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배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Aug 02, 2021 10:51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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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33:1-9, 베드로전서 3:8-12, 마태복음 5:7 -

지금 2020 도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한국 선수들의 선전과 모든 선수들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1964년에도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 되는 집을 헐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도마뱀 한 마리가 꼬리에 못이 박힌 채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공사장 관계자들은 그 도마뱀이 못 박힌 벽에서 3년이나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공사를 중단하고 사흘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곧 그 비밀이 풀렸습니다. 다른 도마뱀이 어두운 지붕 밑에서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게 아닙니까. 극한의 상황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며 그것을 이겨낸 두 도마뱀은, 그들의 모습에 감동한 공사장 노동자들에 의해 3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의 수필집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이를 잘 알려주는 문학은 아마도 홀로코스트 문학일 것입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끔찍한 말은 '완전히 타버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홀로카우스톤'(holokauston)에서 나온 말로, 사전적 의미로는 짐승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나 '번제물'을 뜻합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 엘리 위젤의 『나이트』,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그리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가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열다섯 살 안네가 나치 점령 하의 네덜란드에서 겪은 은신 생활의 기록입니다. 위젤의 『나이트』는 안네와 같은 나이의 열다섯 살 소년이 수용소로 끌려가 1년간 온갖 고초를 겪고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와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각각 20대 초반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와 30대 말의 정신과 의사가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고 살아남아 쓴 책입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의 아우슈비츠 수감번호는 119,114번입니다. 그는 거기서 "나는 무엇일까?"를 고민합니다. 나는 '누구'일까가 아니라 나는 '무엇'일까를 고민합니다. 수감자들은 매일 저녁 옷을 벗고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자기들의 자기 알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산 송장이 다 된 자기의 몸뚱이를 바라보며 빅터는 회고합니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 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같이 됐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 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켰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그때의 싱황은 모든 사람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었습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는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였습니다. 그는 그 세계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런데 이 지옥보다 더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말 한마디와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고귀한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빅터는 어느 날 한 감독이 은밀히 불러 빵을 주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아침에 배급받은 빵을 아껴 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나를 눈물로 감동시킨, 빵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었다고 빅터는 회고합니다. "그는 그러면서 나에게 인간적인 '그 무엇'도 함께 주었[는데] 그것은 따뜻한 말과 눈길"이었다고 말합니다. 엘리 위젤의 증언을 보아도, 같은 인간인데도 강제 수용소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하늘과 땅만큼 달랐고, 심지어 같은 피해자끼리도 하늘과 땅만큼 달랐습니다. 자신이 대열에서 뒤처지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체한 아들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가 있었는가 하면, 아들에게 주려고 빵 조각 하나를 품에 숨긴 아버지를 덮쳐 둘 다 죽음으로 몰고 간 아들도 있었습니다. 같은 피해자이면서 금니나 신발 하나에 눈이 어두워 다른 피해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한 사람이라도 희생자를 줄이려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빅터 프랭클은 그 차이를 인간 내면의 자유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그는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인간 이하이기를 강요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빅터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즉]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환경에서도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될 것인가는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결코 외적 환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이 말을 어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우리는 웃어넘기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을 아우슈비츠와 같은 지옥에서 생존한 사람이 했다면 우리는 경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라고 빅터 프랭클은 강조합니다.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 그것을 그는 '영혼의 자유'라 불렀습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산다는 건 곧 고통과 시련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앞에서 무너지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겨냅니다. 고통과 시련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닐 것인가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욥처럼) '이유 없는 고통'은 있어도 '의미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남편을 잃은 그해에 스물여섯 살 생때같은 자식을 연이어 잃었습니다. 이른바 참척(慘慽)의 고통, 즉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신을 원망하다가 원망할 대상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그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그런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라고 한 기자가 묻자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누구든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지닐 것인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정호승,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에서.)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이 지은 『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Humankind: A Hopeful History)』를 읽어보았습니다. 과연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지은이는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친절한 인간이 살아남는다고 말합니다. 지은이는 섣부르게 성선설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은 본성이 선하다기보다 선함을 강하게 선호한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고통과 시련 앞에서 서로 배려하고 함께 연대하는 선함이라는 희망이 살아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철환 작가의 『곰보빵』(2006)은 지금 같이 힘들고 어려울 때 다시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가슴 찡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이지요. 소박한 우리네 이웃의 삶을 잔잔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중 "엄마 친구"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저녁 무렵,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초라한 차림의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저씨, 자장면 두 개만 주세요.' '언니는 왜 안 먹어?' '응,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봐. 아무것도 못 먹겠어.'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말했다. '인혜 누나, 그래도 먹어. 얼마나 맛있는데.' '누나는 지금 배 아파서 못 먹어.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맛있게 먹어.' 큰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남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언니...... 우리도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같이 저녁도 먹구......' 아이의 여동생은 건너편 테이블에서 엄마, 아빠랑 저녁을 먹고 있는 제 또래의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영선이 주방에서 급히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 동안 아이들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 아는 애들이야?' '글쎄요. 그 집 애들이 맞는 거 같은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영선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너 혹은 인혜 아니니? 인혜 맞지?' '네, 맞는데요......' 영선의 갑작스런 물음에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엄마 친구야. 나 모르겠니? 영선이 아줌마......' '......' 개나리같이 노란 얼굴을 서로 바라볼 뿐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한 동네에 살았었는데, 네가 어릴 때라서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들 사니?' 그녀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어루만져 주었다. 그제야 기억이 난 듯 굳어 있던 아이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아줌마가 맛있는 거 해다 줄게.' 영선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자장면 세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를 내왔다.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그녀는 내내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라. 차 조심하구...... 자장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알았지?' '네......' 영선은 문 앞에 서서 아이들이 저만큼 걸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두운 길을 총총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등 뒤로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고 난 뒤 영선의 남편이 영선에게 물었다. '누구네 집 애들이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는데...' '사실은, 저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음식을 그냥 주면, 아이들이 상처받을지도 모르잖아요. 엄마 친구라고 하면 아이들이 또 올 수도 있고 해서......' '그랬군, 그런데 아이들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주방 바로 앞이라 안에까지 다 들리더라구요.' '이름까지 알고 있어서 나는 진짜로 아는 줄 알았자.' '오늘이 남동생 생일이었나 봐요. 자기는 먹고 싶어도 참으면서 동생들만 시켜 주는 모습이 어찌나 안돼 보이든지......' 영선의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소리 없이 아픔을 감싸 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하기', '소리 없이 아픔을 감싸기'...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저는 그것을 배려(配慮, care)라고 생각합니다.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도와줌"입니다. 성서적으로 배려는 은밀한 사랑, 겸손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 6: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은밀하게' 하는 사랑이 바로 배려입니다. 또 바울은 그 유명한 사랑 장(章)에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4-5)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정중한 사랑이 바로 배려입니다. 받는 사람이 모르게,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는 사랑이 배려입니다. 배려는이웃 사랑의 가장 깊고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배려란 "나와는 다른 존재에게 머무를 공간과 기회를 내어주는 것"(김진아, 『지구 정원사 가치 사전』)입니다. 저는 그것을 '생명의 생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배려는 존중입니다. 배려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입니다.

우리나라 시 중에서 나희덕 시인의 <비 오는 날에>만큼 배려를 잘 묘사한 시도 없을 겁니다.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에 읽기 참 좋은 시입니다.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 비닐우산이여 /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 이제는 걱정이 된다. /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 들게 한다면 /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두겠다. / 몸이 젖으면 어떠랴 /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 빗발이 드세기로 /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 적은 어깨에 손을 얹어 / 따뜻한 체온이 되어 줄 수도 있는 / 이 비 오는 날에 /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저의 어릴 적 비닐우산은 대나무로 만든 푸른색 비닐우산이었습니다. 비 올 때 이 우산 쓰고 가다 종종 쇠 우산살에 찔려 못쓰게 된 기억이 납니다. 시인은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 것만 같은 지금, 시인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연대를 짙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과거 로마인들은 연민(憐愍, compassion), 즉 자비와 긍휼을 '영혼의 질병'으로 여겼습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자비해야 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7)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공동번역』)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메시지성경』)라고 말씀입니다. 성서에 '배려'라는 단어는 구약의 열왕기하 4:13에 단 한 번 나옵니다.(예언자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라는 구절 중.)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배려입니다. 따뜻하고 겸손하고 정중한 사랑 배려입니다. 그것은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잘 드러납니다.

김태섭 교수의 말처럼 (『지구 정원사 가치 사전』)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된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두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은 주님 앞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이가 한 '아이'라고 밝힙니다.(요한 6:9) 이 아이는 배를 곪아가며 자기의 마음을 담아 예수님께 그것을 가져왔는데, 안드레는 그게 '얼마나 되겠냐'고 시답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아이의 정성을 보시고, 그 아이가 가져온 작은 것들을 존중하시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실 무(無)에서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다고 한들 기적을 못 일으키시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 아이가 가져온 것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그것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역사(役事)에 그 아이를 끼워주신 것입니다.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며 그 아이는 얼마나 전율하고 기뻐했겠습니까. 안드레는 무시했지만, 예수님은 아이의 정성을 받아주시고 그 마음을 알아주셨습니다. 당시 인간 이하로 무시당하고 인격으로 존중받지 못하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배려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의 신약서신은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체휼(體恤)]하며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8-9)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우슈비츠에도 봄이 왔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자유와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다시 찾은 자유와 해방을 전혀 실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강제 수용소에 갇힌 일처럼 강제 수용소에서의 자유와 해방도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저 몸은 게걸스럽게 먹고 또 먹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찾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수용소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가려고 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시골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주변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나 자신은 물론,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 한 가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됐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저는 시편 118편이 떠올랐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편 118:1, 5) 빅터 프랭클은 비좁은 감방에서 날마다 주님께 부르짖었는데 주님은 꽃이 만발하고 종달새가 하늘을 나는 넓은 자유 공간에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의 삶은 오늘 봉독한 구약성서의 말씀을 또한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에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여 고쳐 낫게 하고...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며]... 그들이 내게...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그들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라]."(예레미야 33:1-9)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고통은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하고 남몰래 빵 한 조각 나누어 줄 수 있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배려는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라는 지금의 이 엄청난 재난 상황을 이겨나갈 힘입니다. 영혼의 백신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배려의 힘으로, 조용하고 겸손하고 정중한 이 사랑의 힘으로, 이 연대의 힘으로 이 재난을 버틸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그것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택은 항상 나의 몫입니다. 내가 직면한 삶의 고통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오직 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그러니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 자유 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비좁은 감방 안에서 주님을 부르십시오. 오늘의 교독문처럼,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편 34:4)가 나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편 118:1, 5)가 빅터 프랭클의 찬양만이 아니라 오늘 나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을 다시 묵상합니다. "삶의 끝에 서면 / 너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 너희는 행복했는가? / 다정했는가? / 자상했는가? // 남들을 보살피고 [연민]하고 이해했는가? /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천국으로 가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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