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의의 나무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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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에스겔 34:11-15, 히브리서 13:10-15, 마태복음 21:14-17

설교문

해마다 광복절(光復節)이 있는 8월이 되면 민족의 수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겹쳐집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재미작가 이민진 씨의 소설 『파친코 Pachinko』의 첫 문장입니다. 이 소설은 '자이니치'[在日], 그러니까 재일 한국인 혹은 조선인의 기구한 삶과 수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한 뒤 출간하기까지는 무려 30년이나 걸렸습니다. 인터뷰한 한국인만 수천 명!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샅샅이 훑어 4대에 걸친 재일 교포 수난사를 완성했습니다. 이 책은 세계사의 변방(邊方)에 묻혀 있던 한국 근현대사를 세상에 널리 알렸습니다.

이야기는 1915년, 일제 치하 조선의 부산 영도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 셋을 낳았지만 모두 돌을 넘기지 못한 어머니 양진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뱃속에 또다시 들어선 아기가 이번만큼은 꼭 살아남기를 기도합니다. 그 간절한 기도 속에서 선자가 태어납니다. 어미의 절박한 기도 속에 태어난 선자는 기존의 대서사시 주인공처럼 '위대한 영웅'과는 거리가 멉니다. 역사는 그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하루하루 열심히 삶을 이어갑니다. 누구보다 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싸우며 살아갑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여성들은 그저 순응만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자는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었던 삶의 고비마다 자신의 의지를 선택합니다.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은 한수와의 만남으로 인해 찾아옵니다. 한수는 '성공한 조선인'이었습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로서 역사의 비극을 물리치고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젊은 선자는 그 자신만만한 한수와 강렬한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을 꿈꾸던 선자에게 한수가 건넨 말은 그가 이미 일본인 처를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일본인과 정략적으로 결혼했으나 선자와 자식만큼은 풍족하게 해주겠다는 한수의 말에, 선자는 부끄러운 부자의 삶 대신 가난해도 떳떳한 삶을 선택합니다. 그 엄혹한 시절에 혼인도 하지 않고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될 여성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두 번째 결정적 순간은 그로부터 7년 뒤 찾아옵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려던 선자는 따뜻한 성품을 지닌 기독교 전도사 이삭을 만났고 그와 함께 일본 오사카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선자의 강인함을 사랑했고 그녀와 한수의 아이인 노아에게도 헌신적인 애정을 쏟아붓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과 별개로 자이니치, 즉 재일 조선인의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어린 노아마저 학교에서 따돌림받을 정도로 노골적인 차별이 항상 그들을 괴롭힙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이삭은 일본 천황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됩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넘어진 땅을 박차고 일어섭니다. 가장(家長)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생계를 책임지려 합니다. 선자가 선택한 수단은 김치 장사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멸시하는 칭호로 사용하던 김치를 오히려 무기로 삼은 것입니다. 김치를 수레에 싣고 장터로 나간 선자는 일본인들의 경멸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외칩니다. "오사카 최고의 김치라예. 시상 천지에 이런 김치 없습니더. 우리 어무이한테 배운 깁니다. 우리나라 김치입니더." 김치 냄새에 질색하는 일본인들 틈에서 꿋꿋하게 외치는 선자의 얼굴엔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열사들의 강인한 결기가 서려 있습니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드라마 <파친코>는 절망의 시대를 버티고 살아낸 선자의 모습과 함께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시즌 1을 마무리합니다. "2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식민 지배 때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중 80만 명은 일제에 의해 노동자로 끌려갔다. 대부분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약 60만 명은 일본에 남아 무국적자가 됐다. 이 이야기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은 견뎌냈다." 그랬습니다. 역사는 그들을 망쳐 놓았으나 조선의 여성들은 상관하지 않고 견뎌냈습니다. 끈질기게 싸워 살아남았습니다. <파친코>는 선자의 부모부터 손자까지 가족 4대에 걸친 생존기를 통해 평범한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지우려 했던 야만의 역사를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역사적 업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으나 그래도 상관없다!" 『파친코』는 고난의 민족사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간 이 땅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 앞에 바치는 대서사시입니다.

구약성서 에스겔 34장은 꼭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은 소위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지도층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망쳐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게 한 여호야긴 임금, 시드기야 임금, 그리고 그들의 관료들입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은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에스겔 34:2-6)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니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흩어져 들짐승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이 성경의 이야기가 기원전 587년 유다왕국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서기 1910년 조선왕조의 이야기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만있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진정한 목자가 없으니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구약'(Old Testament)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First Testament)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에스겔 34:11-16)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위로하시고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이 예언은 구약성서의 광맥(鑛脈)에 박힌 보석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구약성서가 참 목자의 도래와 하나님의 통치를 약속했다면 그 약속의 성취가 바로 신약성서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마태복음 9:36) 무리를 찾아 위로하고 고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이스라엘의 읽어버린 양을 찾고 또 찾는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많은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 강도들의 소굴이 된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시고 병자들을 손수 고쳐주신 다음에 예수님은 스스로 거룩하고 의롭다 여기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마태 21:17)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 장엄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인 베다니에 머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는데]"(요한 11:18) 주님은 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모두가 꺼리는 일이었습니다. 유대 종교법으로 '죄인'이라 낙인찍힌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로 인해 "그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찾고 또 찾아 그들을 고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오늘의 신약서신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히브리서 13:12)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13)라고 말합니다. '성문 밖', '영문 밖', 혹은 '진영 밖'은 어디입니까? 구약성서에서 그곳은 저주받은 자들을 끌어내 돌로 치던 장소입니다.(레위기 24:14, 23),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남녀를 막론하고"(민수기 5:2-3) 다 내보내던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성문 밖'으로 나가서 백성들의 치욕을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자기 피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거짓 목자들을 물리치시고 친히 목자가 되어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위로하시고 정의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에스겔 34장의 예언과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에스겔 34장과 함께 읽어야 할 예언의 말씀은 이사야 61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독문으로 함께 읽었습니다. (찬송가의 교독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 땅에 오신 당신의 소명(召命)이 무엇인지 밝히시기 위해 찾아 읽으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광야에서 사십일 간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자라나신 나사렛 마을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 들어가 성경 말씀을 찾아 읽으신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 많고 많은 구약의 말씀 가운데 예수께서 콕 짚어 찾아 읽으신 구절이 바로 이사야 61장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3)

이 아름다운 구절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가 된 자, 그리고 갇힌 자를 향하고 계십니다. 슬픔과 괴로움에 우는 자들을 향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슬퍼하는 자들에게 화관(花冠)을 씌워 주시고,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움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고린도전서 1:27-28)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의의 나무'라고 불리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의의 나무'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의의 나무! 더 정확한 번역은 '의의 나무들'(oaks of righteousness)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정의의 나무숲'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번역했습니다.) 이 나무는 참나무입니다. 참나무는 히브리어로 '엘론'(elon)인데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에서 유래했습니다. 성서에서 참나무는 힘, 성실, 보호, 장수, 영광, 그리고 불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합니다. 역사는 그들을 망쳐 놓았으나 상관하지 않고, 평범한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지우고 부정하려 했던 이 야만의 역사에 저항하며 질긴 생명력으로 이 땅의 생명을 이어간 한국의 여성들이 이 '의의 나무들'이라고 말씀드리면 지나친 것일까요.

제주 곶자왈을 다녀보셨는지요. 곶자왈은 숲은 뜻하는 제주어 '곶'과 어수선하게 엉클어져 있는 수풀을 일컫는 '자왈'이 합쳐진 말로, 용암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키나무, 덩굴나무, 그리고 가시를 단 나무들이 뒤엉켜 숲을 이룬 곳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용암이 지나간 척박한 바윗덩어리 틈에 이런 천연의 숲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숲의 주변부로 가야 알 수 있습니다. 곶자왈 숲의 주변부에는 잔가지 위로 날카로운 가시를 달고 있는 나무들이 뒤엉켜 있는데 그들은 실거리나무, 호자나무, 청미래덩굴 등입니다. 호자나무 혹은 호랑가시나무는 가시가 어찌나 뾰족한지 호랑이의 발톱 같다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이런 가시덤불들이 숲 주변부에서 따가운 햇살과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 주기에 제주도의 돌밭 위에는 풍성한 숲이 형성됩니다. 화산이 폭발해 흘러내린 용암 대지는 어떤 생명도 잉태할 수 없는 불모지인데, 그 척박한 바위 땅에 가장 먼저 이런 가시덤불들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들의 질긴 생명력 덕에 자갈밭은 조금씩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뀝니다. 그들 덕에 한라산 자락에서 날아든 씨앗들이 점차 터를 잡습니다. 이렇게 척박한 땅을 개척하고 다른 생명이 자랄 때까지 수호자 역할을 하는 이 가시덤불을 임의(林衣), 곧 '숲의 옷'이라 부릅니다. 참 멋진 단어입니다. 하늘을 향해 여봐란듯 가지를 뻗은 큰키나무들도 있으나 볼품이 없어도 한결같은 푸르름으로 제 소임을 다하는 가시를 단 나무들의 투박한 이파리는 훨씬 더 정겹습니다. (우종용,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중에서.)

예수께서는 가시관을 쓰시고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예수님의 가시관도 호랑가시나무로 만들었다 하지요.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이 호랑가시나무는 서양사람들이 신성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문 밖', 곧 숲의 주변부로 나아가셨습니다. 거기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가시덤불로 '숲의 옷'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생명도 잉태할 수 없는 불모지 위에 자신의 피를 뿌려 생명의 길을 여시고 그 토양 위에 '의의 나무들'이 자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선자처럼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위로하시고 의의 나무들이 하나님의 정의의 숲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사의 성문 밖, 변방에 묻혀 있던 한국 여성들의 아픔과 함께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지구상엔 750만 명의 한인 디아스포라가 있습니다. 광복절이 있는 8월에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복(光復)이 곧 분단(分斷)이고 이산(離散)이었던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파도 직시해야 합니다. 이민진 작가의 외할아버지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원폭으로 부모를 잃고 한국에 돌아온 아이들을 돌보는 고아원을 운영했습니다. 그 영향인지 작가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데 관심이 많고 특히 그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다음 세대에게 '정서적 공간'을 열어주고 진실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역사를 말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사람이 있지만, 식민지 역사처럼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만 성장할 수 있다"라고 그는 확신합니다.

"역사는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콕 집어 찬사를 보내는 바람에 더 유명해진 이 첫 문장에서 작가는 역사의 실패와 상관없이 하루하루 열심히 삶을 이어간 평범한 이들 앞에 무한한 애정과 깊은 존경을 표현합니다. 이 애정과 존경은 오늘도 자기 삶의 자리에서 사랑과 정성을 다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어떤 역경과 시련이 닥쳐와도 그에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이 땅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애정과 존경일 것입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삶도 저마다 살아갈 이유와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에 함부로 대해도 좋을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빛나는 생은 높은 데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습니다. 영웅은 없습니다. 모든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며 희망이 되는 자가 곧 영웅입니다. 오늘 그렇게 사는 여러분이 영웅입니다. 우리의 삶은 십자가의 길과 같이 험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갑시다]."(히브리서 13:12-13)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갑시다. 주가 곤욕을 당했으니 나도 곤욕을 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핍박 당할 때 주의 품에 안기고 세상 고초를 당할수록 오히려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찬송가 341장)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의의 나무들'입니다. 이사야는 나아가 이 의의 나무들이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 나무들을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세상 만민이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이사야 61:6-9)라고 예언합니다. 이 축복의 예언이 수난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민족 앞에 그리고 오늘 여러분 위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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