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비밀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열왕기하 17장 5-12절, 시편 49편 1-9절, 마태복음서 23장 27절-24장 2절

[역시 대단해, 잘했어, 좋아!]

재미교포 2세가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기의 아이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려고 6개월 간의 휴직계를 내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왔습니다. 한국에 있던 부모는 자신의 아들 며느리와 손자를 볼 수 있어서 매우 좋았지만, 한국어를 잘 모르는 아이가 한국어를 잘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외국어를 배우려고 할 때 나쁜 말부터 쉽게 배운다는데 그것도 염려가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꼬마 아이는 자신이 배운 한국어 네 마디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약간 걱정을 하면서 가족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이 때 꼬맹이 아이가 가족들에게 한 네 마디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역시 대단해, 잘했어, 좋아!"

가족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기분이 아주 흐뭇해졌습니다. 과연 이 아이는 이 단어들을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요? 사실 우리도 이런 말들을 쉽게 듣기 어려운데, 아이는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모양입니다.

지난주부터 우리 생명사랑교회 교육부가 유치부 어린이부 성경학교를 줌으로 하고 있습니다. 3주 동안 아이들과 교사들은 각자 집에서, 교육부 담당 교역자들은 교회에서 카메라와 컴퓨터를 켜고 온라인 성경학교를 합니다. 매주 줌으로 예배는 드렸지만 온라인 성경학교는 처음 해보는 것이라 저도 살짝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도 여는 예배의 설교와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온라인으로 아이들이 찬양과 율동을 배우고,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분반으로 나누어서 공부하는 모습들을 보고 제 마음이 너무 좋았습니다. "역시 대단해, 잘했어! 좋아!" 꼬마가 처음 배웠다는 네 마디 말은 우리 생명사랑 교육부 전도사님들, 교사 선생님들, 그리고 아이들이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당에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성경학교를 하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성경학교를 온라인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온라인 수업으로 우리나라 어린이 청소년들의 학력이 전반적으로 하락한다는 우려가 있지만, 우리 생명사랑 어린이들은 매우 잘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어제 우뚝 서 있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과거에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전체 사회의 엄청난 변동 속에서 개신교의 위기를 논하는 지금, 다음 세대들이 과연 우리와 같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갈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는 저에게 지난 주일 성경학교는 희망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과 신약 본문의 말씀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과는 정반대입니다. 열왕기하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패망하는 얘기요, 마태복음서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모든 나라와 공동체, 가정과 개인은 저마다 흥망성쇠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원히 승승장구하는 나라도 없고, 늘 망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잘되는 사람은 잘되는 사람의 특징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은 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신앙의 관점에서 한 사회와 개인, 그리고 신앙공동체의 흥망성쇠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구약성경 여호수아서부터 열왕기하까지를 흔히 '신명기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야훼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신앙의 백성들이 이방 신들과 제국 문명의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온전히 누리고, 불순종하면 재앙과 화가 따른다는 신명기의 신학적 관점에서 역사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신앙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는 데서 시작해서 바벨론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이 멸망당하여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될 때까지를 다룹니다. 즉 고대 이집트 제국의 종으로 살던 것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유로운 개인들 모두가 평등하게 서로 도우며 사는 나라를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모두 멸망하고 맙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멸망을 되돌아보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오늘 읽은 열왕기하의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최근 미얀마는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고,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 다시 권력을 잡았습니다. 민주적 정치제도가 보장했던 자유의 바람을 시원하게 누렸던 이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금 모두 공포에 떨고 있고, 사회는 극심한 혼란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백성들의 삶과 그들의 신앙과 신념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몰아내시고,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땅을 내어 주시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서 저자는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또 하나님이 앗시리아의 신보다 약하거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여러 왕들의 나쁜 본을 따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써 야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가 굳건하게 서고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우선 경제와 안보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살림을 잘 운용하고 튼튼한 국방력을 키우는 것은 그 나라의 정치에 달려 있습니다.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 국가의 운영을 맡게 되는 사람들은 국민의 선택에 의해 선출되기 때문에 결국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민들의 수준과 올바른 신념과 판단에 달렸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이 어떻게 쇠락하고 있는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 거품의 붕괴로 복합불황의 늪에 빠져 버린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보내고 있는데, 이런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과 정부는 매우 안이하게 대처하면서 기업의 낡은 구조 자체에 대한 변혁 없이, 국채로 발행한 돈을 가지고 토건사업을 벌이는가 하면 비정규직을 늘리고 임금을 줄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회적 양극화는 심해지고, 저 출산과 생산 가능 인구 감소를 낳아, 노동력 공급과 소비 수요의 제한으로 이어지면서 경제성장은 가로 막혔습니다. 그런데 아베와 스가로 이어지는 자민당 정권은 대대적인 재정지출과 양적 완화로 자본가 집단만을 지원하는데 급급했고, 코로나 19나 올림픽에 대한 부실한 대응과 잘못된 정책으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의 노동자들은 투쟁보다는 매우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국민들조차도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앞날은 매우 암울해 보입니다.

오늘 열왕기하의 말씀에서 저자는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역대 왕들의 잘못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망대로부터 요새화된 성읍에 이르기까지 온 성읍 안에 산당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산당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제사를 지내며 우상 숭배를 하였기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결국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다고 역사가는 신앙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당이란 무엇인가?]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는 "산당"입니다. 산당이 무엇이길래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온 성읍에 이것이 존재했고, 왕들이 없애지도 못하고, 결국 나라를 패망하게까지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산당'(山堂)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마'(bamah)는 구약성서에서 80회 이상 등장하는데, 거의 모든 경우에 극단의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 산당은 지리적으로 높은 곳을 상징하거나(언덕, 아모스 4:13, 미가 3:12, 하박국 3:19), 제사의 장소를 가리키는 서로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장소(聖所)와 제사 드리는 장소를 높은 곳에 즐겨 세웠는데(사무엘상 9:19-25, 10:5, 열왕기상 3:2-4), 이것은 고대인들의 사유 속에서 높은 곳이 하나님과 더 가까운 곳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사이자 예언자이자 지도자였던 사무엘의 본거지가 실로의 산당이었고(삼상 9:19),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인 솔로몬도 기브온에 있는 유명한 산당에 가서 일천번제를 드리며 야훼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높은 장소로서의 산당이 문제가 된 것은, 높은 장소인 산당에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가나안 땅에 원래 있던 다산과 풍요를 비는 종교의식이 구별되지 않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즉 산당은 야훼 하나님 신앙과 다산과 풍요만을 추구하는 우상 숭배가 교묘하게 섞여 있던 곳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16장 초반에 보면 유다왕 아하스가 열여섯해 동안 남유다 왕국을 다스리면서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다고 표현하면서,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은 행위였고, 아하스는 직접 산당과 언덕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지내고 분향했다고 고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미루어 보면, 특히 산당에서 드리는 제사 형식 중 하나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 제사였고, 특별히 국가적 위기의 순간이 되면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며 강력한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힘의 통치를 시행하는 고대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출애굽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가 되어 자신들만의 자유와 평등한 공동체를 꾸릴 것인지, 제국의 질서를 받아들여 비슷한 제국의 길을 가야할 지 늘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습니다. 고래 싸움에 낀 새우처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히타이트, 고대 그리스 세력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힘이 지배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눈치를 봐야했던 이스라엘은 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산과 풍요를 약속하는 이방신 바알의 유혹에 넘어가 인신제사마저 드리는 일도 생긴 것이고, 때로는 친앗시리아 정책으로, 때로는 친 이집트 정책을 써 가면서 대응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과정에서 야훼 하나님 신앙에 기반한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자꾸 무뎌져 가고,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강대국에게 기대는 일들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산당은 바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이런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 정신에 투철하지 못하고 앗시리아에게 기댔던 북이스라엘은 결국 앗시리아의 밥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국이 철수하자마자 극심한 혼란이 일어나듯,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세울 수 없을 때, 남에게 의존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할 때 어느 개인이나 공동체는 홀로 설 수 없게 됩니다.

야훼 신앙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던 예언자 전통에 서 있던 성서 기자들이 산당을 끊임없이 비판했던 것은 산당의 종교의식이 올바른 야훼 신앙의 정신을 흔들면서 결국은 나라의 패망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흥망성쇠와 예수님의 예루살렘 비판]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야훼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올곧게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세상적 가치를 마구 도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도 공동체이니 공동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는 경영의 기법이 필요하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생각하면서 심리적 상담과 위로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주요한 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보여 주신 야훼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일구려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신이 사라지고,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거룩한 가치가 뒤섞이고 교묘하게 혼합되어 헷갈릴 때, 교회 공동체는 망하거나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사명이 있고, 그 사명에 충실한 사람들이 모일 때에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를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한 겉모양을 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은 겉만 번지르르한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도 번듯한 건물을 가진 것으로, 규모가 큰 예산과 성도들의 머릿수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지만 이런 것들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하신 비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고 살해하였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을 불러 모으려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신의 날개 아래로 자녀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교회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라! 생명을 속량하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오늘 시편 저자는 낮은 자나 높은 자나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과 명철한 사유에 주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지혜의 말씀은 재물이나 돈이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지혜의 말씀은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이 세상과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돈이 사람의 생명, 참된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사람들은 실제로 돈을 벌 때까지는 행복할 수가 없는데, 돈을 벌면 벌수록 더 벌고 싶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그렇게 될수록 행복은 자신의 삶에서 멀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돈을 올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도 하지만, 몸을 건강하게 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되듯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올바른 뜻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때에야 우리의 삶의 나머지 모든 것들도 질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아는 사람은 주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주신 기회를 지속적인 성공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을 사랑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사랑이 일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고,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좇아 자꾸 앞으로만 달려가면서도 놓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언제나 나와 딱 붙어 있는 그림자처럼 행복이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참된 삶은 언제나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편 저자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혜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국 없어질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정말 값지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움켜쥐고 사수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도 사소하게 보일 수 있고, 죽음을 생각할 때 진정으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감사와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이나 모두 망하는 지름길은 자신이 영원하다고 착각할 때입니다. 잠시 운이 좋아서 성공했을 뿐인데,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자만해지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의 성공도 잠시라는 것! 진짜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 하나님 없이 그 어떤 것으로도 참된 삶의 의미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강조합니다.

<문장의 온도>라는 책으로 유명한 고전 연구가 한정주 작가의 <사기인문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인간사의 흥망성쇠의 비밀을 여섯가지 주제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일개 한 마을의 건달 출신인 유방이 뛰어난 무술을 지니고 있고, 탁월한 군사 전략가인 항우를 이긴 이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줄 알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곤경에 처했을 때 쉽게 좌절하지 않고 훗날을 도모했다는 점, 셋째는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오만해지거나 거시적인 목표를 잊지 않았다는 점이며, 넷째는 찾아온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기인문학>, 48쪽)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부족한 우리는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아낌없는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주님을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절대 놓치지 말고 전심전력을 다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잘 해냈을 경우에도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혼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찾으시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기회를 꽉 붙드셔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백성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역시 대단해, 잘했어. 좋아!"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지난 세월 주님의 뜻 가운데서 단단하게 서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주님 없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삶에서 주님 대신 세웠던 산당들을 철폐하게 하시고, 보이는 것에 눈 어두워 보이지 않는 주님의 뜻에 소홀했던 우리들의 과거에서 돌이키게 하여 주소서. 우리를 유혹하는 자본과 세상 권력의 전략에 넘어가지 말고 올곧게 주님의 지혜를 따르게 하여 주소서. 흥망성쇠의 열쇠이시고 비밀이신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전국으로 코로나 19가 재확산되고 있습니다. 시름이 깊어지고 한숨 또한 늘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영상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 신앙 교육을 받고 우리들의 믿음을 성찰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고요히 집에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올 날들을 준비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밖에는 그 누구도 여러분의 생명을 속량할 분은 없습니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의 지혜에 귀 기울이고, 온전히 주님께만 마음을 두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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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