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껍데기는 가라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사무엘하 18장 31~33절, 시편 90편 1-6절, 디모데후서 3장 1-9절

설교문

[영원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생]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말씀은 제가 장례 예배의 설교 때에 자주 사용하여 택하는 구절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비추어 보면 우리네 인생은 덧없는 순간일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천년과 같은 시간도 하나님께는 그저 지나간 어제요,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나서 꽃을 피웠다가,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버리는 하루살이 풀처럼,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추면 우리 인생은 한순간의 꿈일지도 모릅니다. 만물의 영장이며, 인류가 가꾼 문명을 자랑해 본 들, 하나님께서 돌아가라 하시면 한 줌의 재가 되고 말 운명이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이 지구인으로 현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 매 순간을 우리는 매우 뜻 깊고 알차게 보내야 합니다.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 후회를 덜 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어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행복한 시간들을 잘 누리지 못하고, 그 행복을 빼앗기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있다가 아프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는 안타깝게도 주어진 삶의 소중함을 모른 채 애먼 것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거나, 한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인생의 오점을 남기는 일들도 비일비재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이들의 행실에 대해 일일이 알려 줍니다. 디모데후서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고귀한 삶을 살기보다, 돈과, 돈이 주는 쾌락을 더 사랑하여 절제할 줄 모르며, 뽐내고 교만하며, 선을 좋아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며, 배신하고, 무모하고, 자만합니다. 무정하며, 원한을 품고, 남을 비방하고 난폭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성경이 너무 인간을 비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가끔 있지만,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들리는 소식들을 보면 성경말씀이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겠다며 조카를 때리고 물고문한 이모의 이야기, 3세의 여아를 방치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구미의 사건, 무례하게 가방을 치운 것에 항의하는 여성을 다짜고짜 두들겨 패고 졸도시킨 대구의 한 카페의 남성 손님, 스토킹을 하다가 노원의 세 모녀를 모두 살해한 청년, 아이들을 믿고 맡겼지만 학대와 비인격적 대우를 하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교사들,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무례한 욕설을 퍼부으며 하대하는 인간들, 마스크를 제대로 써달라는 운전자들에게 주먹세례를 퍼붓는 사람들. 이런 뉴스를 들을 때면 디모데후서의 말씀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연애인들과 스포츠 선수들 사이에서 계속 터지고 있는 학교폭력 논란, 코로나 19의 4차 재확산과 온갖 기후 재앙들의 소식, 가짜 언론들과 무분별한 유튜버들의 난립 속에 오픈 채팅방을 통해 들어오는 온갖 유해한 싸이트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어떨지 가끔씩 정말 암울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찼다고 탄식하는 장면(6:5)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데, 오늘날의 세상도 하나님의 후회를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을 심판하시는 가운데에서도 노아를 불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신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다시 요청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

세상이 이러하기 때문에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들의 사명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코로나 19를 통해서 한국 개신교의 비상식적인 행동과 맹신과 광신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함께 모이는 곳에서 더 잘 발생하고 전염될 가능성이 높은 코로나가 한국 교회들에게서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한국 교회가 이 땅의 사람들의 삶에 매우 깊숙하게 들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135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는 외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이 땅의 토착종교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교는 실로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세동점의 시대에 동아시아 전체가 서구 문명이 걸어온 근대화의 길에 들어섰고, 후발주자가 된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와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지만,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서서 서구 문명을 따라잡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국가가 체계적으로 국민을 보살피거나 챙기질 못했습니다. 국민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동원되는 것이 당연한 듯 여겼고, 그것을 이용해 먹은 정권들은 자기 배 불리기에 힘썼기 때문에, 지난 한국의 100여년의 역사는 한(恨)과 설움, 억울함이 많은 이 땅의 백성들을 양산해 왔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교회는 마을이 해체되고 새로운 공동체와 안식처를 찾는 우리 국민들에게 실제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약 20만명에 불과하던 그리스도인 인구가, 1990년대 약 천만명이 넘게 500배나 부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의 근대화에 있어서 한국 개신교는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붙들어왔던 교회가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제공하는 상당한 분량의 사회복지는 국가가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제공하던 재미와 공동체 훈련은 온갖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그리고 메스미디어가 잠식했습니다. 교회가 제공하던 신식 교육도 이제는 훨씬 더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이 되어 교회에 모이지 않았는데도 삶의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교인들은 이제 더욱 과감하게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아니었지만, 교회에서 얻을 수 있던 많은 부수적인 것들을 이제 사회에서도 얻을 수 있게 되자 교회가 삶의 중요한 공간과 모임이 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런 위기를 다른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간 교회들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사회생활을 잘 하기 위한 하나의 친교의 장으로, 정치권력에 기웃거리며 그들과 모종의 관계와 끈을 맺는 장소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새롭게 성장한 강남의 후발 대형교회들은 보수적인 엘리트 신자들의 그룹과 목회자들과의 연대 속에서 한국의 보수 기득권을 떠받치는 매우 중요한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비우는 방식이 아니라 힘을 숭상하고 추구하는 방식을 택하고 만 것입니다. 예전 방식에 머물던 교회는 점점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고스란히 늙어가고 있고, 권력지향적 교회들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이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권력지향적 엘리트 교회에도 끼지 못하고, 기존의 교회에서도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은 매우 곤궁한 삶 속에서 이단이나 비상식적으로 목회하는 교회들로 몰리고 있습니다. 최근 4차 코로나 유행의 시발점이 된 자매교회 같은 곳도 특별한 치유 은사를 강조하는 곳인데, 대체로 이런 곳들은 현대 민주시민이 가진 상식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난으로 정상적인 돌봄과 치유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가게 됩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지형도들 속에서 이 세 부류 교회들의 공통점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꿈꾸시고 사셨던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서 이탈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본래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인간성 회복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역사와 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대한 변혁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지만, 그 운동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근원적 사랑에 감동한 인간,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으로 세상을 품으려는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는 길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가 되살아나는 길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우리 모두가 바로 작은 예수와 같은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어떤 원리나 개념을 추구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여 그 신념에 투철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한 사람,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고 고백하는 한 사람을 한국 교회는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에서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묻어나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이고 실천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무엘하의 본문은 매우 비극적인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역시 다윗입니다. 다윗의 부하 요압은 반란군을 제압하고, 에티오피아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립니다. 다윗의 통치에 반대한 역적의 무리들을 물리친 것은 에티오피아 사람의 말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다윗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반란의 수괴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반란을 진압하되 압살롬이 살아 있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에 다윗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크게 목놓아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윗은 그 짧은 순간에 아들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르며, 내 아들이라고 다섯 번이나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죄를 저질렀을 때 아빠로서 그를 제대로 훈계하고 바르게 가르쳤다면,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이 자기 이복형 암논에 의해 겁탈을 당한 일이 있었을 때, 그 때 다윗이 나서서 제대로 일을 풀었더라면, 압살롬이 원수를 갚고 나서 한편으로 통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죄책감에 시달려 했을 때, 아버지 다윗의 눈을 피해 도망했을 때의 그 모든 심정들을 다윗이 어루만져 주었더라면 오늘의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타고난 장군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감한 장수였으며, 위대한 리더십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권력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나약한 한명의 인간으로 무너지는 심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 또한 바로 이렇게 우리들의 매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껍데기만 그럴싸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몰려 올 때도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 신앙의 힘이고, 자신의 위선을 다 떨쳐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울고 웃으며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또한 신앙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코로나 19를 맞이하여서 본래적인 신앙에 충실할 것인지, 대충 비슷하게 꾸민 신앙으로 그저 적당히 때울 것인지 묻는 물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코로나 확산세는 4차 5차 대유행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고, 이런 상황은 교회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킬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이 평온한 시절에는 진짜와 가짜가 구별되지 않고 적당히 한 무리 가운데 공존할 수 있었지만, 위기와 어려움의 순간에는 진짜 신앙이 아니면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목사는 이제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인지를 물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을 진정한 신앙인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더욱더 최선을 다해 목회해야 합니다. 목사 자신이 잘못된 신앙의 내용과 형식을 갖게 될 경우, 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난에 직면하거나, 점차 소멸되는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잘못되고 교인이 올바르면 목사는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올바르고 교인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서도 목회자의 지도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도 목회자는 떠나기 쉬운데, 그러면 그 교회는 갈 길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교인들이 함께 한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저와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목회와 선교에 함께 하는 모든 교인들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신앙, 삶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교인들로 성숙하고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출애굽 백성이 훈련을 받았듯이, 몸으로 겪고, 제 스스로 물음을 물어가며 하나씩 깨우치고 실천하는 훈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할 마음이 생기도록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흠뻑 빠져야 가능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매김 없다면 우리는 거룩한 영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

지난 주 금요일은 성금요일 예배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은 바로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함께 축하하며 우리 모두 부활의 소망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회복하는 날이었습니다. 매년 다가오는 이 성금요일과 부활주일에 우리는 어떻게 실로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실제적 체험을 할 수 있을까요? 연례행사로 치르는 형식이 아니라 실제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손과 발로 뛰게 하는 감격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망원동에 있는 작은 교회의 성금요예배 영상을 보고 그런 감동과 밀려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겠다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교회는 바로 제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새민족 교회였고, 우리 교인들이 가서 평신도 설교로 강단교류도 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작년 6월에 30대 초반에 젊은 목사를 담임목사로 세웠습니다. 황푸하 목사입니다. 인디 뮤지션이기도 한 황 목사는 이번 성금요예배와 부활 주일 예배를 교인들과 함께 한편의 드라마로 기획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교인들에게 실제적인 사건으로 느껴지게 하기 위해 교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故 나사렛 예수께서 4월 2일 금요일 오후 3시 경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 드립니다. 예를 갖추어 자리를 마련해야 마땅하나, 코로나 19로 인해 조문 없이 장례를 진행함을 양해바랍니다. 입관예배와 발인예배는 새민족교회 유튜브 채널에서 라이브로 진행하오니 겸허한 마음으로 참석 부탁드립니다. 채팅으로 조의를 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의금은 일요일 발인예배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해 주시고, 근조화환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새민족 교회는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 동생 야고보의 이름으로 부고장을 만들고 실제로 관을 사서 교회에 비치하고, 성금요일예배에 교인들이 와서 조문하게 하였습니다. 부활절 예배는 발인예배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관 뚜껑이 열려 있고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관 속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예배를 보며 제가 너무 감동해서 토요일에 황 목사님께도 전화를 드리고, 그 교회 장로님에게도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으로부터 답 문자가 왔는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교회 현장에서 본 예수님 장례식은 더 감동이었습니다. 입관할 때 망치로 관에 못 박는 소리가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에 이르기까지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도 삼일장을 치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월호 7주기를 앞두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도회와 시위를 청와대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금요예배를 마치고 보라색 천으로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를 덮는 예식을 진행했지만, 새민족교회는 직접 관을 준비하고 입관예식으로 성금요예배를 진행한 것입니다. 이 예배에 참여한 새민족교회의 교인은 예수님의 영정사진 앞에 국화를 내려놓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황푸하 목사님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막걸리와 육개장도 준비하여 교인들과 함께 먹으며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새민족교회의 성금요예배와 부활주일 예배까지의 거룩한 삼일은 전 세계에서 실로 한국교회만 실행할 수 있는 중요한 한국적 고난주간 예배 모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예식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딸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실제적인 고민과 실행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어느 교회가 진정으로 우리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을까요? 7만개가 넘는 교회 중 어느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을까요? 3천억 넘는 돈으로 교회 건물을 지은 교회일까요? 아들에게 목사직을 물려주는 세습하는 교회일까요? 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이스라엘 국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반정부시위를 하면서 헌금을 걷는 교회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교회를 만들어 미국 유학이라고 하는 세속 인간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교회일까요? 과연 어느 교회가 진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일까요?

AD 66년부터 73년까지 벌어진 유대-로마 전쟁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절망적 상황에서 신앙의 위기를 느끼고 좌절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공간을 넘어서,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성직자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으며, 하나님과 소통하며 믿음의 형제자매끼리 용서하고 용납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코로나 19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늘 그러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모습을 부수라고 합니다. 교회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생활신앙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교회의 예배와 각종 모임이 생활신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주님은 너희가 드리는 예배와 모임이 역겹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언의 말씀을 숱하게 수많은 예언자들로부터 들어 왔습니다.

제국에 빌붙어 사는 이 땅의 친일 기득권자들에게, 경제적 성장이라는 허울을 쓰고 독재를 찬미하며 숭상하던 이들에게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는 시 한편으로 경종을 울렸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이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 안에도 껍데기가 있고 알맹이가 있습니다. 내가 뒤집어씌운 껍데기는 벗어 던지고 알맹이를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진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면 십자가도 지겠다는 각오 없이 부활의 영광을 누리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19는 한국교회의 껍데기를 벗겨 내고 알맹이만 남게 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실 뿐만 아니라 이번 기회에 모든 가식과 위선을 벗어 던지고 주님 앞에서 참된 알맹이로 서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서 헤매는 우리를 부활시켜 주소서. 껍데기를 벗고 참된 알맹이로 다시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의 본질에 닿게 하시고, 굳건한 반석 위에 믿음의 집을 짓게 하여 주소서. 우리들의 입과 우리들의 행동과 우리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게 하시고, 오늘 하루도 온전히 주님의 은총가운데 감사함으로 지내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부활절 둘째주일을 보냅니다. 부활절 아침의 기쁨이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지속되게 하여 주소서. 작은 부활절인 주일을 맞을 때마다 죽음의 세력, 좌절과 절망의 세력들을 물리치고 언제나 새롭게 일어서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이 영생과 평화와 소망과 기쁨으로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가진 것을 드립니다. 몸과 영혼, 시간과 재능을 드립니다. 주님께 받은 것이기에 다시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예물을 받아 주옵소서. 이 예물이 세상을 치유하고 교회를 변혁하는데 쓰이게 하소서. 우리가 물질을 드림으로써 물질로부터 자유하고, 물질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이 물질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선교활동을 할 때에 우리를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과 기도를 통해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껍데기로 살지 마십시오. 참되고 알찬 열매들을 삶에서 맺으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모든 위선을 벗어던지고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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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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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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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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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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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