sign)을 구하는 유대인들(마태 16:1, 마가 8:11, 누가 11:16)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마태 16:3-4)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과 이적에 의존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전형적인 불신의 행위입니다.

두 번이나 유혹에 실패한 "시험하는 자"는 이제 더욱 교묘하게 세 번째 공격을 시도합니다.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 4:9)며 유혹합니다.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마귀의 약속은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 즉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편 2:8)는 말씀을 '서투르게 흉내 낸 것,' 즉 패러디(parody)한 것입니다. 급기야 마귀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4:10)고 강하게 응수하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개인적인 이름인 '사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어 '사타나스'는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디아볼로스,' 즉 마귀에 대한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마귀의 이름을 사탄이라 부르면서 강력히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서를 인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 4:10). 주님은 이 말씀을 신명기 6장 13절에서 인용하셨습니다. 원래 (<70인역에서>) 이 구절은 "주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일부러 '경외하고'(포베오) 대신에 '경배하고'(프로스퀘네오)를 사용하셨습니다. 마귀가 사용한 말, 즉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를 그대로 되받아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원래 없는 "다만"를 새로 추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함을 그만큼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거래를 시도했습니다. '나랑 타협하자. 하나님의 뜻을 너무 그렇게 도도하게 내세우지 말고 나와 타협하자. 그러면 네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위해 마귀에서 경배하라는 건 권력과 소유를 위해 자기의 영혼을 팔라는 말입니다. 마귀의 이 세 번째 유혹은 자족하고 절제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매우 치명적입니다. 사막에 사는 선인장들은 비가 오면 빗물을 너무 많이 들이켜 끝내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새나 짐승들의 먹이가 된다고 합니다. 물이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많이 마셔도 문제입니다. 과욕은 목숨까지 잃게 합니다. 자족하지 않으면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누가 12:15-21)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큰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밭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둔 것입니다. 행복한 궁리 끝에 이 부자는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기로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비유를 들려주시며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일깨우셨습니다. 여러분은 재물에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까?

세상의 권력과 소유에 대한 탐심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오히려 더 부족해집니다. 그것은 마치 짠 바닷물과 같습니다. 바다에서 배가 파선해 표류할 때 아무리 목이 말라도 절대 마시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방에 있는 바닷물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존재의 허기를 소유로 채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채워도 존재는 소유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존재는 하나님으로 채워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채워야만 채워집니다. 오늘의 신약서신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4-15)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 안에 탐심이 존재하는 한 유혹은 계속될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듭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자발적 가난을 명령하셨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 10:9-10)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가난하여 가난한 자 곁에 서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존재를 비우고 그 안에 은혜로 채운 사람입니다. 탐심을 버릴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립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여러 수도원을 여행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를 만났는데 그는 금방 쓰러질 듯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카잔차키스가 물었습니다. "수도사님은 아직도 사탄과 씨름하고 계십니까? 너무 힘들어 보이십니다." 수도사가 대답합니다. "웬걸요, 사탄과 싸움은 벌써 끝났습니다." "아니 그러면 누구와 싸우기에 그렇게 지쳐 있습니까?" 수도사가 다시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싸우지요." 이 말에 깜짝 놀란 카잔차키스가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싸운다고요? 설마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수도자가 마지막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 지려고 싸웁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 지는 것이 이리도 어렵습니다"(한희철, 『지킴 20 버림 20』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광야에서의 시험은 사실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서 지는 것입니다. 나를 생명과 은혜의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과 싸워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로마서 12:2)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의 여정을 막 시작했습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가 너를 지키리라. 내가 너를 선한 길로 인도하리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런데 또 하나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 들립니다. 아니 우리 내면에 공명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거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해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 만일 네가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세상 권력과 재물을 너에게 줄게.' 두 번째 목소리는 달콤한 거짓 약속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 유혹합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약속과 유혹의 소리를 분별하고 두 소리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은 으레 지나가는 일련의 행사가 아닙니다. 탐심과 불안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자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광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거기서 예수님 옆에 서서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똑같은 유혹과 시험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히브리서 4:14-15) 분입니다. 바로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8)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고 약속하셨습니다.

앙겔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의 시입니다. "그리스도, 베들레헴에 천 번을 나신 들 / 그대 안에 나시지 않으면 / 그대 영혼 의지할 데 없으리 /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 아무리 바라본들 / 그대 마음속에 세워지지 않으면 / 그 십자가 헛되고 헛되리."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고 여러분 영혼 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빌립보서 2:8)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지는 거룩한 사순절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순절에 우리에게 약속과 유혹의 소리들을 듣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그것들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듣고 거짓소리들을 분별하여 당신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아멘."(월터 부르그만) (20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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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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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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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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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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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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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