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하나님의 환대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Aug 09, 2021 06:35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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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신명기 10:17-19, 요한3서 1:1-8, 누가복음 14:12-14 -

한국 태권도의 이다빈 선수가 지금 열리고 있는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태권도 67kg 초과 결승전에서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 선수에게 졌을 때 우리는 그가 울 줄 알았습니다. 태권도 종주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분위기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다빈 선수는 이긴 선수에게 웃으면서 포옹하고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습니다. '당신 잘했어요!' 저는 이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졌는데도 승자 같은 이다빈 선수와 이겼는데도 패자에게 허리 숙여 경의를 표하는 승자의 품격은, '아 이런 게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9세기부터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4년에 한 번씩 열렸다고 합니다. 여기엔 남자만 참여 가능했고, 처음에는 단거리 육상과 같은 '스테이드' 한 경기만 열리다가 차츰 중거리, 장거리 육상이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올림픽의 정신은 평화와 화합을 위한 것으로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엔 전쟁이 중지되고 휴전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사실 바울도 '올림픽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 곳곳에서 신앙의 여정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고린도전서 9:24, 빌립보서 3:12-14). 평생 복음을 전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디모데후서 4:7)라고 회고하기도 합니다. 쿠베르탱에 의해 시작된 근대 올림픽도 편협한 내셔널리즘을 넘어 승자와 패자 간에 우애와 존중으로 평화를 증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올림픽 헌장(Olympic Charter)을 보아도 올림픽의 목적은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우정과 연대에 기초해 인류애를 진작시키는 것입니다.(제4조, 6조) 이런 올림픽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문화가 높아가는 시기에 열린다는 것이 하나의 역설이고 메시지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감염병과의 투쟁사라 할 수 있습니다. 박한선, 구형찬 교수가 『감염병 인류 :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켰나』(창비, 2021)에서 잘 밝히듯이, 농경과 목축 생활이 시작된 이후 인류는 수많은 질병에 시달려 왔습니다. 역사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서기 541년 유티니아누스 역병(페스트)이 로마제국을 덮쳐 당시 유럽 인구의 절반인 약 1억 명이 사망했습니다. '제1차 팬데믹'으로 불립니다. 14세기에 또다시 역병(흑사병)이 덮쳐 유럽인 세 명 중 한 명이 죽었습니다. '제2차 팬데믹'이라 불립니다. '제3차 팬데믹'은 19세기 인도를 시작으로 중동, 아프리카, 지중해 등으로 퍼져나간 아시아 콜레라였습니다. 20세기 초반에는 스페인 독감이 최대 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1948년 창설된 세계보건기구(WHO)가 인정한 공식적 팬데믹은 모두 세 가지인데, 그것은 1968년 홍콩 독감, 2009년 신종플루, 그리고 2019년 코로나19입니다.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팬데믹이 새로운 목록이 하나 더해진 것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늘 '팬데믹' 지구에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감염병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정교하고 복잡한 '신체' 면역체계를 발전시켜 이에 맞섰습니다. 항원(抗原)이 들어오면 항체(抗體)반응을 일으켜 다음에는 그 병원체가 들어와도 싸워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습니다. 병원체가 들어오기 전에 미리 차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감염되기 전에 감염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미리 피하는 '행동' 면역체계를 또한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피'(avoidance)라는 행동과 '혐오'(disgust)라는 감정입니다. 혐오(嫌惡), 즉 역겨움이라는 감정은 더러운 음식, 배설물, 해로운 곤충,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기침, 구토, 설사, 부자연스러운 행동, 그리고 피부 발진 등을 대상으로 생깁니다. 이 혐오라는 감정이 회피라는 행동을 유발합니다. 그러므로 혐오는 원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감정이 아주 쉽게 분노와 배척과 차별과 폭력의 문화적 코드로 발전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체 면역체계가 오작동하면 알레르기나 자가면역반응이 생기듯이, 행동 면역체계가 오작동하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라는 행동 반응이 일어납니다. 코로나19로 지금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외국인 혐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한에서 코로나가 나와 중국인 혐오가 생겼습니다. 서양인들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칭챙총 바이러스'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서기 4~6세기에 훈(흉노)족의 유럽 침공으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래 서양사람들은 동양인과 아시아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와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이것이 자극되면서 동양인이 이유 없이 폭행당하는 사건들이 연일 보도되었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사람들은 우선 노인, 신체장애인, 외국인, 그리고 심지어 비만인에 대해서도 혐오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비만인도 '나와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것이 혐오를 일으키고 차별을 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저는 지금도 서강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고 장영희 선생의 오래된 수필 하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까 1999년 7월에 월간 「샘터」에 기고한 글, "킹콩의 눈"입니다. 영화에 문외한이고 영화를 볼 기회도 많지 않았던 그가 그때껏 본 영화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영화가 '킹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영화를 일부러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사연, 그리고 그 영화를 본 정확한 날짜와 장소까지 기억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날은 내가 Y대학에서 박사과정 시험을 친 날이었다. 석사졸업반이었던 나는 딱히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고, 당시 나의 모교에는 박사과정이 개설되기 전이라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응시자들은 오전에는 필답고사를 보고 오후에 면접을 하게 되어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실에 들어서니 네 명의 교수들이 반원으로 앉아 동시에 나와 내 목발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엉거주춤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그중 한 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 '우리는 학부과정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아요. 박사과정은 말할 것도 없지요.' / 한 사람의 운명을 그렇게 단도직입적이고 명료하게 선언하는 그 교수 앞에서 나는 차라리 완벽한 좌절, 완벽한 거절은 슬프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마음이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미소까지 띤 얼굴로 차분하게 '그런 규정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인사말까지 하고서 그 면접실을 걸어 나왔다. / 그날 집에서 기다리시는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전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연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본 영화가 '킹콩'이었다. / 그 영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단편적 이미지의 연속뿐이다. 거대한 고릴라가 사냥꾼들에게 잡혀 뉴욕으로 옮겨지다 도망하고,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옆에 앉아 있는 킹콩은 그 건물만큼이나 크고 거대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킹콩은 한 여자를 손에 쥐고 있었고, 경악한 그 여자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 하지만 그녀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킹콩은 그녀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러나 킹콩은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포획되기 전, 킹콩은 그 여자를 자신의 눈높이로 들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 그 눈, 그 슬픈 눈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아닌 커다랗고 흉측한 고릴라였기 때문에.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 내가 바로 그 킹콩이었다.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내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여 아무런 할 일 없이 여생을 보내야 하는 삶, 그것도 하나의 사형선고였다. / 킹콩이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나는 편견과 차별에 의해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영화관을 나와 집에 오는 길에 토플책을 샀고, 다음 해 8월 나는 전액 장학금을 준 뉴욕 주립대학으로 갔다." 참으로 마음 아픈 글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을 또 누구를 킹콩으로 보고 있습니까? 단지 우리와 다르게 생겼다고 우리가 미워하고 짓밟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미국의 제1세대 여성 신학자 레티 러셀(Letty M. Russell)은 누구보다도 교회에 관해 깊이 사유한 학자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고민을 모아 『공정한 환대 :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 (Just Hospitality: God's Welcome in a World of Difference)』(대한기독교서회, 2012)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지은이는 교회의 본질이 '환대'(歡待)라고 말합니다. 냉대(冷待), 천대(賤待), 혹은 박대(薄待)의 반대말인 환대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기관과 다른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환대는 주일예배 후에 여전도회가 제공하는 커피와 다과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환대는 '낯선 이'(stranger)를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성서에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이 가장 많을 것 같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성서는 낯선 이, 즉 나그네를 환영하고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이란 대체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지만, 낯선 자들이란 우리와 생각과 피부색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레티 러셀은 성서 안에서 낯선 자를 환대하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예상치 못한 현현(顯現)을 말하는 구절들에 주목합니다. 구약에서 그 대표적인 본문은 창세기 18장, 즉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낯선 이 셋을 정성으로 대접한 끝에 주의 천사인 그들로부터 늙은 아내 사라의 잉태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창세기 18:1-15) 이 일을 두고 신약의 히브리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브리서 13:2)라고 해설합니다. 신약성서에서 나그네 환대의 대표적 본문은 마태복음 25장, 즉 최후의 심판 기사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한]"(35절) 이들에게 영생의 복을,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한]"(43절) 이들에게 영원한 벌을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성서의 전통에서 환대는 낯선 자를 상대하다 하나님의 출현을 발견하는 뜻밖의 선물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환대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필로제니아'(philoxenia)로 '낯선 자를 사랑함'이란 뜻입니다. 반대말은 '제노포비아'(xenophobia)로 '낯선 자를 미워함'입니다. 레티 러셀은 낯선 이를 미워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성서가 죄(罪, sin)라 말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사람이 환영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가 되는 교제(koinonia)와 일치(unity)를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획일성(uniformity)을 좋아하시지 않으셨기에 "유쾌한 차이들로 가득 찬 세상을 창조하셨다"라고 레티 러셀은 말합니다. 실로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온갖 채소와 나무들을 "종류대로"(창세기 1:11-12) 창조하셨고, 온갖 바다 생물과 공중의 새들 역시 "종류대로"(창세기 1:21) 다양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있게 만들어서 그것을 넘어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이가 본질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오히려 차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하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모든 차이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ecclesia)입니다.

환대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God's Welcome)입니다. 환대의 근거가 하나님의 환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같은 "죄인을 영접하[시]고"(누가 15;2) 용납하셨습니다. 시편 27편 기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편 27:10) 했습니다. 그래서 레티 러셀이 말하는 환대는 '공정한 환대'(Just Hospitality)입니다. 왜 '공정'입니까? 로마서 15:7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야]"(새번역)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가 받아들여졌으므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도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공정한 환대가 바로 교회의 본질이자 교회가 실천해야 할 목회입니다. 목회(牧會, ministry)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것도 아닙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목회입니다. 목회란 세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마태 20:28, 마가 10:45)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목회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목회에 초대하되 특히 변두리 사람을 초대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복음서 말씀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잔치를 베풀거든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누가 14:12-13) 이 말씀에 바로 뒤이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또한]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누가 14:16-24) 변두리가 어디입니까? 거긴 '무시해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입니다. '슬픈 눈을 가진 킹콩'들이 사는 곳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환대를 실천하면 변방과 중심의 구별이 흐려지고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에 더는 변두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통치, 즉 '키리아키'(Kyriarchy)입니다. 교회는 이 주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정확한 의학지식이 없던 과거에는 과민한 행동 면역체계가 생존에 유리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혐오라는 감정과 회피라는 행동이 생존에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일 수 있습니다. 혐오와 회피는 새로운 것을 꺼리는 탓에 혁신적인 보건의료 체계를 거부하거나 글로벌 시대에 부적응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병원균의 집단 전염'만이 아니라 혐오와 역겨움이라는 '감정의 집단 전염'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을 경험한 교회가 이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서는 교회가 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누가 6:32, 36). "사랑을 실천하지만 나는 이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금을 긋고 자기 한계에 갇힌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두신 한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정해 놓은 한계의 지평선을 지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으로 한계의 철책을 녹[여야 합니다]."(이주연, 『성령을 따라 걷습니다』 중에서.)

성서는 계속 반복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나그네를 환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십니다]."(신명기 10:18)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십니다]."(시편 146:9) 그러므로 성서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명기 10:19)라고 우리에게 명합니다.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애굽기 22:21, 23:9) 상기시킵니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명기 24:19) 약속합니다. 대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에스겔 22:29)하는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합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말라기 3:5) 자들을 반드시 벌하시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도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 중에서 교회의 감독이 되려면 "나그네를 [잘] 대접"(디모데 3:1-2)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교회의 장로가 되려는 자 역시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해야]"(디도서 1:8) 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에서 크게 칭찬받는 장로 가이오(Gaius)가 바로 그 모범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라는, 성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사말을 받은 가이오는 나그네 된 자들에게 신실하게 행함으로써 온 교회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온몸으로 증언한 사람이었습니다.(요한3서 1:1-8) 성서는 아주 분명히 말합니다. "내 형제[자매]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야고보서 2:1-13)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환대'라는 거룩한 목회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실천하지 못해 세상에 혐오와 차별이 가득합니다. 아니 교회마저 혐오와 차별을 합니다. 오히려 거기에 앞장섭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에 두 차례의 역병이 휩쓸 때 초대교회는 특유의 이방인 환대와 사회적 연대 그리고 사랑의 돌봄(섬김)으로 세상을 구했습니다. 중세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교황 클레멘스 6세(1291-1352)는 대중의 혐오의 타깃이 된 유대인의 학살을 막고자 "유대인은 무죄다"라는 교서를 발표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온몸으로 저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신앙'은 약자들에게 돌아가는 혐오와 폭력을 예수님처럼 제 몸으로 받아내고 모든 생명을 돌보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고린도전서 6:20, 새번역)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린도전서 1:23-24)라 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마서 1:6, 새번역)입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베소서 4:1)

2020 도쿄 올림픽이 오늘 폐막합니다. 올림픽은 정치와 이념과 종교와 인종을 떠나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의 도전과 성공, 좌절과 극복의 이야기에 함께 웃고 박수치며 우리가 한 인간이고 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우애와 평화의 제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가능하면 한 번도 메달을 따보지 못한 나라의 선수들이, 특히 가난과 기근과 내전과 재해로 고통을 겪는 나라의 선수들이 고르게 시상대에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다빈 선수처럼 졌는데도 '당신 잘했어요!'라고 엄지손가락 척 들어 올리는 승자 같은 선수와 이겼는데도 패자에게 허리 숙여 경의를 표하는 승자의 품격이 오래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이 품격과 이 정신을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뛰는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이 품격과 이 정신으로 교회도 낯선 이들을 환대하다가 부지중에 주의 천사들을 대접하는 축복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을 다시 묵상합니다. "나는 오늘 한 나그네를 보았습니다. / 나는 그를 위해 접시에 음식을 담고 / 잔에 물을 따라 그에게 주었습니다. / 그리고 그를 위해 음악을 틀었습니다. / 삼위일체의 거룩한 이름으로 그는 나와 나의 집과 내 소유와 / 내 가족을 축복했습니다. / 종다리가 지저귑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도 자주 / 낯선 나그네의 가면을 쓰고 오십니다."(작자 미상, <나그네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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