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용서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Jul 19, 2021 09:29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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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50:14-21, 에베소서 4:25-32, 마태복음 18:21-35 -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어려운 건 용서인 것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태 22:39) 하신 계명도 실천하기 어렵지만 "용서하라"(누가 6:37) 하신 계명은 실천하기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니,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용서를 잘할 거라는 기대를 받습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손과 발을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새번역)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행전 7:60, 새번역)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신적 용서'의 모범을 따라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강한 도덕적, 신앙적 요청을 받습니다.

실로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용서를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 안에는 특별한 용서의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 6:12)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누가 11:4)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서가 노골적으로 도치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아무리 그리스어 원문을 읽어보아도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래서 우리가 용서하는 힘을 갖게 하소서'라고 읽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감히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읽힙니다. 더구나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용서의 기도를 중요하게 여겨 주기도문 끝에 이런 주석을 확실히 못 박아두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 6:14-15)

강한 조건부로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가 이 구절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비율에 따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이 용서했는가에 따라 하느님은 당신을 용서할 것"이며 "당신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잘못을 두 가지 용서해 주실 것"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는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맘에 고통을 느낍니다. 우리교회 부교역자였던 김시원 목사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용서의 윤리와 기독교 구속론의 새로운 해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2학년도 박사학위 청구논문)에서 잘 논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라면 용서가 그렇게 죽음만큼 어렵다는 말인데, 이 어려운 용서를 그리스도인들은 당위로서 요청받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 '아니 잘못했다고 말도 안 하는데 어떻게 용서합니까!'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종속된 것인 양 해석된 주기도문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은 궁지에 몰립니다. 그리고 용서를 실천하지 못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낍니다. 사실 예수님과 스데반의 용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적, 도덕적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 '신적 용서'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큽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깊은 괴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상처 받아 아픈 고통 중에서 용서까지 하지 못하는 고통에서,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용서를 삶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용서는 올가미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주기도문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 동기는 '외식(外飾)하는 자'들의 위선적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 생활을 비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용서도 이 맥락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제로 하셨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5: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자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이웃에게 끼친 잘못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 가운데 속건제(贖愆祭, trespass-offering - 레위기 6:1-7)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나서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을 찾아가 그가 입은 손해의 120%를 갚은 다음에 성전에 가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피해자를 찾아가서 보상 혹은 배상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120%의 보상은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단 앞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나 자매에게 해를 끼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그 형제나 자매와 화목하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히 이 구약의 속건제 정신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해를 끼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 때 피해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바로 그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유괴범을 아이의 엄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님의 사랑 정신으로 용서하리라 다짐하고 면회 갑니다. 그런데 면회장에 나온 가해자는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자기 역시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아이의 엄마는 절망하고 절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값싼 용서를 베푼 하나님께 저항합니다. 사실 회개 없이 쉽게 선포된 은혜를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cheap grace)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 6:12)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 앞에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자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 5:23-24)라는 가르침이 먼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선행조건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피해자에게 '너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피해자가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받는 자의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 주기도문처럼 - 종종 맥락을 놓치고 잘못 해석하는 마태복음 18:21-35절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자매]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일곱(7) 번을 일흔(70) 번 곱하면 사백 구십(490) 번이 되는데 이 숫자는 '무한정'의 용서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비유로 자기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아주 조그만 빚을 진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던 '악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유명한 이야기 역시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본문도 앞뒤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몇 번을 용서해야 진정한 용서냐고 묻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만일 형제나 자매 가운데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네 단계로 나누어 상세히 가르쳐주십니다.(마태 18:15-17) "네 형제[자매]가 죄를 범하거든 [첫째로]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자매]를 얻는 것이요. [둘째로]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셋째로]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넷째로]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첫 번째 단계는 직접 권고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증인을 대동한 권고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교회에 일러 공적으로 치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 네 번째 단계로 주님은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즉 상관없는 사람으로 무시하고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피해를 입히고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전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 어디에서도 용서를 피해자의 일방적인 의무나 당위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이상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신이 아닌 인간이 이 땅에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입니다. 용서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이고 주체적인 선언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태도에 달린 일이 아니라 피해자의 능동적인 결단입니다. 이 점을 정호승 시인이 탁월하게 정리했습니다. 시인은 심리학자 딕 티비츠(Dick Tibbits)가 쓴 『용서의 기술 Forgiveness to Live』을 읽고 이렇게 자신이 얻은 깊은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용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용서가 내 삶에 왜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용서하려고 노력은 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책에서]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라는 말 한마디를 만나 내 인생에 용서가 왜 필요한지 너무나 쉽고 단순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용서해야 할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을 위해 내가 참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용서하고 싶어서 용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내가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용서는 잊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통념입니다. 용서는 내게 상처 준 이에게 넘겨준 내 삶의 통제권에서 나를 해방시키며, 과거의 상황이 나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용서는 결국 자기 삶과 행복을 자신이 책임지는 것입니다."(정호승,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그렇습니다.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에게 넘겨준 자기 삶의 통제권을 되찾아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 여부에 내가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과거의 상처가 오늘의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렇게 용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용서는 화해가 아닙니다. 피해자의 용서는 화해의 의무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화해는 가해자의 태도와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용서는 화해가 아니라 화해로 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당위 앞에서 종종 너무 빨리,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용서합니다. 하지만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손상된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자매]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누가 17:3-4) 여기서도 "일곱 번"은 무제한의 용서를 의미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상처 입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용서의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는 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 11:28-30)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업적'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낼 수'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주님의 거룩한 희생은 무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용서의 견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기도문에서 주님은 이전까지 하나님의 특권으로만 여겨지던 용서를 인간이 이 땅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권능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마가 2:7)라고 믿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에 보도된 대로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그에게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태 9:2, 마가 2:5, 누가 5:2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를 심각한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서로 수군거리자 주님은 "인자가 세상[혹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혹은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태 9:6, 마가 2:10, 누가 5: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놀라운 사건을 보도하면서, 마가나 누가와는 달리, 그 끝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태 9:8 - 비교 : 마가 2:12, 누가 5:26)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감동받았던 구절이지요. 보십시오.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용서하는 권능을 "사람에게" 즉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용서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즉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신의 고유한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권능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새 삶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용서]하면 사[용서]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한 20:22-23)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을 아시는지요. 성봉호 신부님의 책 『상처와 용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스승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유다는 스스로 나무에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에 대한 용서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후에 통곡하고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 삶을 살았습니다.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 달릴 때 자신을 스승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판 돈을 자신이 갖지는 않았습니다. 은전 30량을 제사장들에게 집어 던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똑같이 유다도 잘못을 뉘우치고 통곡했지만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은 오늘 우리에게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가르쳐줍니다.(정호승,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위험한 화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내 맘속의 화산'일 것입니다. 펄펄 끓는 용암처럼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가 기회가 닿으면 한순간에 폭발하는 내 안의 분노와 울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위험한 화산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맘에서 시시때때로 솟구쳐 오르는 미움과 분노 그리고 적개심과 복수심은 내 영혼을 말려 죽이는 독소입니다. 기나긴 코로나의 재난 속에서 지금 내 안에, 내 가족 안에,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 이 위험한 마그마가 가득 차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에베소서 4:26-27) 했습니다.

먼저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의 잘못과 실수와 실패를 탓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십시오. 용서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존엄과 행복과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이며 권리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남을 용서해야 하는 일보다 남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이 더 많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일에만 마음을 썼지 남이 나를 용서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개 소홀합니다. 하지만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려다 내 형제나 자매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하고 120% 피해를 갚은 다음 돌아와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용서를 하고 또 용서를 청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우리는 저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이 용서의 깊고 푸른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시간상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인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용서에 관한 이야기는 갈등과 분열과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새 가족, 새 민족, 새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을 읽으며 마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26-27, 31-32) 기도합시다.

"그 누구를 그 무엇을 / 용서하고 용서받기 어려울 때마다 / 십자가 위의 당신을 바라봅니다 // 가장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 이유 없는 모욕과 멸시를 받고도 / 피 흘리는 십자가의 침묵으로 / 모든 이를 용서하신 주님! // ... //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기엔 / 죄가 많은 자신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 진정 용서하는 일은 왜 이리 힘든지요 // 제가 이미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 아직도 미운 모습으로 마음에 남아 / 저를 힘들게 할 때도 있고 // 깨끗이 용서 받았다고 믿었던 일들이 / 어느새 어둠의 뿌리로 칭칭 감겨와 / 저를 괴롭힐 때도 있습니다 // ... // 언제나 용서에 더디어 / 살아서도 죽음을 체험하는 어리석음을 /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 제가 다른 이를 용서할 때 / 온유한 마음을 / 다른 이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땐 /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 하루 해 지기 전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과 / 용기를 주십시오."(이해인, <용서를 위한 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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