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주의 은혜의 해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출애굽기 20:1-6, 골로새서 1:15-20, 누가복음 4:16-19 -

설교문

지난 목요일,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UN에 제정한 6월 5일 '환경의 날'과 달리 4월 22일 '지구의 날'은 민간에서 제정하고 기념한다는 데 더 의미가 있습니다. 1970년에 시작해서 올해로 51번째를 맞은 이번 '지구의 날' 주제는 "Restore Our Earth", 즉 "지구를 회복하자"입니다.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을 때 우리는 '회복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깊이 병들었습니다.

'지구의 날' 시작에 영감을 준 사람은 미국의 여성과학자 레이첼 카슨(Rachael Carson)입니다. 1962년에 그가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을 발표했을 때 세상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DDT와 같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자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출판을 막으려는 화학업계의 거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환경문제에 대한 대중적 각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카슨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상 모든 생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사는 환경을 파괴하는 매우 '특별한' 존재임을 고발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창조주 바로 다음, 아니 실은 창조주와 동급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짚신벌레 몇 단계 위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책의 표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은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지구를 파괴함으로써 그 자신도 멸망한 것이다."

지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광활한 우주에서 '생명 현상'이 관찰되는 유일한 행성입니다. 지구에 있어서 특별한 점은 물이 액체 상태로도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우주에서 바라보았을 때 지구가 푸른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다 때문입니다. 그래서 푸른 행성인 지구는 '우주 속의 오아시스'라 불립니다. 지구는 또한 갈색 흙의 행성이기도 합니다. 지구 표면의 70%는 바다지만 30%는 갈색 흙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흙, 즉 토양(土壤, soil)은 암석의 풍화뿐 아니라 식물이나 동물과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지구에만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흙은 '지구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 '휴먼'(human)은 라틴어 '후무스'(humus), 즉 흙에서 유래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사람을 뜻하는 '아담'(adam)은 흙을 뜻하는 '아다마'(adama)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다마'로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질소나 칼슘과 같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영양 성분을 물과 공기 이외에 모두 흙에서 공급받습니다. 흙이 생명의 기본재료인 것입니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오늘의 도시 문명은 불행히도 흙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땅과의 교감을 잃어버렸습니다. 땅(지구)과 올바른 관계 안에 살지 못합니다.

성서에는 '약속의 땅'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인도 아래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 땅은 어떤 땅이었습니까? "여러분이 들어가서 점령할 땅은 여러분이 전에 살던 이집트 땅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여러분이 밭에 물을 대느라고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들어가 차지할 땅은 빗물을 흡수할 수 있는 산과 계곡이 많은 땅이며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1년 내내 보살피고 지켜주시는 땅입니다."(신명기 11:10-12, 새번역)

A.P. & A.H. 휘터만 부자(父子)가 함께 쓴 명저 <성서 속의 생태학>에서 말하듯이, 히브리인들이 노예살이하던 나일강 삼각주 지역은 자연의 혜택이 넘쳐나는 지역이었습니다. 물이 규칙적으로 차고 모든 게 범람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에덴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고된 노동을 통해서만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입에 풀칠하며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는 황무지도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한번 땅을 지나치게 이용하면 이후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땅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회복되어 다시 이용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땅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땅과의 그 평화로운 관계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엄격한 생태적 규칙들로 나타납니다. 다른 민족들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런 높은 수준의 생태학적 지식에 도달했습니다.

레위기에는 먼저 "너희는 한 밭에 서로 다른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레위기 19:19)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같은 땅에 올리브나무나 포도나무 같은 다년생 식물을 함께 심어서는 안 되고, 곡물 같은 1년생 식물은 심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토양이 지나치게 황폐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레위기에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과일나무를 심거든 첫 3년 동안은 그 과일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아라. 4년째에는 그 모든 과일을 감사와 찬양의 예물로 나에게 바쳐야 한다. 그러나 5년째에는 너희가 그 과일을 먹어도 좋다"(레위기 18:23-25)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과일에 종교적으로 '부정(不淨)하다'라는 강력한 금기가 걸렸습니다. 과일나무를 키워본 분들은 압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첫 3년 동안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형성된 유기물질의 총량을 생태 시스템에 빼앗기지 않고 부식질로 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땅에 대한 성서의 이러한 규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년과 희년(禧年, Jubilee) 법입니다. 출애굽기에 "너희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출애굽기 23:10-11)라고 안식년 법을 선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땅은 7년마다 쉬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희년입니다. 레위기에는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위기 25:8-11)라고 명령합니다. 7년마다 땅을 쉬게 하는 것도 모자라, 이스라엘은 50년마다 2년간 수확하지 않았습니다. 7 x 7 = 49가 되는 안식년에 쉬고 뒤이은 50년째 희년에도 땅을 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년에 유대인들은 2년 동안 비축한 식량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레위기 25:20-21)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를 실천했습니다.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수확고가 세계 최대였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 5:13) 사실 이 구절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소금, 즉 염화나트륨(NaCl)은 자신의 성질이나 맛, 즉 짠맛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을 식염, 즉 염화나트륨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하지만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이 '질산나트륨'(NaNO3)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질산나트륨은 중요한 거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유일하게 오늘날 의미의 퇴비를 사용했습니다. 이 퇴비에는 요르단 계곡에서 얻은 질산나트륨이 첨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에 오랫동안 공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소위 '질소 제거 박테리아'라 불리는 미생물 유기체가 질산나트륨을 가스 같은 질소 화합물로 분해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질소가 없는 거름은 자신의 성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 말씀대로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안식년과 희년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퇴비를 사용하는 지혜를 주셔서 그 척박한 땅에서도 풍요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거름이니 거름이 만일 그 효능을 잃으면 무엇으로 땅을 살리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나무들의 '해거리'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무의사' 우종영 선생이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에서 알려줍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나무는 쉼 없이 움직입니다. 사시사철 햇볕을 받아 잎에서 영양분을 만들어 낸 다음, 그것을 부지런히 뿌리와 몸통 여기저기에 운반하고, 뿌리로부터 다시 물을 받아 이를 가지 끝까지 옮깁니다. 그렇게 1년 내내 열심히 살면서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무는 한 가지 엉뚱한 면이 있습니다. 어느 해가 되면 갑자기 열매 맺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병충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토양이 나빠진 것도 아닌데 꼭 '삐친 사람'처럼 꽃도 제대로 안 피우고 열매 맺는 것도 영 시원치 않습니다. 나무가 이렇게 열매 맺기를 거부하는 것을 가리켜 '해거리'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열매를 맺지 않고 해를 거른다는 뜻입니다. 어느 해에 열매를 너무 많이 맺고 나면, 다음 해 가을에 어김없이 빈 가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큰 열매 하나를 맺는 데는 최소한 수십 개의 잎사귀에 해당하는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 해에 걸쳐 열매 맺는 데만 온 힘을 다 쏟으면 어떻게 될까요. 해를 거듭할수록 나무 안의 자생력은 사라지고 점차 기력을 소진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즉 지속 가능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태가 계속 나빠져 어느 순간 한계치에 도달하면 나무는 과감히 한 해 동안 열매 맺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해거리 동안에는 오로지 자신을 재충전하는 데만 신경을 씁니다. 물과 영양분을 과도하게 옮기느라 망가져 버린 기관들을 추스르고, 헐거워진 뿌리를 단단히 엮으며, 말라비틀어진 가지들을 곧추세웁니다. 그렇게 1년간 긴 휴식이 끝난 다음 해에 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실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다 접고 해거리를 통해 과감하게 휴식을 취할 줄 아는 나무! 우리는 이런 나무로부터 삶을 배워야 합니다.

종종 '포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손에 잔뜩 쥔 채 하나도 놓지 않으려 하고, 남보다 먼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앞만 보고 뜁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사람의 숨이 다 가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선 왠지 고무 타는 냄새가 납니다. 기계를 과하게 돌리 때 나는 그 고약한 냄새 말입니다. 혹 지금 우리 각자의 삶이, 우리의 살림이, 그리고 멈출 줄 모르고 지구를 병들게 하는 현 인간의 문명이 그렇지 않습니까. 백무산 시인의 <정지의 힘>을 읽어봅니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만약 이스라엘이 안식년과 희년 법과 같은 땅의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몰락합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는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애굽기 20:4-5)라고 말합니다. 맥락 없이 들으면 반발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왜 자식들이 아버지들의 죄로 인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개인의 독자성을 중시하는 근대문명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하지만 '환경에 대한 범죄'의 경우엔 사정이 다릅니다. 환경파괴는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이 또 그 자식의 자식이 대가를 치릅니다. 유대인들은 욕심을 부려 땅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4대까지 내려가야 땅이 회복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도시를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경제학자(홍기빈)는 "곧 쓰레기가 될 물건을 무한 생산하는 현 문명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긍정하는 유일한 문명"이라 꼬집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멋대로 쓰고 맘대로 버리는 플라스틱과 핵폐기물 등의 각종 쓰레기는 앞으로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그 아이들의 자녀들과 또 그 아이들의 자녀들에게 막대한 고통과 피해를 줄 겁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깊게 땅에, 지구에 '생태적 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을 내서는 안 됩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을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삐친 하나님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둔다 했습니다.(갈라디아서 6:7) 하나님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그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 자들에게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먹는 이야기도 빠질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많은 음식 계명이 있습니다. 성서에는 먹지 말아야 할 동물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레위기 11장에는 정(淨)한 짐승과 부정(不淨)한 짐승이 나오는데, 먹지 말라고 한 부정한 것 중 육지의 동물을 살펴보니 낙타, 말, 돼지, 그리고 소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 땅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데 기여하는 동물들입니다. (낙타는 수송용, 말은 수송과 운용, 돼지는 인간의 음식을 먹으며, 소는 인간에게 쓸모없는 풀을 먹습니다.) 물속에 사는 것 중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무엇보다 개구리입니다. 개구리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성서가 말합니다. 이는 고대 세계에서 다소 예외적인 일인데,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서 어떤 동물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동물이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집트의 따오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에서는 신성한 동물이 없고 거꾸로 '부정'하기에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970년대 말에 방글라데시에서 개구리를 대량으로 잡아 그 넓적다리를 프랑스에 판 적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큰돈을 벌었지만, 말라리아가 들어왔습니다. 거기는 말라리아가 없던 지역이었습니다. 모기를 잡아먹는 개구리를 식용으로 잡아 파니 역병이 창궐한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말라리아 지역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은 또 새 중에서 독수리나 솔개와 같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 그리고 올빼미, 부엉이, 학, 황새, 왜가리, 박쥐와 같은 것들을 '부정'하다고 말하며 먹지 말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들은 모두 '위생 경찰'로 불리는 새들입니다. 성서는 썩은 고기를 먹는 것들, 들쥐나 집쥐를 먹는 새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또 곤충 중에도 먹지 말라고 한 곤충이 있으나 먹어도 되는 곤충이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생태계의 파괴자인 메뚜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세례요한은 메뚜기로 연명을 했고, 예수께서도 광야에 있을 때 메뚜기로 영양 보충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성서에는 우연에 내맡겨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생물이 사람의 음식으로 적합한지 아닌지에 대해 성서는 매우 세세하고 엄격하게 규칙을 세웁니다. 이는 당시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위생에 관한 규율은 더욱 엄격합니다. 레위기 11장에는 쥐의 사체와 같은 어떤 것의 주검이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그릇을 과감히 깨뜨리라 했습니다. 당시 질그릇은 무척 귀한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것의 주검이 화덕이나 화로에 떨어져도 그것들도 즉시 깨뜨려버리라 했습니다. 당시 화덕은 집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쥐의 사체 등을 통해 한번 집기가 오염되면 다시 원상으로 돌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미생물학적 지식을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서에 나타난 율법들은 유대인들이 2천 년 전에,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자연을 생물학적이고 생태학적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당시 주변 국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흙을 사랑하고 땅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대한 그 말씀과 약속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보물'인 성서 안에는 오늘 우리의 병든 지구와 인간의 문명을 치유하고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맨 처음 하신 일은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들러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신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성경을 펴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 4:18-19)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주의 은혜의 해'(The Year of Lord's Favor)가 바로 구약성서의 '희년'입니다. 땅과 땅의 모든 거류민에게 자유와 해방과 쉼을 선물하는 은혜의 해 말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땅에게 이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주의 은혜의 해를 50년마다 손꼽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 안에서 이 은혜의 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골로새서 1:15-20)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이 건강하고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피곤한 자는 쉬십시오. 달리는 자는 멈추십시오. 생산과 업적에 지친 자는 과감히 해거리하십시오. 사람도 쉬어야 하고 땅도 쉬어야 합니다. 사람과 지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롭고 지속 가능한 관계 안에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에 선포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지혜를 오늘 우리를 위한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지친 삶과 병든 지구 위에 십자가의 피로 만물과 평화를 이루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해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진실로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 자들에게 자손 천대까지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아멘.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