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자신을 속이는 자"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Oct 24, 2022 09:50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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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욥기 13:3-9, 야고보서 1:22-27, 마태복음 4:17

설교문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격언(格言)이 하나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비만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면 됩니다. 그런데 비만해지면 몸 편한 대로 생각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영어로 "diet"라고 적어놓고 그 뜻은 '내일부터'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자기를 속이는 거지요.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의 말입니다. 진실은 직면하기도 어렵고, 전해주기도 불편합니다. 달콤한 말을 들으며 평생 꽃길만 걷고 싶은 게 모든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황을 조작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크고 작은 거짓말들이 인류의 역사와 공존해왔습니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고 합니다. 상대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는 악의적 목적의 거짓말을 '흑색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상대를 위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거짓말을 '백색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저처럼 생긴 사람에게 '잘생겼다'라고 말 못하니, '인상이 좋다'라고 말해주는 식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흔한 거짓말은 나와 상대방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제3자에게는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거짓말입니다. 이것을 '회색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임의로 '노란색 거짓말'을 하나 보태고 싶습니다. 노란 장미는 배신을 상징한다고 하던가요. 자기를 속이는 거짓말, 그래서 스스로 기만하고 결국 자신을 배반하는 거짓말을 노란 거짓말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예수님 시대에도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자기를 기만(欺瞞)하고 남을 기망(欺罔)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허위의 사실로 상대방을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던 사람들이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예수님과 한판 논쟁을 벌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입니다.(마가 12:13-17, 마태 22:15-22, 누가 20:20-26) 성서를 보니,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율법학자 그리고 장로들은 예수님을 '포섭'하기 위해, 말이라면 아마에게도 뒤지지 않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을 보냅니다. 여기서 '포섭하다'(ἀγρεύω)는 "사냥해서 잡다"라는 뜻입니다. 본격적 '예수 사냥'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심을 압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그들이 예수께 던진 질문은 사냥감을 토끼몰이 하듯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대부분은 민중의 고혈(膏血)을 짜는 세금을 로마에 바치는 걸 수치요 굴욕이며 매국적인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하면 백성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조세저항 운동으로 여겨져 잡혀가게 됩니다. 어떤 대답을 하든지 함정에서 나오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外飾, ὑπόκρισις - 연기, 위선, 기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황제에게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고 거기에 누구의 형상(image)과 어떤 글(inscription)이 새겨져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당시 데나리온은 로마 군인들에게 봉급을 지급하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식민지 전역에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당시 로마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14~37 재위)의 얼굴 형상과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TI CAESAR DIVI AUG F AUGUSTUS: Tiberius Caesar Divi Augusti Filius Augustius."(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글자와 신들의 보좌에 앉은 황태후 리비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의 아들로 지칭하는 이 동전은 하나님만 섬기는 유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불경하기 짝이 없는 동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동전을 소지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동전을 보시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지금까지 이 말씀은 주로 정교분리(政敎分離), 즉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이런 해석은 주로 독재 권력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려라"라는 예수님의 대답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의 질문과 결정적으로 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려라"라고 답하신 겁니다. 세금을 '바치는'(δίδωμι) 게 옳으냐 물었는데 예수께서는 '돌려주라'(ἀποδίδωμι)라고 응수하신 겁니다. '바치다'라는 단순한 단어를 '돌려주다'로, 즉 무언가 빚진 사람이 그 빚을 상환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일부러 바꾸신 겁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만일 질문을 던진 네가, 로마 황제가 정복한 땅과 백성 그리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산물의 주인이라고 인정한다면 너는 그 황제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자기의 것을 요구할 때 그것들을 되돌려 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가이사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되돌려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면, 진정한 유대인이라면, 그것이 바리새인이든 헤롯당원이든,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모세가 명확히 이를 선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시도다"(출애굽기 15:18), 이 신앙은 유대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겁니다. 이것은 예수를 책잡으려던 적대자들도 공유하는 신앙입니다. 진실한 유대인이라면, 자기가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하나인 신실한 유대인이라면, 하나님 외 다른 신의 주권을 인정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허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을 던진 이들의 자기모순을 폭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칭 신이라는 로마 황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자기를 기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그 믿음에 상통하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십니다. 믿음대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믿음을 스스로 속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책잡으려던 질문자들은 결국 "예수께 경탄(amazed, marvelled)"(마가 12:17)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성서가 기록합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야고보서 1:22-27)에서 야고보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거울의 비유를 들어 부연 설명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불가(佛家)의 성철 스님도 비슷한 비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속이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울면서 거울 속의 사람보고는 웃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몸을 구부리고 서서 그림자를 보고 바로 서지 않는다고 욕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 자]"(요한1서 1:6)라고 말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요한1서 4:20)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1서 1:1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과연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님 사람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분열해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까? 바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라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린도전서 3:18)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라고 말합니다.

교회(종교)개혁주일이 한 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505년 전 독일의 교회개혁은 끝내 자신을 속이지 못했던 한 바보 같은 수도사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는 바보였습니다. 21살의 젊은 나이에 수도사가 되어 그는 평생 기도하고 금식하며 극단적인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수도사로서 엄격한 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 내면의 깊은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지려고"(창세기 17:1, 신명기 18:13, 마태 5:48) 노력했으나, 노력하면 할수록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실망했고, 하나님도 그런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 앞에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때문에 그는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열심히 고해성사에 참여했습니다. 고해성사(告解聖事)란 사실 훌륭한 제도입니다.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고 또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중재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습니다. 루터는 이 고해성사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지은 죄가 생각나서 고해할 일이 생기면 곧바로 고해사제에게 달려가 모든 걸 털어놓곤 했습니다. 심지어 한 번은 여섯 시간이나 자신이 최근에 지은 죄를 낱낱이 고해한 적도 있었습니다. 루터가 이렇게 걸핏하면 고해사제에게 달려와 용서를 구하니 너무도 괴로워진 고해사제는 루터에게 '성모를 범한 대죄를 짓기 전에는 다시 찾아오지 말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고해가 끝나면 고해자는 고해사제에게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민한 루터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란 고해사제의 손이 아니라 고해자가 얼마나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회를 했느냐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사실 그렇습니다. 고해자가 진심으로 참회하는지, 아니면 그저 하나님께 벌 받는 걸 피하려고 잠시 속 보이는 흉내만 냈는지, 이는 오직 고해자 자신만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설사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참회와 진정한 내면의 참회 사이의 간극 속에서 루터는 고뇌했습니다.

고해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면죄 역시 루터에게 문제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회의 성인(聖人)들이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쌓은 공로, 즉 남아돌아가는 '잉여 공로'를 교회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양도, 분배, 융통시키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면죄'(免罪) 혹은 '대사'(大赦)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사 사면된 후에 남아 있는 벌을 교황이나 주교가 면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런 면죄를 당시 교회는 성인들의 유골 방문과 연계시켰습니다. 성물 숭배가 시작된 것이지요. 신자들이 성인들의 '거룩한 뼈'를 볼 때마다 얼마만큼의 덕을 보는가를 정확히 계산해서 제시할 정도였습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비텐베르크 성당에는 무려 1만 9천 개가 넘는 성인들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 기가 막히게도 - 아기 예수가 누우신 구유 앞에 있었다는 지푸라기, 예수님의 수염 한 가닥, 예수님을 못 박을 때 사용했다는 못 중에서 하나, 최후의 만찬 때 먹다 남은 빵조각, 성모 마리아의 머리카락 몇 가닥, 이 외에도 성인들의 몸에서 나왔다는 수많은 치아와 뼈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유물 중 어느 하나에 경배하는 것만으로도 100일 치의 면죄 값어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이 성당의 유물을 다 돌아볼 때 '19,000 유물 x 100일 = 190만 일', 즉 5200년만큼 연옥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면죄의 혜택을 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특권이 베풀어지는 날이 바로 11월 1일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이었습니다. 성인들이 쌓은 '잉여 공로'를 분배받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영적 보물 창고의 대방출'이라고 해야 할까요. 더욱이 교회는 이날 공개되는 성인들의 유물을 보고 거기에 약정헌금까지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려 190만 년의 연옥 생활 감면이라는 초대형 면죄를 선언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에게 이런 면죄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도 진정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11월 1일의 만성절 바로 하루 전날인 10월 31일에 그 비텐베르크 성당에 교회개혁을 요구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것입니다. '개신교의 출생 신고서'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반박문의 핵심은 제1조와 2조, 그리고 36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4:17]에서 회개하라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제1조) "이 말씀이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제2조)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죄와 벌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받을 수 있다."(36조) 루터는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 없었고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어 늘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매우 위선적인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르고, 집단의 명분과 개인의 잇속이 다릅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더 이상 옳고 그름은 없고 오직 '내 편'인지 '네 편'인지만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모두의 내면을 비추는 양심과 도덕의 거울이 사라졌습니다. 현대인은 '타율'(他律)을 싫어하여 '자율'(自律)을 추구합니다. '자기 안이 법'을 주장하면서 타율을 거부하고 자율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없는 자율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해 결국 타락합니다. 언젠가 미국의 대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악은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강함, 즉 인간만이 가진 이성의 자유에서 유래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 정신의 최고("the best") 안에 인간의 가장 교묘한 죄("the worst")가 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인간의 본성을 외면하고 자율을 추구한 인간은 자기 자신이 규범이 되어 자기 안에 갇혔습니다.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이 없는 인간은 자폐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초월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자율적 주체라는 인간을 신격화했습니다. 과거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푸코는 이런 '인간의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시 하늘로 향하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타율과 자율을 넘어 '신율'(神律)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율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 공허해진 자율에 종교적 깊이를 회복해야 합니다. 남을 속일 수 있고 나 자신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다는 초월적 신앙의 힘을 우리는 회복해야 합니다 .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에서 욥은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나"(욥기 13:9)라고 묻습니다. 실로 성서를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역대하 16:9)하신다 했습니다. "사람의 모든 걸음을"(욥기 34:21),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시편 7:9) 감찰하신다 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잠언 16:2) 하신다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시편 69:5)라고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다]"(시편 90:8)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전도서 12:14)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민한 신앙 양심을 가지고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울로 삼아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서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이 "정직을 기뻐"(역대상 29:17) 하신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시편 7:10)하신다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면] 네가 복을 받{을 것}"(신명기 6:18)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0)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아 자기를 속이는 자입니까? 거울 속의 자기의 때 묻은 얼굴을 보고도 애써 잊으려는 자입니까? 울면서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의 내가 웃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입니까? 몸을 구부리고 서서는 내 그림자가 바로 서지 않았다고 야단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며 말하면서 어둠 속에 행하는 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자매는 미워하는 자입니까? 나는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사람입니까? "또 주가 길이 다스리시리라"라고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주권을 노래하면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들 앞에 세금을 바치는 자입니까?

인생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과 싸움에서는 오히려 이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내면과 싸움에서 이기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성취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오직 사람만이 마음[내면]의 소리를 듣고 부끄러워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신실해야 합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도 삼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알면 부끄러운 일을, 무엇보다도 스스로 부끄러운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부끄러움이란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마음 '심'(心)에 귀 '이'(耳)를 붙이면 부끄러움을 뜻하는 '치'(恥)가 되지요. 수치(羞恥), 염치(廉恥) 할 때의 그 '치' 말입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일 때 생겨나는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입니다. 505년 전 독일의 교회개혁은 자기를 속일 줄 모르고 마음 내면 깊은 곳의 부끄러움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바보 수도사 루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루터의 이 신앙을 회복할 때 나 자신이, 내 가정이, 내 일터가, 그리고 이 세상이 올바로 서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정용철 님의 기도시 <눈물의 소원>으로 함께 기도합니다. "나를 당신 앞에서 드러내소서. / 나의 거짓과 위선, / 게으름과 안일함, / 욕심과 교만을 다 드러내소서. // 그러므로 당신 앞에서 / 노란 병아리처럼 울며 떨게 하소서. //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당신을 / 속이기 위해 나를 감추는 일뿐이었습니다. // 내게 몇 방울의 눈물이 있다면, / 한 방울은 나를 위하여, / 한 방울은 나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 또 한 방울은 그 많은 사랑의 기회를 주고도 / 내가 깨닫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 흘리게 하소서. // 그래도 한 방울이 남아 있다면 누군가의 눈물을 / 이것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방울 한 방울의 / 눈물로 나를 씻어 엄마 품의 아이처럼 / 순결하게 당신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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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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