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부활주일설교] 새 하늘 새 땅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65:17-25, 누가복음서 24:1-12, 고린도전서 15:19-26

[부활주일을 맞이하며]

오늘 설교는 지난 4월 2일 성금요예배 설교의 제2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성금요일 설교와 함께 들으시면 더 풍성한 의미를 발견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매년 부활주일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예수는 기원전 4년에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고, 30대 초반에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가 서른 즈음의 나이에 로마제국의 가장 참혹한 형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역사적 실존 인물입니다. 갈릴리 청년 예수만이 온 세계의 왕이시고,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 주님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고 확신하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처음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 갈릴리 어부들, 가난하고 굶주린 떠돌이 민중들,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 찍힌 세리들과 성 노동자 여인들, 무력하고 힘 없는 장애인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을 기대하던 백성들은 예수가 유대 독립을 이뤄줄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몰아내고, 기적을 일으키며, 무상 급식을 제공하고 삶의 용기를 주는 가르침을 베풀었던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의 예언자로, 이 세상을 뒤엎고 로마 세력을 물리쳐줄 메시아로 기대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를 향해 크게 환호하였고, 그를 향해 열심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무자비하게 유대인들을 박해했던 셀류코스 왕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몰아낸 마카비 가문의 형제들처럼 예수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몰아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예수 일행의 은신처를 누설한 제자에 의해 예수는 체포당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전부 도망가고 붙잡힌 예수는 비정상적인 약식 재판에 의해 하루 만에 그야말로 인류가 개발한 가장 참혹한 형벌 중에 하나인 십자가 처형으로 죽고 맙니다. 예수에 대한 모든 기대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그에 대한 기대는 너무나도 과도한 환상이거나 착각, 소망의 투사였던 것일까요? 예수 운동에 가입한 사람들은 지배자들의 눈을 피해 숨어야 했고, 세상에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반전(反轉),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무력하게 흩어졌던 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도망가던 그 때 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셨다." "무덤을 비우고 살아나신 예수를 갈릴리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신약성서라는 문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부활이 없이는 신약성서가 생겨날 수도 없고 그리스도교도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기정사실로 인정합니다. 성 금요일 예배에서 자세하게 말씀 드렸듯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렇게 참혹하게 죽었을 때 제자들은 깊은 좌절과 총체적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겁을 잔뜩 먹고 숨어 지내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용기가 생기고, 자신의 전 삶을 바치고, 목숨까지 내어 놓으며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가게 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들의 외침은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제자들 사이에서도 처음에 이 말은 어처구니 없는 말로 들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 본문은 부활의 첫 목격자였던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빈무덤을 확인하고 열한 제자에게 전하였고, 또 다른 여인들도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그들은 이 말을 어처구니 없는 말로 들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은 눈으로 관찰하고 반복해서 실험하며 그 결과를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 사실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에게 제일 처음 발생한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은 예수가 죽기 전의 몸과 동일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알아보기도 하고 알아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문을 모두 닫았는데도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예수님의 모습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 소생이 아닙니다. 다시 썩고 죽을 그 예전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의 부활이 물질적 살덩이를 다시 가지게 되었다는 보도가 없습니다. 그의 몸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몸은 살덩이가 아니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전 인격적 존재, 즉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총체적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 안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스스로 불멸하는 영혼에 있는 것도 아니요, 동물과 같은 몸만을 지닌 육체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그의 정체성이 온전히 보존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전적인 행동에 의하여 예수께서 이제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최종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 세계와 우주의 불의함과 어둠을 모두 극복하는 새로운 몸을 획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제 예수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차원으로 온전히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무소부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 끝 날까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 속에서 우리는 죽음이 무력화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리고 있음도 확인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부활이 그냥 평범한 사람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고 살다가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행해왔던 그의 사역 때문에 그는 죽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고, 또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가르치고, 행했던 모든 사역이 정당하다는 것,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가 그에게서 드러났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자칭 이스라엘 왕이라고 했고, 하나님을 모독했고, 사람들을 선동했다고 고발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재판을 뒤집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들, 병자들을 고쳐주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피고, 그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어둠의 그늘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처럼 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예수처럼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세계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부활을 맛본 자는 과거의 그늘에 붙잡혀 살지 않습니다. 이전 것들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소유합니다.

부활은 모든 존재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에 쌓여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무채색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들을 찾는 것입니다. 내 집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거나, 내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는 일은 없습니다. 강제로 빼앗고, 빼앗겨서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내 마음을 열어 모두를 초대할 수 있고, 서로가 품어 줄 수는 있습니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목숨을 영원히 늘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백 살을 살았느냐, 살지 못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간에서 영원을 체현했느냐, 단 한번이라도 깨침이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부활은 내세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참되게 살아야 죽음이 삶의 완성이 됩니다. 또한 지금 여기에서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은 도리어 생생해 집니다. 부활은 사자가 여물을 뜯으며 뱀이 흙을 먹는 사건 속에서 발생합니다. 남을 억압하고 누르고 짓밟고 서로 해치려는 세상에서 부활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그런 세상과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또 소망 없는 듯 보이는 세상에 새로운 문을 여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다가와 새 하늘과 새 땅을 엽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우리 주님 예수님의 부활로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자연과학적 사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바로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그것을 일구어 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서로 해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 자리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품고 오늘도 부활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당신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당신은 답답하고 막막한 어둠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황폐한 땅, 허무한 공간에 새 하늘과 새 지평을 여십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소서. 우리 생명사랑 교우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전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부조리한 이 세상의 잘못된 가치들에 대항하고, 참다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부활의 아침이 밝아, 온 세상이 기뻐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즐겁게 환호하며, 무한한 기쁨으로 새들이 노래합니다.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 모두 달려 나와 빛의 축제를 열며 주님과 함께 춤을 춥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삶이 영생과 평화와 소망과 기쁨으로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가진 것을 드립니다. 몸과 영혼, 시간과 재능을 드립니다. 주님께 받은 것이기에 다시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예물을 받아 주옵소서. 이 예물이 세상을 치유하고 교회를 변혁하는데 쓰이게 하소서. 우리가 물질을 드림으로써 물질로부터 자유하고, 물질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이 물질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선교활동을 할 때에 우리를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과 기도를 통해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부활신앙으로 하루하루를 생기 넘치게 살아가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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