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수고(trouble)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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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전도서 3:9-14, 데살로니가후서 3:1-5, 13, 마태복음 11;28-30

설교문

길고 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잘 견뎌냈습니다. 이제 봄입니다. 봄은 한 해의 시작이지요. 새로운 시작은 희망을 말합니다. 겨울에 죽지 않고 살아난 것들은 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T.S. 엘리엇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습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으레 한두 번쯤 방송에서 듣는 말입니다. 433행에 달하는 그의 유명한 장시(長詩)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시작 부분이지요. 그런데 이 부분은 자주 인용되는 것처럼 뭔가 개인적으로 흡족하지 않은 4월의 경험을 토로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그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지 더 읽어보아야 합니다.

"4월은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 차라리 겨울에 우리는 따뜻했다. /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만 유지했으니."

엘리엇이 4월이 '잔인하다'라고 한 이유는 다시 봄이 되어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망각의 눈'이 덮인 겨울은 차라리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움트고 살아나야 하는 4월은 잔인하다는 겁니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수고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고란, 받을 '수'(受)에 괴로울 '고'(苦), 즉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를 씀, 또는 그런 어려움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trouble"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하와에게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창세기 3:16)이라 하셨습니다. "슬픔 가운데" 혹은 "고통 중에" 해산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담에게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세기 3:17) 하셨습니다. "땀 흘려가며" "고생스럽게" 일해야 먹고 살게 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타락 전에도 사람은 노동을 했습니다.(창세기 1:28)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성취하고 기쁨을 맛보는 복된 성격의 것이었지 생계유지의 수고스러운 방편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인생은 고통의 수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며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시편 104:23)라고 관찰합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도서 1:13)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11)라고 한탄합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2:22-23)라고 깊이 탄식합니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는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런 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도서 2:24) 고생스러운 수고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수고한 후에 누리는 기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도서 3:13)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전도서 5:18) 인생의 수고가 단지 고통(trouble)이 아니라 기쁨(joy)을 누릴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아이작 싱어(Isaac B. Singer)의 <바보들의 천국>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자 상인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천성이 게을러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습니다. 그가 죽기보다 싫은 일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모로부터 천국에 가면 일할 필요도 없이 매일 놀고먹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하지만 죽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아들은 죽기를 바라며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습니다. 걱정이 된 부모는 현명한 의사와 상의하였고 의사는 기막힌 처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이 다음 날 아침 깨어보니 아름답게 장식된 방에 누워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옆에는 날개가 달린 천사들이 - 사실은 천사로 분장한 하인들 -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죠?' 아들이 묻자 '여기는 천국입니다'라고 한 천사가 답합니다. 아들은 드디어 천국에 온 게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 일 안 해도 잔소리하는 이가 없고, 잠잘 때가 되면 천사들이 들어서 포근한 침대에 눕혀 주었으며, 식사 때가 되면 금 접시 은 접시에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들어왔습니다.

며칠이 지나 아들은 평범하게 갓 구운 빵과 버터 그리고 커피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천국엔 그런 음식이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실망한 아들이 '지금 몇 시나 됐소? 밤이오 낮이오?' 하고 물으니 '천국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럼 난 이제 뭘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천사는 '천국에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산해진미만 먹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잠자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자, 아들은 생전 처음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천국에서는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할 뿐입니다. 그렇게 '가짜 천국'에서 일주일을 보낸 아들은 마침내 참지 못해 소리를 지릅니다. '이렇게는 못 살아!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그러자 천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합니다. '천국에서는 죽는 게 없습니다!'

8일째 되는 날 이 아이의 부모는 다시 아들은 '지상'으로 데려왔고, 7일 동안의 '천국' 경험은 이 아이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는 게 이렇게 재미있고 즐거운 것인지 몰랐어!' 이후 아들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극적이고 버거운 삶이 있기에 평화가 값지고, 눈물이 있기에 웃음이 눈부시며, 실연의 고통이 있기에 사랑은 아름답고, 죽음이 있어서 생명은 소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헨리 밴 다이크의 <하늘에 온통 햇빛만 가득하다면>입니다.

"하늘에 온통 햇빛만 가득하다면 / 우리 얼굴은 / 시원한 빗줄기를 한 번 더 / 느끼길 원할 겁니다. // 세상에 늘 음악 소리만 들린다면 / 우리 마음은 / 끝없이 이어지는 노래 사이사이 / 달콤한 침묵이 흐르기를 갈망할 겁니다. // 삶이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면 / 우리 영혼은 / 차라리 슬픔의 고요한 품 속 / 허탈한 웃음에서 휴식을 찾을 겁니다." (장영희, 『(영미시 산책) 축복』 중에서.)

'나무 의사' 우종영 선생이 말하는 것처럼(『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개나리처럼 씩씩한 나무도 없을 것입니다. 봄만 되면 개나리는 한반도 어디에서나 피어납니다. 그 노란 꽃망울이 일시에 터지면 거리는 온통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해가 잘 들어야 꽃을 일찍 피운다는 것만 빼놓고 개나리는 무엇 하나 가리는 게 없습니다. 공해에 찌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도 매해 봄 어김없이 건강한 꽃을 선보이는 것은 개나리의 타고난 '씩씩함' 때문입니다. 토양이 적은 바위산도 봄만 되면 산 전체가 개나리로 뒤덮이는데, 비록 다른 꽃들처럼 화사하진 않으나 개나리의 그 '씩씩함'에 우리는 왠지 정이 듭니다.

씩씩한 건 개나리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잡초라고 취급하는 쑥, 억새, 고사리와 같은 '개척식물'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얼마 전 강원도의 큰 산불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수백 년을 자란 나무들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앞으로 잿더미가 된 그 땅을 우리는 어떻게 복원해야 할까요, 그런데 산불로 폐허가 된 땅을 가장 먼저 찾아오는 방문자는 싸리나무입니다. 길이도 짧고 몸통도 얇아서 기껏해야 울타리나 빗자루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싸리나무는 불난 자리를 녹화시키는 회복의 주역입니다. 고시리 역시 싸리나무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으나 결코 대접을 받는 축에 낀다고 할 수 없는 고사리는 그 타고난 그 씩씩함으로 잿더미 속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싹을 틔웁니다. 사람으로 치면, 꼭 필요한 일이지만 모두 꺼리는 3D 업종 종사자라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 개척식물들이 초석을 다지고 나면 비로소 다른 나무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개척식물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를 내줍니다. 예전의 불모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짙고 푸른 숲으로 복구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알아주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식물들은 맡은바 자기의 소임을 다 해냅니다. 묵묵하게 수고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런 생명들을 통해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삶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라는 말은 비단 나무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삶, 내일이 보이지 않는 삶이라 하더라도 분명 살아가는 이유가 있고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를 알고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낼 때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지키는 일이 됩니다. 오히려 하늘 높이 위로만 혼자 자라면서 어떻게든 많은 햇볕을 받기 위해 혈안이 된 거대한 교목들보다 보잘것없는 나무들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사리나 싸리나무와 같은 '개척자'의 수고를 한 사람입니다.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인 데살로니가서에서 그는 불모지와 같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형제[자매]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데살로니가전서 2:9) 그는 텐트를 만들어 팔아 자기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데살로니가후서 3:8)이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그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고생했습니다. 자칭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흔들리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도다]."(고린도후서 11:23) 그는 같은 서신에서 자신이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27)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두려웠습니다. 이런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의 두려움은 그가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넌지시 비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라디아서 4:11)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혹 시험하는 자가 [그들을]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데살로니가전서 3:5) 두려워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수고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 맞고, 굶주리고, 헐벗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수고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의 신약서신이 말하는 것처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기]"(데살로니가후서 3:3) 때문입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믿음직하다, 혹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을 굳세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실 것]"(새번역)이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시는 것과 같이 인내하게"(데살로니가후서 3:5, 새번역)하실 것이기에 바울은 "형제[자매]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3)라고 자신있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황무지와 같이 죽은 땅에서 복음의 씨앗을 심으면서 끝까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눈을 들어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이 소망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미쁘다 이 [복음]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디모데전서 4:9-10)라고 그는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므로]...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하리라]"(빌립보서 2:12-13, 16)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골로새서 1:29)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교인들을 향해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갈라디아서 4:19)라고 다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수고가 자신의 공로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셨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라는 바울의 저 유명한 고백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기의 공적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수고와 성과가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은혜임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수고하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는 이유는 일이 많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나를 드러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공을 세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베푼 것을 되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입니다. 맡겨 주신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23) 했습니다. 진정한 선행은 선을 행하면서도 남에게 베푼 것을 잊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선을 행하다 낙심하는 이유는 완전에 대한 강박 때문입니다. 내가 볼 때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하고 '이젠 안 할 거야' 포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하되 너무 완벽하게 하려 하지 말고 의를 행하되 너무 철저하게 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루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내가 수고하였으나 그 수고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바울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살면서 가끔 이런 의문이 듭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기도 하는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죽자 사자 열심히 수고해도 왜 행운은 나를 그냥 지나쳐 가는 겁니까? 행운의 네 잎 클로버는 왜 이리 찾기 힘든 걸까요? 엘라 히긴슨(Ella Higginson)의 <네 잎 클로버>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해가 금과 같이 반짝이고 / 벚꽃이 눈처럼 활짝 피는 곳을 알지요. / 바로 그 밑에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 네 잎 클로버가 자라는 곳이 있지요. // 잎 하나는 소망을, 잎 하나는 믿음을, / 그리고 또 잎 하나는 사랑을 뜻하잖아요. / 하지만 하나님은 행운의 잎을 또 하나 만드셨어요. / 열심히 찾으면 어디에서 자라는지 알 수 있지요. // 하지만 소망을 갖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 사랑해야 하고 강해져야 합니다. / 열심히 수고하고 기다리면 네 잎 클로버 / 자라는 곳을 찾게 될 거예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행운을 원하지만 행운은 우연히 오지 않습니다. 행운을 만나기 위해서는 믿음과 희망을 가져야 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뜻하지만,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가 보이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일부러 찾지 않아도 내 발밑에 차이는 게 바로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자체가 행운보다 더 소중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장영희, 『다시, 봄』 중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명기 12:7) 자신의 수고에서 기쁨을 누리는 복, 이것이 출애굽의 은총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거기에서는 예루살렘의 백성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65:17-25 중에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전도서 2:24)입니다. 인생의 고생스러운 수고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수고한 후에 누리는 기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전도서 3:13)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전도서 5:18)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수고는 단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갈라디아서 6:9)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삶의 무게로 지치고, 선을 행하다 낙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성서의 맨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요한계시록 14:13)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수고에 끝이 있고 영원한 복락이 있음을 약속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움트고 살아내야 할 4월이 옵니다. "차라리 겨울에 우리는 따뜻했습니다. /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만 유지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버거운 수고를 해야 하는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드십니다]." 마른 구근에 촉촉한 은혜의 비를 내려주십니다. 비록 내가 수고하겠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할 것]"(빌립보서 2:16)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함께하시니 우리의 수고는 고통(trouble)이 아니라 기쁨(joy)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이는 [여러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5: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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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