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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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출애굽기 12:21-25, 히브리서 10:1-4, 11-14, 요한복음 1:29

설교문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강남'(江南)은 서울의 한강 이남이 아니라, 중국의 장강(長江, 양쯔강) 아래 강남입니다. 3월에 왔던 제비가 9월이면 다시 이리로 날아가는 것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다 함께 무리를 지어 한꺼번에 출발하는 다른 철새들과 달리, 제비는 특이하게도 몇 마리씩 따로 출발합니다. 이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조상들은 제비가 '친구 따라' 길을 나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어젠 봄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왜 이리 제비 보기가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제비만이 아닙니다. 사람도 살면서 크고 작은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남을 따라'합니다. 쇼핑이나 식당 선택, 심지어 아이를 낳을 때도 타인을 따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썰렁한 식당보다는 손님들이 북적이는 식당에 들어갑니다. 불법 주차 지역이지만 다른 차들이 서 있으면 왠지 안심되어 주차합니다. 때론 '영끌', 즉 영혼까지 끌어 모아 주식과 부동산을 구매하는 '패닉 바잉'(panic buying)을 합니다. 사회의 큰 흐름에서 나만 소외되거나 나만 낙오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필사적으로 남을 따라합니다. 하지만 작은 충격에도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것 중 하나가 세상에서 제일 흉내를 잘 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모방본능', 그것은 인간의 깊은 본능 중 하나입니다.

이인구 시인의 시 <줄>입니다. "별들은 한 번도 / 줄을 맞춰 선 적이 없지만 / 하늘이 우왕좌왕 혼란스런 날이 있었던가 // 우린 늘 / 줄을 맞춰 서 왔지만 / 순서대로 무엇을 한 일이 없다 // 그저, / 줄을 서지 않는 일을 두려워만 했을 뿐." (시집 「달의 빈자리」, 천년의 시작, 2021.) 시인은 정곡을 찌릅니다. 우린 늘 줄을 서 왔지만, 정작 왜 줄을 서야 하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으니까, 불안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모습을 정확히 찌릅니다.

인간의 욕망이 자율적이지 않고 타율적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타인을 매개로 일어나는 '비자발적 욕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입니다. 『돈키호테』와 같은 유명 소설 속의 인물을 탐구하던 그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혹은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자율적이 아니라 타율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어떤 비싼 제품을 갖고 싶어 욕망할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 남이 가진 걸 보거나 광고를 통해 갖게 된 타율적 욕망입니다. 사람은 어떤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제3자의 중개를 통해서 그 대상을 욕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라르는 인간의 모든 욕망은 '모방 욕망'이라는 테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욕망하게 만든 그 사람, 즉 욕망의 중개자가 그 욕망의 유발자임과 동시에 경쟁자, 나아가 방해자라는 사실입니다. 같은 걸 차지하기 위해 우린 서로 다투어야만 합니다. 지라르는 인간 사회의 모든 폭력이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모방 욕망이 모든 폭력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그걸 그는 '본질적 폭력'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는 대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그는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희생제물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으로 폭력을 덮은 인간의 거짓 희생제의를 폭로하고 이 땅의 모든 무고한 희생양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을 중지시키는 사건이고 상징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묘사하는 수많은 호칭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 '포도나무', '만왕의 왕', '신랑', '친구' 등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귀중한 명칭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하나님의 어린 양'을 라틴어로 '아뉴스 데이'(Agnus Dei)입니다. 고전 라틴어 발음은 '앙누스 데이'이지만 가톨릭식 라틴어 발음으로 '아뉴스 데이'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는 하나님의 어린 양 호칭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그의 계시록에서 이 말을 29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 한 마디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수난과 승리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불렀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로 그는 '유월절 어린 양'(paschal lamb)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유월절 양"(고린도전서 5:7)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이 말해주듯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날 저녁 그들의 집들을 보호해 준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출 12:5) 어린 양을 잡아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引枋)과 좌우 설주(- 柱)에 뿌리[면]"(출 12:22) 여호와께서 이집트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 그 집을 넘으사("pass over")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았을 그때는 유월절이 멀지 않았을 때였습니다.(요한 2:13) 유월절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양이 예루살렘으로 끌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세례요한은 성전에서 매일 드려지는 어린 양 번제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제사장(사가랴)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 예식과 제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9장에는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여러 제사가 매우 상세히 규정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잡아 한 양은 아침에 다른 한 양은 저녁에 번제(燔祭)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출애굽기 29:38-42) 성전이 존속하는 한 이 제사는 단 한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일과였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어떤 성서학자는 그것을 '레위인의 고역(苦役)'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해 아사 상태에 이르렀을 때도 이 제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그들은 매일 어린 양 번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의 아들 세례요한은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같이 하나님께 바치는 '성전의 어린 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로마 세계는 피로 진동한 세계였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동물 제사는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신전(神殿)들은 도살장에 가까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단의 계단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성전의 안쪽 뜰 번제단에서 동물을 태우면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수천, 수만의 순례자들이 바치는 동물 제사로 성전 안은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피비린내 그리고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이 제사에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유월절은 예루살렘 거주자들에게 대목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일족은 희생제물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동물 희생제의가 인간의 부정함을 씻고 죄를 제거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신약서신 저자는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브리서 10:1)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한다]"(히브리서 10:11)라고 단언합니다. 그런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할 뿐 동물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히브리서 10:3-4)라는 것입니다. 아예 그는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히브리서 10:8)라고 선언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히브리서 10:7, 9)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라고 선포합니다.(히브리서 10:10, 12) 그가 이렇게 우리를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고 이제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고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로 힘차게 나아가게 되었다고 밝힙니다.(히브리서 10:14, 19-20)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동물의 피나 고기가 아닙니다. 성서는 줄기차게 하나님께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예언자 사무엘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시편 51편 기자의 말입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6-17) 호세아의 말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이사야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라!"(이사야 1:10-20) 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千千)의 숫양이나 만만(萬萬)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보십시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겸허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직 순종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내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닫힌 길은 동물의 피나 고기로는 열 수가 없습니다. 성서가 예수님이 완전한 제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라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바로 그 순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에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 바로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완전한 제물이고 참다운 제사입니다.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 1598-1664)이 그린 <아뉴스 데이>(1635-1640년 경 제작 / 캔버스에 유채 / 37.3 x 62cm), 즉 하나님의 어린 양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 줄에 묶인 흰 양 하나가 보입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절제의 미를 보여줍니다. 네 발이 꽁꽁 묶여 꼼짝 못 하는 순백(純白)의 어린 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극사실적인 섬세함으로 그려진 어린 양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 환히 빛납니다. 양의 폭신폭신한 털의 질감이 생생하여 따스한 감촉까지 느껴집니다. 털의 때 탄 모습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친근합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지극히 평온한 눈입니다. 힘없고 결백한 양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감지했음에도 그의 눈은 지극히 평온합니다. 묶여 있는 발을 보아도 어디 하나 상한 곳이 없고, 묶을 때 저항한 흔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이 표현된 것 같습니다. 양의 뿔조차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아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몽골이나 중동의 유목민 가정을 방문하면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양 무리 중에서 가장 어린 양을 품에 안고 나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의 얼굴을 보며 한없이 웃기만 합니다. 자신을 탁자에 올려놓고 묶어도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마치 도수장(屠獸場)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라는 이사야의 말과 같습니다. 잠시 후 주인이 양의 목에 칼로 상처를 내서 피를 빼면 양은 몸부림치지 않고 스르르 잠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화가 수르바란은 이런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 <아뉴스 데이> 속에는 양의 순함과 선함이 극치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보통 고대사회의 희생제의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라르는 인류의 모든 희생제의는 폭력으로 폭력을 막는 사회 유지 장치라고 말합니다. 한 사회가 갈등과 폭력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어느 한 사람이나 집단을 지목하여 그 사회의 상호폭력을 그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다시 평온을 회복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면 모든 사람이 너나 할 것 없이 하이에나가 되어 살점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고 물어뜯다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다시 어슬렁대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다음 먹잇감을 기다리며 말입니다. 지라르는 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성서에도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도 반목과 갈등과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에 잘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8:14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팔고 사는 것에 맞서 소란을 피운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기존 질서의 평온을 찾으려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류사회의 모든 신화에서의 희생 제사와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곧 그의 십자가 사건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신화에서 집단폭력의 희생제물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다 희생제물이 된 예수 그리스도는 '무고한 존재'입니다. 인류의 모든 신화는 박해를 가한 자에게는 죄가 없고 희생된 자에게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폭력을 신성하다고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성서는 십자가 사건에서 희생된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라고 선언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요한1서 3:5)라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베드로전서 3:18)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처럼 무고하게 고난 받는 이 땅의 모든 희생양이 무죄라고 선언합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성찰한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폭력은 '구조적 폭력'이며 그 폭력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나 취약 계층을 향합니다.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더욱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강자를 숭배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문화 속에 이 폭력은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모든 폭력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고, 이 땅의 모든 무고한 자들을 향한 손가락질을 멈추게 합니다.

결국 평생을 인간의 모방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연구한 지라느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한물간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최고의 진주이다." 이 세상에 성스러운 폭력은 없습니다. 모든 폭력은 폭력입니다. 주님은 이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을 향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숭고한 평화로 폭력을 이기셨습니다. 폭력의 뿌리를 뽑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에베소서 2:14-16) 하셨다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기적인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은 닮고 싶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머리 스타일을 따라 하기도 했고 그가 입을 옷을 따라 입기도 했습니다. 숱한 모방의 대상이었던 그가 이런 아름다운 말을 남겼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그의 <유언>입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십시오.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십시오.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당신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십시오.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십시오.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싶으면 당신 자신이 결코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으십시오. 사람들은 상처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병으로부터 치유되어야 합니다. 무지함으로부터 계몽되어야 합니다. 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합니다. 결코 한 사람도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도울 손이 필요하다면 당신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쓰면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당신의 손이 두 개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은 돕는 손입니다."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이 아름다운 내면을 모방해보면 어떨까요. 성서는 "오히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에베소서 4:15,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그를 닮는 것이 신앙인들의 '욕망'이 되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습니다]."(히브리서 10:26).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십니다]."(시편 40:6) 우리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무고한 희생양의 피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드린 "한 영원한 제사"로 생명과 구원의 길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악의 뿌리, 곧 사탄은 저 밖에 있는 어떤 유령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욕망입니다. 자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늘 비교하며 절망하는 욕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 우리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약하고 무고한 내 이웃의 피가 아니라 이 세상의 이 모든 죄를 지고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고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의 부끄러움에 대한 참회를 담은 오늘의 공동기도문을 다시 읽으며 말씀을 마칩니다. "나를 당신 앞에서 드러내소서. / 나의 거짓과 위선, / 게으름과 안일함, / 욕심과 교만을 다 드러내소서. // 그러므로 당신 앞에서 / 노란 병아리처럼 울며 떨게 하소서. /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당신을 / 속이기 위해 나를 감추는 일뿐이었습니다. // 내게 몇 방울의 눈물이 있다면, / 한 방울은 나를 위하여, / 한 방울은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 또 한 방울은 그 많은 사랑의 기회를 주고도 / 내가 깨닫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 흘리게 하소서. // 그래도 한 방울이 남아 있다면 누군가의 눈물을 / 이것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방울 한 방울의 / 눈물로 나를 씻어 / 얼마 품의 아이처럼 / 순결하게 당신을 바라보는 일입니다."(정용철, <눈물의 소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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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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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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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