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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활은 죽은 후 천국 가는 내세적 믿음의 공식 아냐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전직 지질학자

입력 Apr 12, 2021 07:02 PM KST

예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도 아니며, 미래에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도 아니다. 성서가 밝히는 부활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현재형의 사건이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교회 내부에서 지겨울 정도로 예수 부활의 이야기를 이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로 이주해가는 낡은 이야기로 들어왔다. 원초적으로 예수 부활은 새로운 시작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반복해서 들어왔던 낡고 진부한 이야기보다는 생기가 넘치는 새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예수의 죽었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잃었던 참 사람 예수의 정신과 삶이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의 내면과 삶 속에서 부활하는 사건이다. 신약성서를 최초로 기록한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빈 무덤"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죽었다. 죽었던 예수의 몸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미래에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지구로 돌아오는 재림은 없다. 예수 부활 이야기의 심층적인 의미는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단 한 번 있었던 과거의 사건도 아니며, 미래에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도 아니다. 원초적으로 성서가 밝히는 부활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건이다. 물론 예수 부활의 이야기는 이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로 이주해가는 낡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은 새로운 시작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2021년 부활의 의미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암흑과 같은 때가 끝나고 새로운 빛과 희망의 시작 곧 새로운 이야기를 살아내는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이기적인 욕심이 조건없는 사랑으로, 부족적이고 차별적인 믿음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으로, 불의가 정의로, 불공평이 평등으로, 비겁함이 담대함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시작의 현재형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활의 신앙은 동료 인간들을 폄하하고, 차별하고, 탄압하고, 착취하기 보다는 서로 존중하며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참된 인간으로 새롭게 다시 사는 것이다. 부활은 지구촌의 빈곤과 전쟁과 생태계의 파괴를 막고 온 인류의 웰빙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는 것이다. 다른 인종, 종교, 국가를 원수와 적으로 삼지 않고 포용하고 돌보며 사는 것이다. 부활은 미움과 원한을 조장하는 종교와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부활은 우리 각 사람이 따로 분리되어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은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을 벗어 버리고 지금 여기에서 자유하게 더욱 생기가 넘치게 사는 것이다. 부활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새로운 이야기를 살아내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서 하나의 별이 폭발하여 사라져야 새로운 별이 생겨나듯이, 우리 자신의 죽음은 다른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인간의 자아의식은 진화되고 성숙해진다. 조건없이 사랑하고, 사심없이 서로 돌보며 사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외로움을 넘어선다. 부활은 이렇게 생존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참된 인간의 포월적인 삶의 시작이다.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시집 <예언자>(The Prophet) 중에 '종교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는데, 오늘 하루하루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뜻에서 부활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생각케한다: "그러자 한 늙은 성직자가 말했다.

우리에게 종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대답했다. '내가 오늘 그것말고 다른 무엇을 말했던가. 모든 행위, 모든 명상이 곧 종교가 아닌가. 또한 행위도 명상도 아니지만, 심지어 두 손이 돌을 쪼고, 베틀을 손질하는 동안에도 내면에서 언제나 솟아나는 경이로움과 놀라움, 그것 또한 종교가 아닌가. 자신의 행위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또한 자신의 하는 일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분리시킬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자신의 시간을 앞에 펼쳐 놓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이것은 [하느님]을 위한 시간, 그리고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시간, 이것은 내 영혼을 위한 시간, 이것은 내 육체를 위한 시간. 그대의 모든 시간은 자아에서 자아로, 허공을 퍼덕이며 날아가는 날개. 도덕을 마치 가장 좋은 옷처럼 입고 다니는 자는 차라리 벌거벗는게 나으리라. 바람과 태양이 그의 피부에 구멍을 내지는 않으리라. 자신의 행위를 윤리의 울타리에 가두고 있는 자, 그는 자신의 노래하는 새를 새장 안에 가두고 있는 것. 가장 자유로운 노래는 철창과 쇠창살 사이로는 나오지 않는 법. 또한 열렸다가 곧 닫히는 창문처럼 예배드리는 자, 그는 아직 자신의 영혼의 집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다. 새벽에서 새벽까지 창문이 열려 있는 그 영혼의 집에. . .그대의 나날의 삶이 곧 그대의 사원이며 그대의 종교인 것을, 그대 그곳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대의 전부를 데리고 가라. 쟁기와 바람을 일으키는 연장, 나무망치와 악기도. 꼭 필요해서 만든 것도, 다만 놀이를 위해 만든 것도.

왜냐하면 환상 속에서도 그대는 그대가 이룬 것 이상으로 올라 갈 수 없고, 그대가 실패한 것 이하로는 내려갈 수 없기에. 그리고 그대와 함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라. 왜냐하면 아무리 찬송을 해도 그대는 그들의 희망보다 더 높이 날 수 없고, 그들의 절망보다 그대 자신을 더 낮출 수는 없기에. . . . . 또한 그대 만일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수수께끼 푸는 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그보다는 그대 주위를 돌아보라. 그러면 그대는 [하느님]이 그대의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또 허공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는 [하느님]이 구름 속을 걷고, 번개 속에 그 팔을 뻗고, 비와 함께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대는 꽃 속에서 미소짖고 있는 그를 보리라. 또한 나무들 사이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그를".(참고:'종교에 대해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부활은 작은 풀잎이 아스팔트 길의 작은 틈사이로 뻣어나오고, 나비가 무덤같은 껍질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은 여러 해 동안 죽어있던 씨앗이 새싹으로 돋아나고, 갈색의 둥근 뿌리가 땅 속에서 솟아나와 찬란한 색깔로 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은 폭풍이 몰아치는 암흑의 밤이 지나가고 밝은 아침해가 떠오르고, 비가 온 후 하늘이 개이면서 무지개가 신비스럽게 떠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은 어느 환자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건강해 지고, 솔나무들이 죽음의 불길을 맞이한 후에 씨앗을 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은 한 덩어리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고, 메마른 광야에서 봄철에 돋아나는 새싹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부활은 이렇게 우리에게 끊임없이 닥아오고 있다. 이렇게 경이로운 일들이 또 어디에 있는가? 부활을 이것 보다 더 좋은 이미지나 비유나 은유로 설명할 수 없다. 어떠한 언어나 상상력으로도 이것 만큼 부활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의 새로운 삶, 새로운 희망, 새로운 기쁨, 새로운 생명이 부활이다.

부활의 새로운 빛은 오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사는 모습으로부터 빛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부활의 신앙은 지금 자신의 말과 행동에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며, 예수의 정신을 가정과 사회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개혁적인 정신에 따라서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세상의 이분법적인 경계와 장벽을 허물어버리고,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의 누룩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곳이며, 예수가 산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곳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대우받고, 어린이들이 신뢰하고 신뢰받으며 성장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공정하게 살아간다. 성숙한 평화가 있고 전쟁과 테러의 총성이 멈춘 곳이다. 진리와 생기와 밝은 빛이 있는 곳이다. 부활은 우리의 내면과 세속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활의 새로운 희망은 현재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불공평하게 대우받고, 착취당하고, 탄압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편에 설 때에 부활이 있다. 눈물이 메말라 버릴 정도로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할 때에 부활이 있다.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일 때에 부활이 있다. 기후변화와 기후온난화를 일으키는 생태계 파괴를 반대하는 외침 속에 부활이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가르치시고 몸소 살아내었던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삶은 그의 죽음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부활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의 삶을 두려워 하고 거부하기 보다는 담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 부활의 핵심은 예수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는 현세적인 이 세계에서 하느님과 다른 동료 인간들과 나를 동일하게 대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과 나를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은 죽은 후에 천국에 올라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와 폭력이 없는 평화와 조건과 사심없는 사랑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도구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종교, 나의 믿는 방식 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것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인종, 성별, 성적본능, 연령, 신체기능, 국적, 출신, 경제적 능력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존중하며, 다른 사람들이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죄인이 아니라 성스러운 생명이라는 깨달음과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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