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Nov 29, 2021 06:48 PM KST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아가서 8:6-7, 요한계시록 21:1-5a, 요한복음 5:24 -

설교문

11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11월은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나태주)입니다. 여러분에게 11월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재무 시인의 <십일월>을 읽어봅니다. "십일월을 사랑하리 / 곡물이 떠난 전답과 배추가 떠난 텃밭과 / 과일이 떠난 과수원은 불쑥 불쑥 늙어가리 / 산은 쇄골을 드러내고 강물은 여위어 가리 / 마당가 지푸라기가 얼고 새벽 들판 살얼음에 / 별이 반짝이고 문득 추억처럼 / 첫 눈이 찾아와 눈시울을 적시리 / 죄가 투명하게 비치고 / 영혼이 맑아지는 십일월을 나는 사랑하리." 한때 "십일월은 의붓자식 같은 달이다" 했던 이 시인은 이제 영혼이 맑아지는 십일월을 사랑하겠다고 말합니다.

11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영원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슬픔 중에 삶을 이해하고, 침묵 속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날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 자기의 죽음은 너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는 / 많은 사람들 속에 나도 숨어 있습니다 // 아름다움의 발견에 차츰 무디어가는 / 내 마음을 위해서도 / 오늘은 맑게 울어야겠습니다"(이해인)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오늘은 "먼지 낀 마음의 유리창을 / 오랜만에 닦아내며 하늘을 바라보[고]"(이해인) 맑게 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정녕 11월이 우리의 "죄가 투명하게 비치고 / 영혼이 맑아지는"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미국의 아동문학가 거닐라 노리스(Gunilla Norris)가 말하는 것처럼 삶은 하나의 소음의 <역설 Paradox of Noise>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처음 침묵 속에 앉아 있으려 할 때 그토록 많은 마음속 소음과 만나게 되는 것은 역설이다. / 고통의 경험이 고통을 초월하게 하는 것은 역설이다. / 고요함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충만한 삶과 존재로 이끄는 것은 역설이다." 물론 인간의 마음은 역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들이 분명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노리스는 "우리 각자에게는 역설을 사랑하는 존재의 더 깊은 차원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겨울 한 가운데에 이미 여름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아는 /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한다는 것을 아는 / 어둠과 빛이 늘 함께 있으며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맞물려 있음을 아는" 존재의 더 깊은 차원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별 앞에서 존재가 무너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삶의 역설을 머릿속으로는 이해해도 우리의 마음은 상실의 고통으로 무너집니다. 나태주 시인이 <목련꽃 낙화>에서 그걸 짚었습니다. "너 내게서 떠나는 날 / 꽃이 피는 날이었으면 좋겠네 / 꽃 가운데서도 목련꽃 / 하늘과 땅 위에 새하얀 꽃등 / 밝히듯 피어오른 그런 / 봄날이었으면 좋겠네 // 너 내게서 떠나는 날 / 나 울지 않았으면 좋겠네 / 잘 갔다 오라고 다녀오라고 / 하루치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 / 가볍게 손 흔들 듯 그렇게 / 떠나보냈으면 좋겠네 // 그렇다 해도 정말 / 마음속에서는 너도 모르게 / 꽃이 지고 있겠지 / 새하얀 목련꽃 흐득흐득 / 울음 삼키듯 땅바닥으로 / 떨어져 내려앉겠지." 인간은 죽음 앞에서 그냥 우는 존재입니다.

독일의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박사가 인생 마지막 책을 펴냈습니다. 원제는 "영원한 삶으로 부활하다"(Auferstanden in das ewige Leber)인데 우리 말로는 『나는 영생을 믿는다』(신앙과 지성사, 2020)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올해로 95세인 저자가 스스로 이 책이 자신의 인생 '마지막 저서'라고 밝혔습니다. 1926년에 태어난 그는 히틀러에 의해 징집되었다가 영국의 전쟁 포로가 된 이후 신학의 꿈을 갖게 되었고, 괴팅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후 1994년에 튀빙엔 대학교수로 퇴임할 때까지 『희망의 신학』을 비롯한 숱한 명저를 세상에 펴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 19개의 유명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2016년에 아내 엘리자베트(Elizabeth)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자신의 개인적(personal) 문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죽음 후에도 생명은 존재합니까?" 몰트만 박사는 먼저 인간은 죽음을 절대 체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과정은 느낄 수 있지만,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임사 체험은 죽음 이전의 생명에 속한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사실 한국의 소설가 김훈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죽으면 말 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지 않나요? 몰트만 박사는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죽음을 경험한다. 그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생명의 기쁨을 빼앗아가며, 살아가려는 의지도 빼앗아 간다. 이것은 하나의 진정한 죽음 경험이다." 인간은 직접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므로 몰트만 박사는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이렇게 재정의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이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매우 인상적인 통찰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반대는 생명(삶)이 아닙니다. 생명과 죽음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죽음의 반대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부재,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이렇듯 몰트만 박사가 죽음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이유는 "생명은 죽음보다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생명은 죽음보다 탁월하다. 생명은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은 죽음보다 탁월하다." 계속해서 그가 말합니다. "만약 생명이 영원하다면, 죽음이 없이 생명은 살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생명이 없다면, 죽음은 죽일 수 없다. 만약 죽음이 승리했다면, 죽음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보십시오. 죽음이란 생명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죽음은 결코 승리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죽음이 승리하면 죽음은 더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죽음이 어찌 존재합니까! 그래서 몰트만 박사는 "인간의 문제는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이라고 본질을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역시 탁월한 신학자입니다.

사실 진보적인 신학자로 알려진 몰트만은 매우 성서적인 견해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시제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또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요한1서가 이를 명확히 재진술합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3:4 - 새번역) 그러므로 몰트만 박사가 말하듯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인간 문제의 본질은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겐 이 문제가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라 '사랑이냐 죽음이냐'입니다. 우리는 오늘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질문을 바꾸셨습니다. 몰트만 박사가 말하는 것처럼, "생명을 그 원천으로부터 살아 있게 만들고 생명에 대한 기쁨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체험한 생명에 대한 기쁨으로부터 우리는 '생명의 충만'에 대해 질문하게 되며, 이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 부른다"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 즉 영생(永生)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언제가 말씀드렸지만, 일본의 저명한 호스피스 전문가 오츠 슈이치(大津秀一)는 약 일천 명의 죽음을 목도하고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들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를 소개한 책인데 그중에서 첫 번째는 무엇이었을까요?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이나,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이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시한부 삶을 사는 어느 환자의 기도>를 읽어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할까 놀랐습니다. "아아, 내가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 이제는 거짓말하지 않고 세상을 정직하게 살 거야. / 아아, 내가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 탐욕스럽게 긁어모으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 거야. / 아아, 내가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 미워하고 싫어하던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탄식하던 환자는 자신의 기도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아아, 내가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 사랑만 하고 살 텐데. / 사랑만, 사랑만 할 텐데. /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 나는 너무 어리석게 내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인간 문제의 본질을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입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사랑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신부이자 작가인 알프레드 디 수자(Alfred D'Souza)가 말했지요. "춤추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아가서(雅歌書, Song of Songs)는 구약성서 스물두째 책으로 인간의 에로스(Eros)를 통해 신적인 사랑을 노래합니다. 아가서 8:6-7입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새번역)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성서 전체에서 이런 표현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새번역 - love is as strong as death)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 제목을 여기서 따 왔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love is stronger than death)이라고 읽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1:25-26에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살아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25-26)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빼놓고 삶과 죽음과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몰트만 박사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함께 사랑은 죽는가, 아니면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가?' 만약 사랑이 부활에 대한 희망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에 의해 지탱된다면,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우리의 사멸할 생명은 영생의 약속의 '배아'를 선물로 품고 있다. 이 '배아'야 말로 사랑이다." 우리의 생명은 사멸할 것이지만 이 유한한 생명 안에 영생을 약속하는 씨가 심겨 있는데 그 씨앗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영생의 씨앗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몰트만 박사는 "죽음 후에도 생명은 존재합니까?"라고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죽음은 영광스러운 빛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죽음은 거기로 가는 길이다... 죽음은 하나의 종말인 동시에 하나의 시작이다... 우리의 '참 생명'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장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난 지도 12년이 되었습니다. "순간마다 최선의 성실을 다하는 / 선하고 열정적인 삶으로 / 재밌고도 유익한 감동적인 글로 / 우리에게 따뜻하고도 겸손한 희망의 봄이 된"(이해인) 그가 살아생전에 자기보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의 필체 그대로 옮겨보고 싶습니다. 그는 "이 글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모든 분들께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6년이 되었습니다. 길다고 하면 긴 세월, 이제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시고 나서 1주기 미사를 하면서 [한] 신부님이 강론 중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제는 보내 드리십시오. 사랑의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고, 문을 닫으십시오. 아버님은 지금 천국에서 행복하십니다.' 그때 저는 신부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위로를 해주시기는커녕 어떻게 아버지를 보내 드리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사랑의 기억을 어떻게 철 지난 옷 차곡차곡 챙겨 넣고 서랍장 닫아 버리듯 할 수 있나요? / 그렇지만 아버지, 이제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니, 저는 그분의 말뜻을 이해할 듯합니다. 보내 드리라는 말씀은 물론 잊으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육체적 존재에 연연하지 말고 미약한 인간적 개념의 시간을 넘어서서 더욱 깊게, 영혼의 힘으로 기억하라는 말씀이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할 때 그 아픔은 표현할 길이 없지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어쩌면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언젠가 좀 더 좋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입니다. / 몇 년 전 여름에 LA의 언니네 집에 들렀을 때 [조카와] 함께 어떤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목도 잘 생각이 안 나지만, 그중에 한마디 대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살림도 어려운 미혼모 조디 포스터가 일곱 살 난 천재 아들의 장래를 위해 양육권을 포기하고 아이를 먼 곳에 있는 영재 학교에 보내게 됩니다. 어쩌면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들을 보내며 그녀는 평상시에 하룻밤 친구 집에 놀러 가는 아들에게 하듯 '그래, 내일 보자 (See you tomorrow)'라고 말합니다. 아들과 헤어지는 아픈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 후 LA에 들렀다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조카는] 내년에 보자는 말 대신에 '이모, 내일 봐'라고 말하곤 합니다. '내일'과 같이 짧은 시간 후에 다시 볼 수 있다면 헤어지는 마음이 덜 아쉽겠지요.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겁 속에서 하루는, 1년은, 아니 한 사람의 생애는 너무 짧은데, 그럼에도 우리는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 '내일 봐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인지요. / 아버지가 계시는 [한] 공원묘지 입구에는 아주 커다란 바윗돌에 '나 그대 믿고 떠나리'라고 쓰여 있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 어디서 나온 인용인지도 알 수 없이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커다란 검정색 붓글씨체로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좀 촌스럽고 투박한 말 같았는데, 어느 날 문득 그 말의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못 다한 사랑을 해주리라는 믿음, 진실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주리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 - 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장영희, "20년 늦은 편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나왔다가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하늘 집으로 돌아간 고(故) 장영희 교수도 떠날 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총총히 떠났겠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런 믿음 우리에게 주고 떠났겠지요. 나태주 시인의 <쪽지글>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그분들이 남긴 쪽지글을 읽는 것 같습니다. "나 죽으면 울어줄 사람 위하여 / 이 쪽지를 남긴다 // 나 죽어도 오래 잊지 않을 사람 위하여 / 마음을 담는다 // 너를 만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일 / 널 사랑해서 고마웠고 행복했다 // 나 없는 세상에서라도 너무 / 힘들어 하지는 말아라 // 예쁘게 잘 살아라 / 하늘에서 내려다본다."

아무도 자기의 죽음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 당장 사랑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줄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만약 내 인생이 내일까지인데 단 한 번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면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전화를 거시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기를 꺼립니다. 그것을 실천하길 미룹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자신을 가꾸는데 들이는 시간의 10분의 1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했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을 미룹니까. 왜 우리의 사랑은 절실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이요 영생의 씨앗인데 말입니다.

홍수희 님의 <오늘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로 하여 / 오늘을 살게 하소서 / 내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내일이 오면 / 또 그 내일이 온다는 / 안일함으로 // 오늘 내게 주어진 / 소중한 작은 것들을 / 부디 잃지 않게 하소서 / ... / 지나고 나면 다시는 / 오지 않을 오늘이라면 / 지금 이 시간 사랑으로 /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영원주일'이자 또 '대림절'(待臨節, Advent) 첫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올해는 묘하게 끝과 시작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이 또한 '역설'입니다. 이사야 40장에는 고통스러운 노역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는 선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은 '위로'의 메시지로 시작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왜 위로합니까? "[예루살렘의]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기]"(2절)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5절)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여호와께 묻습니다.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6절) 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6, 8절) 도대체 무엇이 위로의 말씀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다는 깨우침이 무슨 위로가 됩니까.

위로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합니다.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이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고 "불길 같이 일어나니... 많은 물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는" 불멸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위로는 이 사랑이,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인데 그 뜻은 '출현', '도래', '등장'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이 "Advent"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신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영원'이 '시간'을 찾아오십니다. '무한'이 '유한'을 품으십니다. '사랑'이 '죽음'을 삼키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비워 사람이 되시고 스스로 낮춰 죽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무언지 보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임마누엘'(God-with-us)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이 예(여기로) 오십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예 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받은 위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시작할 희망의 근거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피니언

연재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9):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포이어바흐는 고대 기독교도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신비스러운 대상으로 여긴 것에 대해 "이들이 현실성, 생활 속에서 부정한 인간의 가장 ..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