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울게 하소서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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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21:14-19, 히브리서 5:5-10, 누가복음 23:26-28

얼마 전 페이스북(Facebook)에 올라온 한 친구의 글이 저를 잠시 멈춰 세웠습니다. "눈의 본질은 보는 게 아니라 눈물 흘리는 일이다." 아니, 눈의 본질은 보는 거고 부가적 기능이 눈물 흘리는 것 아니었나요?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린가 했더니,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말이랍니다. 그 친구의 해설입니다. "눈이 하는 일이 단순히 하나 더 있다는 말일까요? '눈물 흘리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저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먼저 눈물, 그 다음에 보기... 세상과 역사를 똑바로 보려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내가 먼저 눈물 흘려야 합니다. 실컷 아프게 울어야 합니다..."(가톨릭 신학자 김근수)

그러고 보니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된 건 먼저 그 앞에서 '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찬송가 144장에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고명(高明)한 신학자의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 찬송가 4절에,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저는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그분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울었고, 눈물을 흘리니 비로소 십자가의 의미가 보였습니다. 누군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울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우리 시대는 눈물이 메마른 시대입니다. 우리 세대는 울 줄 모르는 세대입니다. 마음이 사막과 같이 메말라 울지 알고, 울지 않으니 더 메말라갑니다. 병마가 싸우고 있는 이해인 수녀가 어느 날 이런 소박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기도입니다. "하느님 / 오늘은 / 눈물이 그리워요 / 제 안에 커다란 / 사막이 생겼는지 / 메마르고 답답해도 / 눈물샘이 마른 저를 / 견디기가 힘들어요 // 기뻐도 슬퍼도 / 눈물이 넘치던 / 제 모습을 기억합니다 // 아주 조금만 / 울 수 있게 / 저를 도와주세요 // 오늘은 / 꼭 한 번 / 울어야만 / 다시 살 것 같아요 / 하느님."

하갈이 사막으로 쫓겨났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창세기 21:8-21)의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은 이집트 여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는데 이후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았지요. 이삭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9절, 개역한글)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하라고 요구합니다.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삭의 후손은 약속된 상속자가 될 것이고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엘과 함께 떠나보냈는데 그들은 브엘세바 빈들에서 방황합니다. 목적지가 없는 이들에게 사막에서의 방황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물이 떨어지자 이스마엘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어린 아들을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아]...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15-16절, 새번역)라고 했습니다. 덤불 아래 '뉘어 놓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솰라크'인데, 그건 시신을 버리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거의 다 죽은 겁니다. '화살 한 바탕 거리'는 약 3백 미터 정도입니다. 하갈은 숨이 끊어져 가는 자식의 마지막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아이 쪽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15절, 새번역) 했습니다. 그 아이의 소리는 신음하는 소리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아이도 고통의 소리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누워서 우는"(17절, 새번역) 소리를 들으시고, 다시 성서가 말하는 것처럼,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습니]다."(19절, 새번역) 했습니다. 이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울던 하갈의 눈을 밝혀 생명이 물줄기를 보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13절, 새번역) 하신 것과 달리 하갈에게는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18절, 새번역) 약속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20절, 새번역)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는 자들의 통곡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이 들으시리라"라는 뜻입니다.

김은미 총장 선생님이 휴가를 떠나면서 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셨습니다. '교수가 60세가 넘으면 책을 그만 사고 버리기 시작해야 한다'라고 누군가 일러주었는데, 제게 아직도 공부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다고 보아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선물 받은 책은 고(故) 이어령 선생님의 신간, 『눈물 한 방울』이었습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노트, 2019-2022"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삶을 반추하고 죽음을 독대하며 써 내려간 내면의 기록"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인상적인 서문 앞에 오랫동안 멈춰 서 있었습니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스스로 생각해 온 88년, 병상에 누워 내게 마지막에 남은 것이 무엇일까 한참 생각했다. '디지로그' '생명자본'에 이은 그것은 '눈물 한 방울'이었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란 걸 증명해준다... 낙타도 코끼리도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만, 정서적 눈물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다. 로봇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이렇게 시작한 선생님의 서문은 종교적 성찰로 이어집니다. "나자로의 죽음과 멸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흘렸던 예수의 눈물, 안회(顏回)의 죽음과 골짜기에 외롭게 피어 있는 난초 한 그루를 보고 탄식한 공자의 눈물, 길거리에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흘린 석가모니의 눈물, 그 사랑과 참회의 눈물이 메마른 사막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선생님의 눈물에 대한 이런 성찰은 마침내 울지 않고, 울 줄 모르는 우리 시대를 향한 예리한 비평이 칼이 됩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fraternité)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하나 되게 했던 프랑스 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rnité),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닌가.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사랑의 눈물 한 방울이 마법에 걸린 왕자를 주술에서 풀려나게 한다는 서양 동화를 기억하는가? 눈물 없는 자유와 평등은 문명을 초토화시켰다. 인간이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코로나 주술을 이길 유일한 길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뿐이다." 그랬습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때 쓰는 마지막 '눈물 한 방울,'" 그 눈물 한 방울이 한평생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이어령 선생님의 지성이 다다른 최후의, 최고의 경지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누가 23:26-27) 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쳤습니다. 그나마 그 외로운 십자가 길을 뒤따르며 슬피 울어줄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예수님은 위안 삼아야 할까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 23:28)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누가에만 나오는 특수자료입니다. 어떤 해석가들은 구약성서의 스가랴 12장 10절("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을 근거로,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당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여인들의 동정을 나타낸 이야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의 성취임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본문이 예루살렘 주민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의 예언 말씀이라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성을 보시고 우시며"(누가 19:41)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이후 서기 70년, 예루살렘 1백만 주민은 로마 최정예 군단 제10여단에 의해 도살됐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예루살렘 성 밖으로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 마지막 예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 이 경고의 말씀은 '만일 너희가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너희 자신들을 위해서 우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날이 이르면," 곧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이 이르면,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2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여인이 수태하지 못하는 걸 보통 저주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멸망의 날에는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는]"(요엘 2:103) 그 무서운 '여호와의 날'엔 자식을 가진 자는 자식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날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사람이 산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0-31절)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푸른 나무'에 그리고 예루살렘의 딸들을 '마른 나무'에 비유하십니다. '푸른 나무'인 자신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인 예루살렘의 딸들이 어떻게 고통을 피하겠느냐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무 죄 없는 예수께서 당하는 고통도 그냥 두신다면,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들은 얼마나 더 큰 진노를 받고 고통을 당하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악에 물든 예루살렘이 멸망했던 것과 같이 코로나와 기후위기와 전쟁과 기근과 폭력과 탐욕과 불평등과 양극화로 스스로 몰락해 가는 인간의 문명 앞에서 나 자신과 내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울 줄을 모릅니다. 우는 법을 잊은 것 같습니다. 울지 않으니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의 고통에 냉담하니 닥쳐오는 심판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했는데, 불행히도 우리는 오늘의 공동기도문처럼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지 못[하는] 메마른 마음"과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비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이주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울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메마르고 비좁은 마음에 은혜의 비가 내려 "울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는 원래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Rinaldo>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제목이지요. 사라센 왕은 십자군의 영웅 리날도를 사로잡으려 그의 약혼녀를 납치합니다. 적진에 갇힌 약혼녀 알미레나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자유를 갈망하며 애절하게 부른 노래가 이 노래입니다.("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 Let me weep my cruel fate / 나의 잔혹한 운명을 울게 하소서) // E che sospiri la libertá / And sighing for freedom / 자유를 위해 탄식하게 하소서.") 알미레나처럼 오늘 우리는 나 자신과 내 자녀들 앞에 닥친 잔혹한 운명 앞에서 울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때론 내 눈에서도 / 소금물이 나온다 / 아마도 내 눈 속에는 /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나 보오."(나태주, <그리움>) 눈물 맛이 짠 것을 보고 시인은 사람 눈 속에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다고 재미있게 상상했습니다. 눈물은 짭니다. 왜 짭니까? 진짜 눈 속에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어서 그렇다고 말씀하진 마십시오. 눈물은 98.55%의 물에 나트륨, 칼륨, 알부민, 글로불린, 게다가 카테콜라민과 같은 성분이 들어있어서 그렇다고도 말씀하진 마십시오. 눈물은 진실하기에 짭니다. 눈물은 정직하기에 짭니다. 눈물은 인간이 고통을 통해 다른 인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에 짭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무관심한 우리의 사랑과 도무지 흘릴 줄 모르는 우리의 눈물을 위해 신을 화자(話者)로 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슬픔이 기쁨에게>입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신은 귤 값을 깎으며 기뻐하는 '너'에게 저주하듯 선언합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노라고.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노라고. 한겨울에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도 덮어 주지 않은 그 너에게 저주하듯 선언합니다. 무관심한 사랑과 흘릴 줄 모르는 눈물을 위해 기다림을 주겠노라고.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그런데 신은 슬픔이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합니다. 슬픔은 '사랑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릇 마음의 슬픔을 모르는 자는 육신의 아픔을 모르는 자만큼이나 불행할 것입니다. 아픈 건 불행입니다. 하지만 아픈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는 건 더 큰 불행입니다. 이가 썩으면 통증을 느끼게 해주는 치아 신경 덕분에 우리는 썩은 이를 고칠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통증을 모르면 인간은 죽습니다.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겁니다. 그러니 슬픔을 아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슬픔은 슬픔을 고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고통을 치유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감(共感)의 능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자기가 죽은 지도 모르고 이미 죽은 사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절대자인 '나'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에게 슬픔을 선물로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막과 같이 메마른 마음에 은총의 비를 내려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그러므로 저주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긍휼입니다. 위로입니다. 예수께서도 "애통하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 5:4)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증을 느끼게 하십니다. 슬픔을 알게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왜냐구요? 그래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와 나의 자녀 그리고 나의 이웃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모든 피조물이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손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울게 하소서!" 나의 아픔에, 이웃의 고통에, 온 피조세계의 신음에 울게 하소서!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히브리서 5:5-10)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지 그 근거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을 높여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또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셨기에 그가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구절은 7절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경건하게, 진실하게 큰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기 때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힘이요 생명입니다. 눈물이 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을 때 나를 위로하고 힘주실 분입니다. 그가 우리의 잔혹한 운명 앞에 큰 눈물로 기도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 울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와 내 자녀를 위해 울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관심한 나의 사랑과 흘릴 줄 모르는 나의 눈물로 인해 사망과 고통의 골짜기에 빠진 이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욥처럼,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궁핍한 사람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욥기 30:25)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갈이 소리 내어 통곡할 때, 이스마엘이 가녀린 신음 소리를 낼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하갈의 눈을 밝혀 생명의 샘물을 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으십니다. 듣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눈의 본질은 보는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울어야 합니다. 울어야 보입니다. 나와 세상과 역사를 똑바로 보려면 나와 이웃과 세상의 고통에 울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컷 울어야 합니다. 아프게 울어야 합니다. 나의 잔혹한 운명과 세상에 가득 찬 고통에 목 놓아 울어야 합니다. 그 눈물이 내 눈을 밝혀 생명의 샘을 찾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주여, 울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마침 기도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해인 수녀의 <눈물 예찬>으로 대신 드립니다. "웃음도 좋지만 / 눈물도 좋다 / 사람이 때에 맞게 / 울 수 있는 것도 / 축복이다 // 가끔 눈물을 담고 있는 / 나의 눈을 / 가만히 들여다본다 // 젊어서는 나를 위해 / 많이 울었다면 / 지금은 오히려 / 남을 위해 더 많이 우는 / 나를 본다 // 새로운 발견! / 이러한 내 모습이 / 모처럼 마음에 든다." 주님, 오늘은 남을 위해 더 많이 울게 하시고, 이러한 내 모습이 모처럼 마음에 드는 복된 하루 되게 해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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